우리는 전에 없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은 매 초 딜레마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옳고 그름마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닥쳐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유네스코의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줄곧 ‘21세기의 대화’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토론에는 전 세계의 과학자, 지성인, 작가, 정책결정권자들이 참여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논점을 제시한다. 

아달베르토 바레토는 빈민가의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위해 오랫동안 일해 온 브라질의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가난과 소외과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황폐화하는지 꿰뚫어본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마치 유령처럼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아달베르토 바레토는 공동체 치료를 통해 자존감과 희망을 되찾는 길을 제시한다.



소외와 마음의 병
아달베르토 바레토

나는 12년 이상을 브라질 포르탈레자(Fortaleza) 근방에 위치한 거주자 28만 1,000명의 한 파벨라(파벨라favela. 브라질의 슬럼가, 빈민가, 뒤이어 나오는 파벨라두는 파벨라의 주민을 말한다.)에서 일해왔다. 포르탈레자는 인구 200만 명의 대도시이다. 여러 파벨라의 주민들이 가뭄 때문에 농촌에서 빠져나와 도시로 이주했고, 소외를 야기하는 불공정한 경제정책이 빚어낸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전쟁의 가담자들이 되었다. 외관상 무기가 없는 이 전투는 개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 이 이주의 움직임이 그 개인들을 어떤 상실의 과정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이 과정은 경제적 빈곤화로 시작하여 문화, 전문 지식, 사회적 관계와 자긍심의 빈곤화로 이어진다.

대도시로의 도착 자체가 가장 뿌리 깊은 쓸쓸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시는 그들을 환영하지 않으며,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주자들은 도시 주변의 외곽, 빈민 지대에 머무른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단지 악몽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이 깨닫는 데에는 아주 짧은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일련의 또 다른 문제들이 시작된다. 어디에 살아야 하나? 수단도 없이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부양할까? 직업 훈련도 받지 않고 어떻게 일자리를 구할 것인가? 파벨라두(favelado)가 된다는 것은 지옥의 고통을 겪는 유령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안하고 절망스러운 일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추구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는 결코 그를 보거나 듣지 못한다. 추방당한 이들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 친숙한 주제들은 아마도 인정받지 못한 삶, 살아갈 공간을 가질 권리가 없는 삶의 실질적인 감정을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지옥의 고통에 빠진 유령은 21세기 브라질에 나타난 마음의 질병들의 원형일까?


공동체 치료의 고안

이러한 맥락에서, 맨 처음 우리는 파벨라 인권 센터의 중개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정신의학적인 상담을 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단지 일회적이었던 이 개입들을 통해, 우리는 예를 들면 실직당한 남편을 두고 집도 먹을거리도 없는 여성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한 개인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늘 자문하곤 했다. 대학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또한 개인적이고 생의학적인 틀을 넘어서, 가족과 공동체의 수준으로 배려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대학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양성하는 것은 그 사람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배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수많은 사람이 즉각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는 파벨라의 상황에서는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우리의 작업 방식을 바꿔야 했다. 또한 우리는 구원자의 모델, 해결책을 실어 나르는 전문가의 모델과 단절하고, 빈곤함을 넘어 인간적 그리고 문화적인 잠재력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 빈곤함에 너무도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강연을 열고 싶어 하고 약품들을 주거나 조언을 주고 싶어 하지만, 그런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이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과 1주일에 한 번씩 만남을 가졌고, 우리가 '공동체 치료'라고 불렀던 것을 발전시켰다. 관건은 자각과 집단적인 반성의 공간, 모든 사람이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을 표현하도록 시도해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함 소리가 난무하고 폭력이 곧 행동으로 옮겨지고 가장 강한 자가 이기는 공간이 이 파벨라에서, 우리는 대담하게도 '이 고통을 말'로 옮길 수 있도록 대화와 표현의 공간을 창조하고자 했었다. 이 계획은 야심찬 것이었지만 결실을 가져왔다.

이러한 만남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집단이 치료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집단 속에서 사회조직이 공고해지고, 사회적 소속감이 일깨워지는 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상호적인 표현과 개인적인 경험들의 교환, 타인에 대한 지지와 애정 어린 관계, 문화적 가치의 강화를 통해서이다. 개인들은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성공적으로 더 나은 사회 통합에 이른다.

우리는 여기에 여러 해 전부터 우리가 채택해오던 R.A.P, 즉 '적극적 참여 행위 연구(Recherche Action Participative)'의 방식을 접목했다. 이 방식은 대학이 지식 생산을 독점하는 것에 대한 거부로 정의되며, 일반인을 향한, 일반인의, 일반인을 위한 지식에 호소한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질병들이 집단 자체에 의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 안에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울 필요는 있다.

이 모델은 우리가 이미 브라질의 가난한 13만 개의 공동체와 함께 작업하는 브라질 가톨릭교회의 기관인 아이들의 목자(Pastorale del'Enfance)와 협력하여, 2,600명의 정신 보건 요원-우리는 이들을 공동체 정신 치료 전문의로 부른다-을 양성한 이래, 오늘날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이 정신 치료사들은 정신의학적인 어떤 해석이나 성찰을 행하는 대신,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도록 집단을 동원한다. 가령 집단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불면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면, 정신 치료사들은 다른 구성원들이 과거에 유사한 상황을 경험한 바가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다른 구성원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병의 원인이 되는 세 가지 근본 축

: 버림받음
여러 파벨라 지역의 주민들은 사회로부터 거절당해 버림받았다는 감정과 애도의 감정에 빠져 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부축해주지 않는다. 이런 버림받음의 영향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 나타나고, 신체적 외관에서도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때 이른 주름들, 갈라진 치아를 가진 턱, 덥수룩한 머리. 그 영향들은 여러 명이 되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가족들은 거리에서 살아간다. 버림받음의 영향들은 또한 사회적인 수준에서도 표면화된다. 허술한 건축, 마분지와 목재 조각들로 이루어진 동네 모습은 이러한 삶의 이야기들, 가족의 조각난 실존, 개인적 실존이 지닌 내면의 상처를 반영하고 있다.

이 버림받은 상황을 극복하는 데에는, 매우 다양한 제각각의 방법이 존재한다. 지역 단체들과 조합들은 생필품과 음식물을 한데 모아, 연결망을 구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젊은 사람들은 모여서 종종 범죄에 빠지고, 그들 중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은(우울증, 알코올중독, 약물 중독과 같은) 정신병적 대응물에 빠져들기도 한다.

종교적인 의식에 호소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예식들은 점점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장소가 되고 있다. 신체가 느끼는 고통의 감정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움직인다. 가톨릭적인 것이든, 아프리카계 브라질의 토속 종교적인 것이든, 개신교적인 것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적 의식은 실존에 중점을 둔 진정한 배려가 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삶의 가혹함 때문에 생기를 잃은 영혼을 사랑하게 된다. 일부 종교들은 위협적이기도 하다. 특히 펜티코트스파(펜티코티즘(Pentecôtisme). 성령의 작용을 강조하고 생활의 성성(聖性)을 역설하는 미국에서 발생한 종교운동)의 새로운 교회들과 하나님 왕국의 범세계적인 교회(최근 들어 파리에 등장한)는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문화적인 믿음을 거부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여러 세대를 거쳐 내면화된 준거 모델들과 단절하기를 권하고 있다. 이들이 야기하는 것은 사실상의 정체성 상실이며, 모두가 전적으로 따라야 하고, 다른 종교를 부정함으로써 긍정되는 종교적 가치에 맞추어진 거짓된 자아의 탄생이다. 악을 몰아낸다는 구실로 인간에게서 그 자신, 그의 믿음들, 그의 비판적인 생각, 그가 가진 가치들, 그리고 그의 영혼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프리카계 브라질 종교인 움반다(Umbanda)와 같은 다른 종교들은 정체성 형성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동거하는 새로운 가족 형태 안에서 환대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정체성 형성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민초들의 문화를 존중함으로써 좀 더 관용적인 형태의 공동체에 어울리는 것이 될 수 있다. 


: 치안 불안
치안 불안의 분위기는 사회 내부를 폭력과 분열로 들끓게 만드는데, 이는 그 분위기가 양산하는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주는 공포로 인해 자극받고 지속된다. 파벨라에서 비행과 범죄, 공격 본능과 같은 폭력은 실업과 맞물려 더 심해진다. 부자가 자신의 키보드를 통해 가상세계의 웹에 들어간다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반사회적인 인터넷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다른 사회단체들에까지 뻗어나간다. 나는 폭력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이 폭력 문화는 모든 선진국의 패러다임이고,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첨단 기술적 대항-문화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TV가 폭력, 특히 모든 파벨라 지역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까지 내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적 요소로서 치안이 상호 간의 신뢰를 만들어가는 데 필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치안이 보장된 삶은 또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본능을 지배하여 그것을 삶을 지탱할 힘으로 변형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 자존감의 상실
가장 비극적인 비참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파벨라두의 내면화된 비참함, 말하자면 무능력이라는 깊이 박힌 감정이다. 그들은 더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며, 소외되었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 이 자존감의 상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가령 침묵 같은 것을 통해 드러난다. 브라질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입술이 침묵할 때에는, 장기들(organes)이 말을 한다고들 이야기한다. 이 사람들이 집단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들이 타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에게서 박탈하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가족 내에서도 아이들을 깔보는 억압적인 교육은 아이들의 자존감의 상실은 직업상의 실패를 초래한다. 일자리는 구했지만 한 달 이상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불안감이 하도 커서 결국 그만두고 마는 것이다.

공동체 치료 기간과 병행하여, 우리는 자존감을 일깨우는 집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잠재력과 자신의 문화가 가진 잠재력을 재발견하도록 하고, 또 이 잠재력을 한데 모아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인 동력을 만들어내도록 할 목적에서 말이다. 이 동력은 그들 각자가 자기 역사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존재를 책임질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예방 정치를 위하여

버림받음과 치안 불안, 자존감의 상실과 관련된 문제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염려해야 하는 사태이다. 이 문제들로 인해 사회 내부가 폭력과 분열로 들끓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이 야기하는 공포와 비이성적인 행동들은 긴장과 절망, 불안의 분위기를 가중시키는데, 이것은 오직 집단적으로 활동하는 참여제도가 있을 때에만 해소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들이 없거나 효력이 없을 때, 개인들은 자신의 규칙과 제도를 창조한다. 이 '자신의 일에만 충실한 각자'는 동족상잔의 폭력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고통을 받는 개인들이 창조적 활동을 하도록 복돋워주는 적합한 수단을 고안하는 것은 반드시 고유한 개인적 가치들과 이전에 실추된 문화적 가치들에 근거해야 한다. 이 새로운 수단은 참여적이고 공동체적인 맥락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선험적인 가치 체계를 자신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각자가 지닌 경험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낳는 것은 바로 집단이다. 이러한 접근은 고통을 설명하는 모델과 이 모델이 함축하는 개입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치료 전문가들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모델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선형적이고 환원적이다. 예를 들면 화학요법을 권장하는 생의학 모델이나, 때로는 교육적이지만 때로는 억압적인 행위들을 외부로부터 강요하는 사회적 모델이 그러하다.

개인의 자기 계발은 사회집단을 변화시키는 요인으로서, 절대 권력을 지닌 근대의 복지 국가 모델과 같은 간섭주의적 모델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 모델은 종속을 강화하고 창조성을 질식시킨다. 예산 투자를 기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소외된 개인의 사회문화적 자본을 실제로 활용하여,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수동적인 희생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하여 그 개인이 사회 재건의 책임을 함께 떠맡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서 비판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정겨운 사회적 유대를 촉진시킬 만한 장소, 그래서 생활공동체에 새겨진 문화적인 소속감을 솟아나게 하는 장소를 만드는 것은 주체에게 필수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장소에서 유대로 이동하는 일이며, 단 한 사람이나 정책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개인적인 모델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해답이 공동체적인 것에 있다고 확신한다. 참여 운동을 시작해야 하며, 이 운동을 통해 각자는 집단이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하게 발전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집단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자존감의 상실은 자기에 대한 앎과 관련하여 무지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정체성 회복의 장소들을 마련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학문적인 지식은 결국 소위 대중적 지식을 인정하고 한데 아울러야 한다. 소외당한 자들의 자존감 회복은 21세기가 지닌 마음의 질병들에 맞선 투쟁의 초석이 될 것이다.

치료 요법을 실시하는 동안 내가 들은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끝마치고 싶다. 세상의 혼란과 무질서에 반항하는 자신의 아들을 진정 시키기를 바랐던 한 아버지가 세계 지도를 작은 조각들로 찢어버리고는, 세상을 바꾸기를 원했던 아들에게 그 지도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맞추라고 요구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그 지도를 다시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분이 흐른 후 아들은 그 지도를 다시 복원했다. 매우 놀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그 지도를 찢기 전에 그 지도의 뒷면에 한 사람의 초상화가 그러져 있던 것을 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의 유일한 관심은 그 사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을 되찾으면서, 세상을 되찾았던 것이다.


<아달베르토 바레토 Adalberto Barreto>
정신과 의사이자 민족학자. 세아라 연방 대학 의과 대학 교수, 통합된 지역 사회 정신 보건 운동의 브라질 총괄 책임자이다. 그는 노르데스테의 빈민가 지역들, 특히 포르탈레자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여러 저작을 출간했으며, 그 중에는 L'Indien qui esten moi(1996)가 있다. 엘리안 콘티니Éliane Contini의 저서 Un Psychiatre dans la favela(1995)는 그의 경험을 기술하는 데 바쳐진 것이다.


<이 기사는 (주)문학과지성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06.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신고


 

티스토리 툴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