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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08 [인물l역사] 외과의학의 아버지는 의사가 아니라 이발사?


"외과의학의 아버지는 의사가 아니라 이발사" 

구태와 싸운 실천의학의 선구자, 앙브루아즈 파레 이야기
 

오늘날 의학이라고 하면 바로 서양의학을 의미할 정도로, 양의학은 현대의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양의학이 이처럼 신뢰를 얻는 것은 서양의학이 과학적이라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세는 물론이고 학문이 부흥을 이룬 르네상스 이후까지도 유럽의 의학은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리 대학 의학부에서는 라틴어로 쓰여진 추상적인 이론만 신주단지 모시듯 했고, 정규 의사들은 환자에게 직접 처치나 수술을 하는 것을 천하게 여겨 기피했다. 치료는 기능직인 외과의사나 이발사의 몫이었다. 따라서 정규 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현장의 지식과 경험이 전무했으며, 현장에서 일하는 외과의나 이발사들도 낡고 열악한 치료법을 고수하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16세기에 이르러서도, 당시 최고 권위를 인정받던 의학책 <외과실제(practica in arte chirurgia)>에는 총탄의 화약에 독이 있다는 잘못된 주장이 실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 책에서는 해독을 위해 끓는 기름으로 상처를 지지라고 지시했다. 종군 의사들은 아무 비판 없이 이 치료법을 답습하여 병사들의 상처에 펄펄 끓는 기름을 들이부었고, 치료받는 병사들은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성로마제국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 군의 한 진영에 부상병이 너무 많아 기름이 모자라는 일이 벌어졌다. 병영의 종군 의사는 할 수 없이 미처 치료를 못 받은 병사들에게 화농연고를 발라 주고는, 병사들이 독 때문에 죽게 될까 밤새 걱정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기름으로 지진 병사들은 열이 나고 상처가 부어 괴로워하고 있는데 연고만 발라준 병사들은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의사는 전부터 환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끓는 기름 치료에 회의를 품고 있던 차라, 이를 그냥 지나치기 않고 같은 치료를 여러 번 시험해 보고는 기존의 치료법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린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이와 같은 사실을 프랑스어 논문으로 발표해 널리 알렸다. 이 의사가 바로 오늘날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é, 1510~1590)다.


45세의 앙부르아즈 파레(1561). 출처 16세기 문화혁명


최하급 의료직인에서 국왕의 수석 의사로

처음 전쟁에 종군했을 때, 파레는 의사 중에서도 가장 하급인 이발외과의사에 불과했다. 마을의 초등교육과 이발외과의사의 도제 수업을 받았을 뿐 정규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빈민 의료 시설에서 쌓은 경험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덕택에 오히려 파레는 전통 의학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이후 수많은 전쟁터와 의료 현장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며 명망을 얻고 마침내 국왕 샤를9세의 수석 외과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는 책 속 이론보다는 현장 경험을 중시했으며, 환자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지녀, 정규 의사들이 들은 체도 하지 않는 민간 요법에도 귀를 기울였다. 전쟁터에서의 경험을 쓴 파레의 논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화상 치료에 쓰는 찜질약을 가지러 약 보관소로 가자, 마침 거기 있던 나이 든 아낙네가 소금을 약간 뿌린 생양파를 썰어 상처에 갖다 대는 게 초기 처치에 좋다고 가르쳐 주었다. 가끔 실제로 경험은 했던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물집이 터지거나 곪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아낙이 말한 치료법을 기름에 화상을 입은 취사병에게 시험해 보았다. 다음 날 양파를 붙인 부위의 물집은 가라앉았지만, 그러지 않은 부위엔 큼직한 물집이 잡혀 있었다.”
또한 파레는 이렇게 새로운 치료법을 알게 되면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기존 치료법과 대조하여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 판단하는 근대적인 대조 실험을 반복했다.
“다른 병사가 손과 얼굴에 화상을 입었을 때, 얼굴 한쪽에는 양파 조각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는 흔히 쓰이는 화상 연고를 발랐다. 다음 치료 때 양파 조각을 붙여 둔 부위에는 물집도 없고 피부 파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반대편은 물집이 생겨 퉁퉁 붓고 피부도 뭉개져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치료 방식에 믿음을 가지게 됐다.”
이처럼 합리적인 실증주의는 스콜라 철학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의 의학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1542년 페르피냥에 부임했을 때는 총알이 몸 속 어디에 박혀 있는지 몰라 치료를 받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피격 당시의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총알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 병영에서 명성이 자자해졌고, 이후로도 수많은 전투에 종군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군 상층부에서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포위된 메츠에 잠입하기 위해 이탈리아인 대위와 둘이 적진을 가로지르는,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험을 감행하고, 스페인군의 포로가 됐을 때는 적군 장교를 치료해 줘서 풀려나기도 했다. 이는 대학의 의사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권위주의와 싸워 근대의학을 열다

그의 의학적 성과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결찰법, 즉 일종의 혈관 봉합술이었다. 당시에는 사지가 절단된 환자의 지혈을 위해 절단부를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참혹한 처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파레는 1552년 처음으로 혈관을 실로 묶어 혈류를 차단하는 결찰법을 사용했다. 인두로 지지는 방식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합병증의 위험이 높았던 데 비해, 결찰법은 신속하고 안전하며 환자의 고통도 적고 치유도 빨랐다.

하지만 구습과 권위의식에 젖어 있던 대학 의사들은 이 방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격렬하게 비판하며 파레의 저서 출판까지 방해했다. 하지만 파레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상대의 주장을 차근차근 반박하는 반론서를 출간하는 등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지식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또 파레는 어렵게 얻은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널리 보급하려고 애썼다. 당시 대학 의사들은 프랑스어를 ‘속어’ 라고 폄하하며 라틴어 출판만을 고집하고 이로써 의학 지식을 독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의료 직인 신분의 외과의나 이발사들마저도 스스로 고안한 치료법이나 조제법을 비밀로 숨기곤 했다. 파레는 이런 굴절된 비밀주의에 반대하였으며, 치료법, 해부학, 외과학 등에 대해 수많은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의 저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쓰여졌으며, 1575년에는 ‘앙부르아즈 파레 전집’으로 새롭게 묶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파리대학 의학부 의사들은 물론 일부 엘리트주의에 빠진 외과의들마저 비난을 퍼부었지만, 전문적 의료 지식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은 크게 호응했고 이 전집은 ‘속어 의학의 금자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파레는 책상물림 학문이던 의학을 환자 중심의 실천적 지식으로 전환시켰으며, 직인 기술 취급을 받던 외과학을 근대 과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1550년 출판한 <해부실시 초록>에서 “이 책에는 나 자신의 활동으로 터득한 것, 나 스스로 해 본 것이 아니면 담지 않았다”고 언명하고 있다. 손을 더럽히며 일하는 외과 직인-최하층 이발외과의-이었던 앙브루아즈 파레는 바로 그 때문에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근대 외과학의 가능성을 열었던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하여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16세기 문화혁명

야마모토 요시타카 | 남윤호 옮김

동아시아 2010.03.05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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