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
년 만에 인디언에게 사과한 미국 정부와 의회

미 정부의 약탈과 맞서 싸운 시팅불의 생애

 

2010 5 20, 미국 의회가 아메리칸 원주민 인디언에 대한 과거의 폭력행위와 잘못된 정책에 대해 공개 사과했다. 공화당의 샘 브라운백 상원의원은 이날 워싱턴에 있는 의회묘지에서 과거 인디언들에 대한 사과 결의안을 낭독했다. 이 결의안에는 과거 정부가 자행한 약탈행위와 잘못된 정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미국인을 대신해 사과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브라운백 의원이 이 결의안을 추진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이었다. 연방 상하원은 지난해가 되어서야 이를 통과시켰고, 2009 12월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결의안에 서명했다.

 

16세기부터 미국에 급격하게 유입된 백인들은 원주민이던 인디언들에게 상상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러왔고, 미국이 건국된 이후에는 정책과 국책사업의 미명하에 정부가 직접 침략과 약탈 행위를 저질렀다. 하지만, 이 명백한 만행에 대해 미 정부가 잘못을 인정하기까지는 200년이 넘는 시간이 걸렸다.

미 정부의 약탈이 가장 격심했던 19세기, 그 시절 북미 대륙 수백만 인디언들의 삶과 죽음을 대표하는 인디언 지도자 중 한 사람이 '시팅불(Sitting Bull)'이다. 그의 삶을 통해 미국의 인디언 침략의 역사, 그리고 폭압에 굴하지 않고 끝까지 싸웠던 인디언들의 저항정신을 들여다보도록 하자.

 

 

수(soiux)족의 대추장, 시팅불

 

추방과 죽음을 싣고 온 대륙횡단철도

남북전쟁이 일어날 무렵만 해도 미국에는 약 30만 명의 인디언이 있었고, 그 중 약 20만 명이 대평원에 살고 있었다. 그러나 남북전쟁 이후, 연방 정부는 이 땅을 멋대로 싼 값에 백인들에게 매각하고 대평원을 가로지르는 대륙횡단철도를 건설하여 백인들에게 서부 이주를 권장했다. 이렇게 하여 백인들이 대평원 지역으로 몰려들게 되자, 연방정부는 인디언 보호구역정책을 펼쳐 인디언들에게 정부가 정한 일정한 구역에 들어가 살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이 보호구역은 비좁고 황폐했으며, 연방정부가 설치한 인디언 사무국은 일부 백인들이 조약을 무시하고 보호구역에 침범하는 것조차 제대로 막지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인디언들의 주 식량이던 들소 떼를 백인들이 마구잡이로 학살하여 멸종 위기에 몰아넣었기 때문에 대평원 지역 인디언들의 삶은 말할 수 없이 어려워졌다. 이러한 백인들의 횡포에 저항한 대표적인 인물이 바로 시팅불(Sitting Bull), ‘앉아있는 황소라는 이름을 가진 인디언 추장이었다.


 


1869년, 미국 대륙횡단철도 개통식

 

‘느린 아이’, 인디언 전사가 되다.

시팅불은 수(Sioux)족 연합의 작은 부족이었던 헌크파파족 추장의 아들로 태어났다. 시팅불의 원래 이름은뛰어오르는 오소리였지만, 헌크파파 인디언들은 그를홍케스니느린 아이라는 별명으로 불렀다. 인디언들에게 느리다는 것은 사려 깊고, 주의 깊으며, 약간 고집 센 성격을 의미한다.

 

‘느린 아이가 용맹스런 인디언 전사로 인정받기 시작한 것은 열네 살 때이다. 열네 살 때 벌어진 크로우족과의 전투에서, ‘느린 아이는 어린 나이였지만 전투에 합류해 상대방에게 첫 번째 타격을 가했다. 수족의 관습에서는 최후의 일격이 아니라 첫 번째 타격을 가한 사람이 전투에서 가장 용감한 사람으로 공적을 인정받고 칭찬을 받았다. ‘느린 아이는 부족민으로부터 커다란 환영을 받았고, 그의 아버지는 아들에게 진정한 전사로서 자신의 이름인타탕가-이요탕가(Tatanka-Iyotanka)’, 시팅불이라는 이름을 물려주었다.

 

재앙이 찾아오다

1851 9월 미국 정부는 대평원의 모든 인디언 부족을 노스플래트 강가의 래러미 요새에 모이게 한 뒤 조약을 맺었다. 래러미 조약의 목적은 미국과 인디언 부족 간에 평화를 확립하고, 부족들 사이에서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규제하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부는 각 인디언 부족들의 영토 경계선을 확정했으며, 인디언 영토 내에 도로를 개설하고 미국의 군대 요새를 세우는 대신 백인의 도발 행위로부터 인디언들을 보호해 주겠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인디언들은 조약의 내용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조약 이행에 대한 의지도 확실하지 않았다. 인디언 부족 사이에서도 조약에 대한 이견이 많았는데, 시팅불은 이 조약을 격렬하게 반대했다.

 

인디언들과 미군의 첫 전투는 1854년 황소 한 마리를 둘러싼 시비 때문에 벌어졌다. 미군 중위가 먼저 발포하자 인디언들은 반격하여 29명의 기병대를 전멸시켰고, 백인들은 이 사건을 그래탄 대학살이라 부르면서 인디언에게 복수를 다짐했다. 그 결과 1855년 가을, 인디언들이미친곰이라고 불렀던 윌리엄 하니 대령이 인디언 마을을 공격해 87명의 인디언을 죽였다. 이로써 인디언과 미군 간의 기나긴 전쟁이 시작되었다. 1854년부터 1864년까지 인디언과 미군이 서로 학살하는 사건은 빈번하게 일어났고, 시팅불은 이 시기에 처음으로 미군과 전투를 벌였다고 추정된다.

 

애매한 평화협정과 전쟁을 부른 황금

여러 번의 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은 후, 미국 정부는 평원 인디언에 대한 정책을 바꾸어 그들과 평화협정을 맺기 위해 노력했다. 미봉책에 불과하긴 했지만, 평화 정책이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어 1868년 북부 인디언들은 사우스다코다 주의대 수족 보호구역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그러나 이 조약은 인디언들에게 이제까지의 유목 생활을 버리고 정착 농업의 길로 들어설 것을 요구하고 있었으며, 미국 정부가 보호 구역 내에 철도나 도로 건설을 할 수 있게 해 놓았다. 누구보다도 용감하고 뛰어난 전사이자 사냥꾼이 시팅불은 도저히 래러미 조약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에게는 백인과의 조약이라는 것이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시팅불은 보호구역으로 들어가기를 거부한 부족민을 이끌었다. 그 사이에도 미국의 서부 개척사업은 계속되어 1871년 철도 회사는 노던 퍼시픽 철도 건설을 계획하고 예비 조사에 나섰다. 1872 813일 시팅불이 크로우족을 상대로 전투를 계획하고 있을 때, 철도 측량사를 호위한 미군이 다가왔고, 인디언 전사들은 전투를 벌여 이들을 저지했다. 미군은 철도 건설을 지원하기 위해 미주리 강 상류 지역까지 군대를 강화시킬 목적으로 제 7기병대를 파견했다. 그러나 노던 퍼시픽 철도의 건설은 인디언의 공격 때문이 아닌, 1873년에 닥친 공황으로 중단되고 말았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다른 사건이 충돌을 불러 일으켰다. ‘대 수족 보호구역내에 있는 블랙힐즈에서 황금이 발견되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한 것이다. 공황으로 경제적 어려움을 겪던 수많은 백인들이 일확천금을 꿈꾸며 블랙힐즈로 몰려들었다. 1868년 조약에 의해 블랙힐즈는 엄연히 인디언의 땅이었기 때문에 정부는 하는 수 없이 군대를 시켜 백인 광부들을 막았지만, 목숨을 걸고 황금을 찾아 나서는 이들을 막기는 힘들었다. 결국 미국 정부는대 수족 보호구역밖에 있는 모든 인디언들에게 블랙힐즈 문제에 대한 협상을 위해 1876 1 31일까지 보호구역의 관리소로 집결할 것을 명령했다. 이것은 명령에 따르지 않는 인디언 부족을 말살시키기 위한 명분을 만들려는 의도에서였다.

 

리틀빅혼 전투 - 7 기병대의 전멸

1 31일이 지나도 보호구역에 들어오는 인디언 부족이 하나도 없자, 쉐리던 장군은 인디언을 토벌하고 마을을 불태울 계획을 세웠다.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는 것을 깨달은 시팅불은 부족 회의를 소집해 강력한 방어전을 전개할 것을 결의했다. 그리고 인근 지역의 인디언 겨울 캠프와 보호구역에 전령을 보내 자신의 캠프로 집결해 줄 것을 요청했다. 수천 명의 부족이 몰려들었고, 일부는 보호구역에서 오기도 했다. 이 모임에서 시팅불은 모든 부족민의 추대를 통해 대추장으로 선출되어 총 지휘를 맡게 되었다.

 

1876, 7기병대와 기번 부대 등, 600명의 병력이 시팅불의 캠프를 초토화시킬 목적으로 리틀빅혼 계곡에 접근했다. 그러나 지휘관인 커스터(George Amstrong Custer)는 인디언 연합의 수를 과소평가하여 성급하게 공격을 감행했을 뿐 아니라, 부녀자와 어린이가 함께 있는 캠프를 공격하는 우를 저질러 인디언 전사들이 죽기 살기로 싸우게 만들었다. 여기에 병력을 분산시키는 등 전략적 실패까지 겹쳐, 리틀빅혼 전투는 미군의 처참한 패배로 끝났다. 이 전투로 말미암아 미국 최연소 장군의 자리에 올랐던 남북전쟁의 영웅 커스터를 포함하여 제 7기명대 210명이 전멸했다.

 

 

조지 암스트롱 커스터(George Amstrong Custer, 1865)

 

7 기병대의 전멸은 백인들로 하여금 인디언에 대한 복수심을 불러일으켰고, 쉐리던 장군은 9천명 이상의 병력을 거느리고 인디언이 눈에 띄는 대로 공격을 가했다. 시팅불과 함께 리틀빅혼 전투를 치룬 크레이지 호스도 미군의 추격뿐 아니라 굶주림과 추위에 치쳐 1877년 항복했다. 이에 시팅불은 300명의 헌크파파족을 이끌고 캐나다로 건너갔다.

 

항복, 그리고 비극적인 죽음

시팅불의 캐나다 생활은 법적으로는 보장되었지만, 백인들의 무차별 남획으로 들소 떼가 거의 사라져 생계유지조차 힘들었다. 1881 7 19일 시팅불은 결국 187명밖에 안 남은 부족민을 이끌고 몬태나의 부포트 요새에서 항복을 하고 말았다. 1883 5 10, 2년간의 포로 생활에서 풀려난 시팅불은 이전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최후까지 인디언의 생활 방식을 고수하려고 노력했던 시팅불이었지만, 생애 마지막 6년 동안은 백인들의 세상을 더 많이 돌아다녔다. 인디언 대표로 미국의 공식 행사에 참여하기도 하고, 대평원의 생활을 담은 쇼에 출연하기도 했다. 1888년에는 인디언 보호구역을 대표하는 추장단 61명의 하나로 워싱턴을 방문하여 미 국회에 발의된 토지분배법에 반대 의사를 표했다.

 


1886년 버팔로 빌 코디(Buffalo Bill Cody)와 <와일드 웨스트 쇼>에 출연했을 당시의 시팅불.

 

1889 1 1일 파이우트 족의 신성한 인간인 워보카라는 사람이 계시를 받았다. 그는 기독교의 메시야가 인디언이 되어 지상으로 다시 내려오고, 인디언 부족들의 부활을 예언했다. 워보카는 이때를 준비하기 위해서는 싸움이 아니라 춤을 추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춤을 유령춤이라고 불렀다. 시팅불이 이 예연과 춤의 효력을 믿었는지는 분명치 않지만, 백인들은 보호구역의 인디언들이 유령춤을 추는 모습을 보고 전쟁을 준비하기 위한 춤을 추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었다. 백인들은 시팅불의 체포를 원했고, 1890 12 15일 새벽, '황소 머리'를 포함한 인디언경찰들이 시팅불을 체포하기 위해 그의 통나무집으로 몰려들었다.

체포 과정에서 경찰이 시팅불을 강제로 연행해 가려고 하자, ‘곰잡이가 윈체스터 장총으로황소머리를 쏘았다. ‘황소머리는 쓰러지면서 권총으로 시팅불의 가슴을 명중시켰다. 체포과정에서 생긴 우발적인 사고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시팅불은 자신이 그토록 목숨을 걸고 지키려고 했던 동족의 손에 비극적인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

 

 먼 곳을 응시하고 있는 시팅불. 그는 끝까지 평화가 회복되기를 바랐다.

 

백인들의 무차별적인 침략에 대항애 용맹스럽게 투쟁한 인디언 추장들은 많이 있지만, ‘수족의 대추장시팅불만큼 오랜 기간 일관되게 백인에게 굴복하지 않고 용맹스럽게 투쟁한 인물도 드물 것이다. 그는 조상 대대로 살아 온 자신의 영토와 생활 방식을 지키기 위해 백인에 맞서 싸웠고, 끝내 그것을 지키기 위해 순교자와 같은 죽음을 맞이했던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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