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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서 되찾아온 신윤복 화첩

서화와 자기는 조선의 자존심이다 – 우리문화 지킴이 간송 전형필 


혜원전신첩》 중 <월하정인>,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간송 전형필, 김영사)

혜원 신윤복. 조선을 대표하는 화가 중 한 사람이다. 조선의 풍속과 아름다움을 한 화폭에 다 담아낸 이 천재 화가는 몇 년 전 드라마 ‘바람의 화원’으로도 소개되어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보고 있는 혜원의 그림 대부분이 일제 시대에 일본으로 팔려나갔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현재 국보 135호로 지정된 혜원전신첩(간송미술관 소장)에는 우리가 아는 <월하정인>, <단오풍정>과 같은 혜원의 대표작이 30점이나 들어있다. 그러나 이 귀중한 화첩은 일제 강점기를 틈타 일본인 골동품상의 손에 들어가 현해탄 너머로 팔려가고 말았다. 그것을 직접 일본까지 건너가 되찾아온 사람이 바로 우리에게 간송미술관 설립자로 익히 알려져 있는 간송 전형필 선생이다. 소설가 이충렬 씨가 재구성한 일대기 '간송 전형필(김영사)'의 한 부분을 통해 그 때의 일화를 살펴보자. 


일본에 팔려간 ‘바람의 화원’

1934년 겨울의 일이다. 당시 간송 전형필 선생은 아직 이십 대 후반의 젊은이였지만, 이미 우리 미술품 보존사업에 뜻을 두고 사재를 털어 우리 고서와 그림을 사 모으는 중이었다. 간송은 일본 학자가 쓴 ≪조선의 건축과 예술≫에서 흑백 도판으로 소개된 혜원 신윤복의 그림을 발견했다. 수장자를 찾아보니, 개인이 아니라 도미타 상회였다. 간송은 미술품 중개인 신보 기조에게 도미타 상회에 대해 물었다.

“10여 년 전 도미타 씨가 진남포에서 경성으로 이사 와, 남대문 옆 문파밀 호텔 안에 도자기와 고서화, 민예품을 판매하는 조선미술품 진열관을 개설했습니다. 그때 초대받아 갔는데, 혜원 풍속화첩을 전시하고 있어서 몇 점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림이 30점 정도 되는 화첩인데, 도미타 씨가 매우 아끼는 물건이라 팔려고 전시한게 아니라고 했습니다. 1930년 도미타 씨가 세상을 떠나고, 유품은 오사카의 야마나카 상회에서 일괄로 구입했다고 들었습니다.”

야마나카 상회는 이전 간송과 거래가 있던 곳이었다. 간송은 수소문 끝에 화첩이 야마나카 상회 오사카 지점에 있다는 것을 알고 거래를 타진했다. 하지만 상대가 부르는 값이 너무 셌다. 자그마치 5만 원이었다. 당시라면 경성에 기와집을 쉰 채는 살 수 있는 돈이다. 지나친 가격에 간송은 거래를 포기할까도 생각했지만, 결국 야마나카 상회와 가격을 흥정해보기로 하고 신보와 함께 현해탄을 건너 오사카로 갔다. 야마나카 상회에서도, 값이 제법 나가는 화첩이어선지 사장인 야마나카 사다지로가 교토 본점에서 오사카까지 왔다.


현해탄을 건너 혜원을 찾아오다

화첩을 앞에 두고 간송은 넋을 잃었다. <월하정인>, <쌍검대무>, <상춘야흥>….. 당시 사회의 앞뒷면을 그린 아름다운 풍속화가 가득했다. 보존 상태도 완벽해서 채색도 어제 그린 듯 생생했다. 한 시간 가까이 화첩에 빠져든 후에야, 간송은 중개인 신보를 통해 흥정을 시작했다.



《혜원전신첩》 중 <상춘야흥>,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간송 전형필, 김영사)

그러나 흥정은 쉽지 않았다. 야마나카는 1만원을 내린 4만 원에서 더 이상 양보할 수 없다고 못을 박았고, 신보는 2만 원 이상은 힘들다고 했다. 흥정에 전혀 진전이 없자, 간송은 인연이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야마나카 선생, 시간을 너무 오래 뺏은 것 같아 송구합니다. 가격 조정이 안 되어 섭섭하지만, 눈이 크게 호사를 했으니 이번 여행이 헛되지만은 않았습니다그려.”

마음을 비운 간송이 담담한 목소리로 작별인사를 하는 참이었다.
야마나카가 입을 열었다.

“전 선생, 지금부터 제가 드리는 말씀은 장삿속에서 하는 말이니 오해하지 말고 들어주시기 바랍니다.”

야마나카는 당시 일본 최고의 골동품상이었다. 그가 마지막 흥정을 제안한 것이다.

“이 화첩을 이렇게 오래 들여다본 분은 전 선생이 처음입니다. 저희 상점에서 수장한 그림을 이토록 사랑해주시는 분을 만나니 기분이 참 좋습니다. 저와 전 선생의 인연은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사실 저는 작년 말 전 선생이 석조물 몇 점을 낙찰받으셨을 때, 신보 씨를 통해 젊은 조선 청년이라는 말을 전해들었습니다. 그때 누군지는 몰라도 기개가 대단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동안 일본으로 보내겠다는 사람만 봤지, 되사가는 경우는 처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번에도 전 선생이라고 해서, 직접 뵙고 싶어 오늘 이 자리에 나온 겁니다. 저는 전 선생이 화첩을 바라보는 모습을 보면서, 이 화첩은 전 선생에게 가는 게 옳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전 선생, 서로 만 원씩 양보해서 3만 원에 이 화첩을 수장하시면 안되겠는지요? 만약 만 원이 부담되신다면, 전 선생이 편한 날짜로 정해 주시는 어음을 받겠습니다. 6개월이나 1년 후라도 좋습니다. 제가 더 이상 가격을 조정해드리지 못하는 것은, 제가 판단한 가치를 무너뜨리고 싶지 않기 때문이니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3만 원이면, 그림 한 점에 천 원, 요즘 가치로 3억씩 총 90억 원이다. 노회한 골동품상과 재력 있는 젊은 수장가의 팽팽한 기싸움이었고, 야마나카는 이제 간송이 제시한 액수와의 차액인 만 원을 외상으로 주겠다는 카드를 던진 것이다. 돈이 넉넉지 않은 수집가에게는 좋은 카드겠지만, 간송은 외상도 어차피 줄 돈이기 때문에 큰 의미가 없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2만 원을 고집하면 흥정이 깨질 것은 불문가지였다. 

“야마나카 선생이 이렇게 양보해주시니 고맙습니다. 그러나 선생께 원칙이 있듯이, 제게도 외상을 하면서까지 수집하지는 않는다는 원칙이 있습니다. 저도 마지막으로 말씀드리지요. 2만 5천 원을 준비해왔습니다.”

야마나카는 생각에 잠겼다. 간송의 마지막 카드라는 걸 직감적으로 느낀 것이다. 차액은 기와집 다섯 채 값으로 좁혀졌지만, 작은 돈이 아니었다. 그리고 3만 원이면 일본 수장가들 중에서도 살 사람이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는 길게 생각하지 않고 간송에게 손을 내밀었다. 

“전 선생, 풍속화첩의 수장을 축하드립니다. 제가 양보하겠습니다. 하하하. 대신 앞으로 저희 상회를 자주 이용해 주셔야 합니다.”

재력과 열정이 있는 젊은 수장가를 고객으로 삼겠다는 골동품상의 계산, 이것이 야마나카가 간송에게 풍속화첩을 양보한 이유였다. 1934년 초겨울, 혜원 신윤복의 풍속화 30점이 담긴 화첩은 이렇게 하여 간송 전형필의 수장품이 되어 고향인 한국으로 돌아왔고, 광복 후 조선시대 풍속화의 백미로 인정받아 ‘혜원전신첩(蕙園傳神帖)이라는 이름으로 국보 135호로 지정되었다. 



《혜원전신첩》 중 <쌍검대무>, 간송미술관 소장. (출처-간송 전형필, 김영사)
 

돈과 노력을
아끼지 않은 간송의 열정이 아니었다면, 신윤복의 작품들은 지금쯤 진가를 인정받지 못한 채 누군지 모를 일본 수집가의 창고 안에 잠자고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랬다면 소설, 드라마, 만화 등으로 다양하게 제작되어 많은 사랑을 받은 ‘바람의 화원’과 같은 소설과 드라마도 나오기 어려웠을 것이다. 

간송미술관에 소장된 혜원의 작품은 이뿐이 아니다. 영화 ‘미인도’의 소재가 되기도 했던 혜원의 대표작 ‘미인도’ 역시 간송이 개인소장가에게서 인수하여 현재 간송미술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선조가 남긴 그림, 글씨, 책, 도자기가 조선의 자존심이라는 생각으로 미술품의 보전과 박물관 건립에 평생을 바친 간송 전형필. 그의 뜻을 이어받은 간송미술관에서는 지금도 우리 미술연구에 매진하고, 매해 5월과 10월 중에 일반을 대상으로 무료 전시회를 여는 등 한결 같이 문화지킴이의 길을 가고 있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하여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간송 전형필

이충렬

김영사 2010.05.03


이진의 기자 (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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