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07은 실존인물이었다? 영국 역사상 최고의 첩보원 다스코 포포프의 삶
어딜가나 미녀가 따르는 최고의 첩보원... 진주만 침공 예견

한때 남자들의 로망이었던 007 제임스 본드.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원작은 소설이다. 저자 이안 플레밍은 영국 첩보부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으며, 덕택에 제임스 본드의 모델이 이안 플레밍 자신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소설 속 제임스 본드가 워낙 팔방미인 '엄친아'인 탓에, 그런 소문을 믿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소설 속 007만큼이나 영화같은 인생을 산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소설 007시리즈가 발표되기 십여년 전인 1940년대 영국의 첩보원으로 활약했던 다스코 포포프(Dušan Duško Popov, 1912~1981)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스파이 활동은 영화 속 007과 비교했을 때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1912년, 세르비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다스코 포포프는 선천적으로 플레이보이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염문설이 끊이지 않았고 어느 곳에 가든지 미녀와 사귀었다. 천부적인 첩보원으로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언어의 천재였던 그는 빠르게 스파이들의 핵심이 되었다.
 


다스코 포포프, 1912~1981

처음으로 스파이 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40년 2월, 친구인 존 니의 전보를 받으면서부터이다. 존은 포포프가 1936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재학시절에 알게 된 친구로, 전보 내용은 2월 8일 세르비아 호텔 앞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포포프는 모르고 있었지만 당시 존 니는 나치 간첩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그 만남은 포포프를 이용해 영국 내에서의 교류를 넓히고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영국 문서보관소가 새롭게 공개한 기밀문서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940년, 히틀러의 정책에 반감을 지녔던 포포프는 독일군에게 이용되기 싫어 주도적으로 베오그라드 주재 영국 상무관을 찾아가 영국에 정보를 제공하고 독일의 정보망을 흔들 수 있기를 바랬다. 며칠 뒤, 런던은 이 계획을 승인했다. 포포프는 자신이 계획한 '이중 플레이'에 의해 독일 간첩조직에 진입하여 이중간첩 생활을 시작했다.

기밀문서에는 또 포포프가 보이지 않는 잉크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그의 관련 문서에는 날짜가 적힌 문서와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적은 엽서, '이미 열어 봄' 또는 '검사'라고 찍힌 우편물, 여자친구에게 보낸 편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쓴 비밀정보. 이 손수권에 화학약품을 묻히면 글씨들이 나타난다. ⓒ예문

1941년 7월, 포포프는 미국에 파견되어 첩보조직 내에서 활동했다. 그의 독일인 상사가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좌시할 수 없다"라고 말했을 때 포포프는 이미 진주만을 기습하려는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영국 정보국의 동의를 얻은 포포프는 미국 주재 유고슬라비아 신문 특파원의 신분으로 뉴욕으로 건너 가 독일 정보기관이 지시한 임무를 완수한 뒤 미연방조사국에 '일본이 미국을 침공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영국 정보국과 연락을 취한 미 연방조사국 국장 애드가 후버는 포포프를 소환했다.

영국 정보국이 이미 포포프의 신분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연방조사국은 이를 의심했으며, 국장은 포포프가 풍류를 즐기며 프랑스 영화배우와 종일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포포프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후버는 결국 그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사기꾼 같은 간첩이다. 당신이 여기 온 이후 나치주의자라는 한 놈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경찰 조직을 이끌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6주 동안 호화로운 호텔에 머물면서 영화배우들이나 쫓아다녀 우리 법률을 심각하게 파괴했다. 심지어 내 부하를 세뇌하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러자 포포프는 후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에 온 것은 당신들이 전쟁에 대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나는 각종 방식으로 당신들에게 엄중 경고했다. 확실하게 말하겠는데 장소와 시간, 방식은 모르지만 미국은 틀림없이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5개월 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이런 만남에 매우 실망한 포포프는 착잡한 기분으로 미국을 떠났다.

1942년 11월, 포포프는 다시 영국에 나타났다. 연합군은 독일에 허위 경보를 보내고 독일에 대해 연속적으로 '스타지 행동'과 '마키아벨리 계획'을 실시하여 독일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스타지 행동'을 통해 영국은 독일 정보기관에 허위 정보를 제공하여 영국이 칼레 항 일대에서 대규모 상률 작전을 준비중이라고 알렸다. 그래서 독일 폭격기들을 영국 황실공군 기지로 유인하여 사정권으로 끌어들였다.

'마키아벨리 계획'에서 포포프는 위조 문서와 서신을 영국 장교의 시체와 함께 파도에 실려 보내 스페인 해안에 닿게 했다. 그 문서들 속에는 그리스 침공에 대한 기밀서류가 있었고, 독일군은 그 시체 속에서 '의외'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아울러 포포프는 독일인들에게 건네는 보고서 속에 많은 영국인과 미국인이 스코틀랜드에서 진행되는 낙하산부대 훈련에 참여했고, 영국에서 최근 일어난 비행기 실종사건을 은폐하려 한다는 등의 소식을 전했다. 베를린 당국은 즉시 사틴 섬에 부대를 증강하고 잠수함을 크레타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시칠리의 방어력이 약화되어 패튼 장군이 쉽게 진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44년 5월 초순, 정보가 넘쳐나자 이중간첩의 업무도 늘어났다. 그들은 정보를 진지하게 조작하고 연구하여 연합군의 전략 계획에 발을 맞추고 적들에게는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정보를 물샐틈없이 정확하게 조작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과연 약간의 착오가 독일 정보기관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1944년 5월 중순의 어느 깊은 밤, 영국 정보국의 한 인물이 포포프에게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적에게 발각되기 전에 헝가리 리스본으로 가 다른 대원들을 피신시킨 뒤 벨기에로 도망치라는 내용이었다.

포포프는 곧 리스본으로 가 조직원들의 피신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활동 중이던 첩보원들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기 하루 전에 그는 연합군을 도와 노르망디가 아닌 다른 지역에 상륙할 것처럼 독일군을 속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포포프는 2차대전 기간 동안 수많은 첩보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첩보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신비로운 사람들로서 못 들어가는 곳이 없으며, 없는 곳이 없다. 승리해도 자랑할 수 없으며, 실패해도 변명할 수 없다. 나의 무기는 거짓과 기만이다. 나 자신도 살인처럼 정상적인 사회 규칙을 위배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임무라는 생각에 불안감을 갖지 않는다."


다스코 포포프의 만년의 모습. ⓒ예문

영국은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인 1947년에 포포프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OBE(Order of The British Empire,영국 제국 훈장)를 수여했다.

포포프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내가 위험한 삶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진지한 태도로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주)예문과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발칙한 군사학

장지리|야오샤오화 | 송철규 옮김

예문 2009.12.31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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