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으스스한 유적지, 카타콤의 유래와 역사


사람 뼈로 만들어진 제단, 벽에 난 구멍마다 시체가 들어찬 어두운 통로……. 공포 영화의 배경 묘사가 아니다. 지금도 로마 근교를 비롯해 많은 지역에서 볼 수 있으며, 기독교의 성지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고대의 지하무덤, 카타콤의 모습이다.

카타콤은 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이 교우를 묻기 위해 만든 지하무덤이었다. 2~4세기 로마제국에는 사람이 죽을 경우 화장하거나 성벽 안에 묻어야 한다는 법률이 있었다. 이 법령은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엄격하게 적용됐는데, 기독교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한 교우는 땅에 묻어야 부활과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었다. 자신들의 신앙을 보호하면서도 로마제국의 법령을 어기지 않기 위해 부유한 기독교도들은 성 밖 도로 옆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런 무덤을 카타콤(Catacomb)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기독교도 무덤은 이처럼 도로 양편의 공터에 세워졌다.

초기의 카타콤은 2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비교적 소박한 동굴 형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동굴에 묻히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곧 거대한 지하묘지가 형성됐다. 로마의 지하묘지 대부분은 4층으로 되어 있고 좁은 통로와 계단이 체계적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졌다. 망자의 사체는 동굴의 벽에 구멍을 뚫고 안치했다.

원래 이 지하묘지는 '파수리'라고 불리던 전문가들이 지은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십분 발휘해 로마 지하에 거대한 지하세계를 건설했다. 지하묘지의 통로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사방팔방으로 뚫려 있었는데, 각 층은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들은 이런 작업 이외에도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어 이 지하묘지가 인공이 아닌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동굴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도굴을 막고 사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초기 작업자들은 복도를 좁게 그리고 미로처럼 만들어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여간해서는 출구를 찾거나 되돌아갈 수 없도록 했다. 이는 망자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지하묘지는 어둡고 습하기 때문에 공기 중에는 악취가 만연했다고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지하묘지에 들어선 사람들은 누구나 이 절대적인 어둠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카타콤의 갱도 ⓒ예문 

그런데 3세기 무렵, 이처럼 음습한 지하묘지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자유롭게 집회를 가질 수 없게 되자 기독교도들은 당국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다. 이때 가장 안전한 장소가 바로 지하무덤 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발렐리아누스 황제는 지하공동묘지를 색출했고,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가장 많은 기독교도들이 카타콤으로 숨어든 것은 '피의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였다. 이 시기 기독교도들은 종교가 드러나는 즉시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주민 전체가 기독교도로 들어난 마을은 그대로 불태워졌다. 발각된 기독교도들은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검투대회에서 맹수의 밥으로 던져지기도 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음습한 묘지 속으로 숨어들었다. 카타콤의 갱도는 미로와 같이 복잡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추격하는 로마 병사들을 따돌리는 데 적합했다. 미로 속을 헤매다 시체로 발견되는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길을 잃는 여행객들이 왕왕 발생하기 때문에 로마 당국은 카타콤은 일부만 개방하고 있다.) 이처럼 지하묘지로 피신한 사람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었다. 죽은 자를 묻기 위해 만들어진 카타콤이 기독교도들의 목숨을 살리는 안식처가 된 것이었다.
 


카타콤의 내부. 곳곳에 새겨진 그리스어가 보인다. ⓒ예문

카타콤은 로마뿐 아니라 이탈리아 다른 도시들에도 존재했다. 이러한 지하묘지는 훗날 프랑스에도 지어졌는데, 그 면적이 거의 파리 시내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하다. 18세기에 도시가 급성장하며 묘지가 부족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리시는 신원미상의 묘지를 폐기하고 유골들을 지하터널에 납골했다. 그 결과 300km에 달하는 지하터널 벽에 인골이 빼곡히 박히게 되었다. 로마의 카타콤과 유래나 의미는 다르지만, 유럽에서 로마 카타콤을 모티브로 하는 지하묘지가 계속해 지어졌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오늘날 카타콤은 기독교 순례자들이 반드시 찾아가는 성지가 되었다. 박해와 순교, 무수한 죽음과 공포를 이겨낸 신앙의 힘이 깃든 곳, 카타콤은 가장 성스러운 동시에 가장 으스스한 유적지 중 하나이다.


<이 기사는 (주)예문과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

발칙한 고고학

후즈펑 | 송철규 옮김

예문 2009.12.05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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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로스는 실존했다? 식인황소에 바쳐진 인간제물의 진실

크레타의 왕이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을 데려다 식인황소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쳤다는 신화를 들어보았는가? 그런데 이러한 신화 속 이러한 이야기가 완전히 상상의 산물만은 아님이 밝혀졌다. 크레타 왕국의 유적에서 살해당한 청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것이다.

지중해로 둘러싸인 발칸 반도 남부에는 아름다운 나라 그리스가 자리 잡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인류 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로 손꼽히며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리스 신화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그런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크레타(Creta)섬의 미궁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 신화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드물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크레타 섬에는 미궁이 있었다고 한다. 미궁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Minos)가 만든 것으로 황소에게 사람을 바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미노타우로스라 불리는 반인반수의 식인황소였다.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제우스 신이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었다. 그는 강력한 힘을 지닌 국왕으로 도시국가연합을 세우고 법전을 제정했다. 점점 자신의 권력에 도취한 미노스는 어느 날 제사에 쓸 황소를 보고, 신에게 바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나머지 좋지 않은 다른 황소를 보고, 신에게 바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나머지 좋지 않은 다른 황소와 그 황소를 바꿔치기했다. 이에 화가 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그의 자식들 가운데 소머리를 가진 괴물이 태어날 것이라 예언한다.

후에 이 예언은 현실이 됐다. 왕비 파시파에가 미노스가 바꿔치기한 황소에게 그만 반해버린 것이다. 황소를 사랑하게 된 왕비는 고민 끝에 암소의 몸통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황소와 사통했다. 그 결과 머리는 황소고 몸은 사람인 괴물이 태어났으니, 크레타인들은 이 괴물을 '미노타우로스'라 불렀다. 다 자란 미노타우로스는 도끼를 휘두르며 사람을 잡아먹고 궁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왕비가 낳은 엄연한 왕자를 죽일 수는 없는 일. 왕은 천재 건축가 다이달로스에게 부탁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미궁, 라비린토스(Labyrinthos)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무수히 많은 통로와 방이 있어 한번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들어진 미궁의 중앙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두기 위해서였다.
한편 미노스 왕은 또 다른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에서 열린 경기에 참가했다가 사망하자, 아들의 복수를 위해 아테네에 군대를 파견했다. 결국 아테네인들은 항복했고, 9년에 한 번씩 7명의 소년과 7명의 소녀들을 미노타우르스에게 바치게 됐다. 껌껌한 미로 속을 헤매던 아테네의 아이들이 미노타우로스와 마주칠 때면, 미궁에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미궁의 비극이 끝난 것은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 덕분이었다. 자진하여 희생제물이 되기로 한 왕자가 크노소스 궁전에 도착하자, 그를 본 공주 아리아드네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그를 본 공주 아리아드네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테세우스를 구하고 싶었던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마술 검과 실뭉치를 주면서 실을 입구에 매어놓고 가닥을 풀면서 들어가라고 일렀다. 왕자는 미노타우로스를 찾아 미궁 속으로 들어갔고 한 차례의 격투 끝에 마술 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찔러 죽였다. 왕자는 다시 실을 좇아 미궁을 빠져나왔고 공주와 함께 아테네로 돌아갔다. 


크레타 섬 유적에서 발견된 황소 경기 장면. 크레타 섬에서 황소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동물이었다. ⓒ예문

신화 속의 왕 미노스는 과연 실재하는 인물일까, 아니면 신화 속의 가상 인물일 뿐일까.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Thukydides)의 저서에도 미노스 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의문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미노스 왕조가 있었다는 크레타 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문은 19세기 말, 영국학자 아서 에반스(Arthur Evans)에 의해 비로소 풀렸다. 그는 1893년 아테네에서 삼각형 또는 사각형 형태의 문자와 부호가 새겨져 있는 돌을 발견했다. 이 돌이 크레타 섬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 그는, 이듬해 크레타 섬으로 가 폐허에서 대량의 상형문자 파편들을 수집했고 이후 25년에 걸쳐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지를 발굴했다.

에반스가 발굴한 궁전은 현재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Iraklion)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다. 궁전에는 중앙정원을 중심으로 1,500여개의 궁실이 분포돼 있는데, 높은 지역에 잇는 서쪽 건물은 대다수가 2층집이고 낮은 지역에 위치한 동쪽 건물들은 4층집이 주류를 이룬다. 각 궁실들은 복도, 계단, 대청 등으로 복잡하게 연결돼 있어 미로에 빠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이 궁전은 명실상부한 미궁임에 틀림없다. 왕실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힘든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
 


크노소스 궁전의 일부. 전설 속의 미궁은 크노소스 궁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문 

결국 신화 속의 미궁은 크노소스 궁전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노타우로스의 존재와,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이 그의 먹이로 바쳐졌다는 이야기 역시 사실인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궁의 존재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후세에 덧붙여진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리라 믿었다. 그러나 곧 '아테네 아이들이 인신공양의 제물로 바쳐졌다'는 대목이 신화 속 허구만은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다.
크레타 왕국의 문화가 제일 찬란했던 기원전 2300~1500년경은 바로 미노스 왕조의 시기였다. 미노스 왕의 강인함과 현명함, 통치력에 힘입어 나라는 번성기를 맞이했다. 에게 해의 여러 섬들은 미노스 왕조의 신하를 자청했으며, 아테네도 공물을 바쳐야 했다. 당시에 미노스 왕조가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노소스 궁전의 내부. 지금 보아도 화려하고 세련된 무늬의 벽장식과 벽화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예문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원전 1500년경, 크레타 섬의 모든 도시들이 동시에 파괴됐다는 점이다. 크노소스 궁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밀이 드러난 것은 1967년,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에 의해서였다. 크레타 섬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는 화산으로 이루어진 산토리니(Santorini) 섬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해발 566m에 불과한 이 화산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1500년경 산토리니 화산이 폭발하며 섬 자체가 순식간에 두꺼운 화산재 속에 매몰됐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화산분출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이집트 상공에도 3일간 연속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계속됐다고 한다. 곧이어 화산분출로 인해 발생한 높이 50m의 해일이 크레타 섬을 강타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스피리돈 마리나토스는 크노소스에 닥친 재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크노소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어서 돌과 흙이 뒤범벅된 화산재가 엄습했다. 불똥과 시커먼 연기를 동반한 화산재는 순식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화산과 지진으로 인한 해일이 해안을 덮쳐 육지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다."

순식간에 화산재로 뒤덮인 덕분에 크노소스 궁전과 그 일대는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화려하게 채색된 벽화와 도자기, 생활물품들이 다량 발굴됐으며 문자가 기록된 진흙판도 수만 장이나 출토됐다. 그런데 그 진흙판 가운데서 뜻밖의 문구가 발견됐다. '아테네에서 여자 7명, 남녀 어린이 각 7명씩을 공물로 바쳤다', 이는 미노타우로스의 신화에서 전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곧이어 발굴된 섬의 지하에서는 200여 구의 인골이 발굴됐는데, 이중 상당수가 10~15세 남녀 청소년의 것으로 밝혀졌다. 유골의 뼈에는 칼에 긁힌 흔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후 버려진 것이다.
한편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어느 신전에는 사제와 그의 조수 여러 명이 제사를 진행하던 도중 화산폭발을 맞이한 듯 쓰러져 있었다. 신전에는 제사용 도자기 그릇과 제단이 남아있었는데, 제단에 누워있는 제물을 본 고고학자들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165cm 정도 키의 젊은 남성이었던 것이다. 제단 주변에서는 제물의 피를 받기 위한 그릇과 날카로운 청동칼도 발견됐다. 제물이 된 대상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아테네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크레타 왕국에서는 실제로 인신공양이 이루어졌다. 아테네인들은 바다 건너 섬에서 행해진다는 무시무시한 제의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들은 크레타 왕국에 공물로 사람을 바치고 있었다. 여기에 미노스 왕조의 강력한 왕권과 크레타 왕국의 황소숭배 풍습이 어우러져 식인 황소와 같은 신화적 존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아테네 인들의 상상력은 크레타의 횡포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줄 영웅 테세우스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화와는 달리 오늘날 유적은 인간제물의 비극이 크노소스 왕국이 멸망할 때에야 비로소 끝났음을 보여준다.


<이 기사는 (주)예문과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발칙한 고고학

후즈펑 | 송철규 옮김

예문 2009.12.05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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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키스탄의 모헨조다로는 기원전 1500년경 사라진 인더스 문명의 도시이다. 그런데 이 유적지에서 일본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과 비슷한 수준의 방사능 함량을 가진 물질이 발견됐다면? 더욱이 이 지역에 전해 내려오는 서사시에 묘사된 고대의 전쟁에 흡사 핵전쟁을 떠올리게 하는 묘사가 들어있다면…? 예사롭게 넘길 수 없는 이야기다.

파키스탄 신드(Sind) 지방 남쪽에는 반원형의 폐허가 있다. 이곳은 낮에는 강한 모래바람 때문에 눈조차 뜨기 어려우며, 밤이면 추위가 엄습하는 사막이다. 오랫동안 현지인들에게 '죽은 자의 언덕'으로 불렀던 이 폐허에서, 1922년 우연히 동물의 모습과 이해하기 어려운 문자가 새겨진 몇 개의 석각 인장이 발견됐다. 그 후 60여 년 동안의 고고학 조사와 발굴을 통해 이곳이 기원전 2600년경 건설된 고대도시의 유적지, 모헨조다로(Mohenjo-Daro)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은 폐허가 된 모헨조다로 유적지 ⓒ예문

모헨조다로는 청동기시대 인더스 강 유역에 세워진 웅장한 도시였다. 독특한 점은 성벽과 공공건물, 일부 도로와 상하수도를 모두 불에 구운 벽돌로 만들었다는 것이다. 도시규모로 볼 때 당시 인구는 약 40,000여 명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도시의 도로는 대부분 동서와 남북으로 열을 맞추어 곧게 뻗어 있으며 서로 교차한다. 수천 채의 집들은 바둑판처럼 정렬돼 있었다. 모든 집은 6~10개의 방과 정원으로 이루어졌는데, 대부분 우물과 깨끗한 욕실을 갖추고 있었고, 잘 정돈된 배수구로 폐수를 내보냈다. 또한 외벽 안쪽에는 쓰레기 전용 배출구가 있어서 주민들은 이 통로를 통해 쓰레기를 바깥쪽 도랑으로 버렸다. 그 도랑은 다시 하수도 체계와 연결됐다. 이처럼 정돈된 오물 및 오수 처리체계는 당시로서는 세계적으로 유일무이한 것이었다.

도시는 문명발전의 중요한 지표이다. 일부 학자는 모헨조다로처럼 발달된 도시계획은 1,000여 년 뒤 고대 로마시대에서나 볼 법한 수준이라고 언급했다. 모헨조다로가 한창 번성했을 무렵은 대다수 인류가 동굴에서 살거나 나무와 진흙으로 엮은 엉성한 집에서 생활하던 때였다.
 

 


모헨조다로에서 출토된 청동 인물조각상. 모헨조다로에서 발굴된 세련된 예술품들은 고대 인도인들이 우월한 문명을 누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예문

그러나 기원전 1500년 무렵 어느 날, 모헨조다로는 갑자기 모래 속으로 사라져버렸다. 이는 이곳 주민들이 짧은 시간 내에 도시를 버리고 종적을 감추었다는 것을 의미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모헨조다로 주민들이 도시를 버리고 이주했다면, 어째서 다른 곳에서는 비슷한 도시문명이 나타나지 않았을까? 이런 수수께끼를 놓고 학자들 사이에서는 논쟁이 끊이지 않았다.
역사학자들에 따르면 옛날 모헨조다로 지역은 넓은 인더스 강의 영향으로 초목이 무성하고 관개시설을 통해 드넓은 옥토가 있어 찬란한 인류문명을 꽃피웠던 곳이라고 한다. 후에 지나친 방목과 개간으로 생태균형이 파괴되면서 땅이 척박해졌고, 뜨거운 태양 아래 수분이 빠르게 증발하고 강한 바람이 잦아지면서 끝내 사막으로 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런 해석만으로는 수만 명에 이르던 주민들의 실종을 설명할 수 없다.
그렇다면 혹시 대지진 같은 재해가 도시를 파괴한 것은 아닐까? 그러나 어디에서도 지진 등 재앙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전염병이 주민들을 내몰았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었다. 그렇다면 살아남은 주민들은 왜 다른 곳으로 이동한 뒤 같은 수준의 도시를 재건하지 않았을까? 이외에 다른 민족의 침략설을 제기한 사람도 있으나, 모헨조다로 같은 문명이 인근의 원시 야만족에게 정복당했으리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흥미로운 점은 모헨조다로가 인도어로 '죽은 자의 언덕'을 뜻한다는 것이다. 혹시 이 이름 이면에 어떤 사연이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일련의 유골들은 이런 의문에 실마리를 제공해주었다. 길가의 유골들은 재난이 미처 손쓸 수 없을 정도로 갑자기 발생한 듯 누워있었는데, 이 유골들에서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희생자들과 비슷한 정도의 방사선 함량이 검출됐던 것이다. 뿐만 아니라 연구자들은 폐허에서 마치 원자탄이 터진 마냐 지상에 남아있는 충격파와 핵 복사열의 흔적을 찾아냈다. 유적에서 발견된 대량의 점토와 광물 파편을 분석해본 결과 섭씨 1,400~1,500도에서 용해된 것임이 밝혀졌다. 이런 온도는 당시의 제련기술로는 이를수 없는 수치였다.

모헨조다로 거리 곳곳에서 발견된 검은 유리덩어리들은 이러한 의혹을 증폭시켰다. 유리처럼 결정화된 돌 파편들을 분석한 결과, 짧은 시간 내에 섭씨 1,500도 이상의 높을 열을 받았다 급속하게 식는 과정에서 고체화된 돌이란 사실이 드러난 것이다. 게다가 이 암석들은 핵폭발로 인해 발생한 고열이 주변의 암석을 녹여 만들어지는 트리니나이트(Trininite, Atomite 또는 Alamogordo Glass라고도 함)와도 매우 유사했다. 이렇게 순식간에 고열을 발생시켜 지면에 흔적을 남기고 돌을 유리질화 시킬 사건은 단 하나, 핵폭발뿐이다. 

"구르카는 빠르고 강력한 비마나(전차의 이름)를 타고 브리시스와 안타카의 도시를 향해 단 한 발의 발사체를 쏘았다. 이 무기는 마치 온 우주의 힘이 응집돼 있는 듯, 태양의 만 배만큼 밝은 불과 연기의 백열 기둥을 솟구쳐 오르게 했다. …강력한 벼락, 거대한 죽음의 메신저는 브리시스와 안타카의 모든 사람들을 재로 만들어버렸다."
기원전 10세기경에 있었던 바라다족의 전쟁을 기록한 서사시 《마하바라타(Mahabharata)》의 한 장면이다. 시는 당시의 전쟁상황을 이렇게 전한다.
"공중에서 폭발이 있었고, 곧 섬광이 이어졌다. 남쪽 하늘에서는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았는데, 태양처럼 밝은 불빛이 하늘을 둘로 갈라놓았고, 집과 거리와 모든 생물이 이 갑작스러운 불길에 모두 타버렸다. …무서운 열기가 동물을 쓰러뜨렸고 강물을 끓게 했으며 물속의 고기들이 익어 죽었다. 시체는 마치 마른 나무처럼 타버렸고 머리카락과 손톱은 떨어져 나갔다. 날던 새는 공중에서 타죽었으며, 식물은 모두 오염됐다."
폭발로 인한 섬광, 밝은 불과 연기의 백열 기둥, 강물을 끓게 할 정도의 열기……. 현대인이라면 누구나 이를 읽고 영화 속 핵전쟁 장면을 떠올릴 것이다. '원자탄의 아버지'로 불리는 로버트 오펜하이머(Robert Oppenheimer)조차 고대 인도 서사시에 나오는 이 기록이 마치 핵폭발 후의 상황 같다고 했을 정도이다.

 

역사 이전의 전쟁을 기록한 대서사시 마하바라타. 여기에 묘사된 전쟁장면은 핵전쟁 장면을 연상시킨다. ⓒ예문

핵전쟁을 연상시키는 전쟁장면이 고대인들의 상상에 불과한 것이라면, 인더스 문명의 유적지 모헨조다로에서 발견된 핵폭발 증거들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상상할 수도 없는 신화 속 전쟁들이 실재한 것이었고, 고대문명이 정말 핵폭발로 인해 일시에 소멸된 것이라면? 핵전쟁에 대한 위험성이 끊임없이 대두되는 21세기, 모헨조다로를 둘러싼 섬뜩한 추측과 마하바라타 속 전쟁 이야기는 과거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이 기사는 (주)예문과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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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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