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홉 살 소년, 자유투 2,057개로 세상을 바꾸다
HIV와 싸우는 긍정적 전염, ‘희망의 링’


“네가 좋아하는 게 뭐니?” 한 소년과 수많은 고아들의 인생을 바꾼 최고의 질문

2004년, 미국에 사는 아홉 살 소년 오스틴은 아프리카의 에이즈 고아들의 처지를 전하는 월드비전 동영상을 보고 큰 충격을 받는다. 에이즈로 부모를 잃은 아이들을 돕기 위해 무언가 하겠다고 결심한 것이다.
하지만 고작 아홉 살의 어린아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계속하던 중 오스틴과 전화 통화를 하던 월드비전 직원이 물었다.
“오스틴, 좋아하는 게 뭐니?”
“운동을 좋아해요. 그중에서도 농구요.”
“그럼 농구로 세상을 바꿔 보는 게 어떨까?”
이 한 통의 전화가, 17개국에서 수만 명이 동참하여 십억 이상의 돈을 모금하고 잠비아에 학교와 진료소를 건립한 <희망의 링(Hoop of Hope)> 운동의 시작이었다.
 처음 시작은 아주 작았다. 오스틴은 세계 에이즈의 날인 12월 1일에 학교 체육관에서 기부 모임을 열고, 자유투 한 개를 던질 때마다 1달러씩 기부를 받기로 했다. 홈페이지를 열고 친척과 아는 사람들에게 메일로 기부를 부탁했다. 2004년 12월 1일, 오스틴은 팔에 감각이 없어질 때까지 2,057개의 자유투를 던졌고 이렇게 모은 돈으로 8명의 고아에게 후원을 했다. 

이 이야기는 지역 방송국을 통해 사람들에게 알려졌고, 다음 해 세계 에이즈의 날에는 애리조나뿐만 아니라 애틀랜타, 워싱턴, 캘리포니아 등 여섯 개 지역에서 1,000명이 넘는 아이들이 오스틴과 함께 자유투를 던졌다. 그날 하루 모금한 금액은 3만 8천달러에 달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동참하는 사람들은 점점 더 늘어났다. 70대 노인이나 자폐증에 걸린 소년, 심지어 18개월 어린아이까지 유아용 농구대로 참여했다. 기부액도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작년 한 해 동안에만 60만 달러(한화 약 75억) 이상을 모금했다. 기부금은 고아들에 대한 직접 후원을 비롯하여 고아들을 위한 학교, 지역 주민들이 바로 에이즈 진단과 처방을 받을 수 있는 진료소 건립 등에 쓰였으며, 두 번째 진료소가 2010년 안에 완공될 예정이다. 
 


아이들과 함께 있는 오스틴 구트와인(우측)


절망의 전염 HIV, 희망의 전염 "Hoop of Hope"

지구상에는 많은 전염성 질병이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끔찍한 것은 에이즈라는 데 많은 사람이 동의할 것이다. 에이즈 바이러스에 감염되면, 몸의 면역체계가 질병과 싸우는 능력을 잃기 때문에 흔하고 가벼운 질병이나 감염에도 목숨을 잃기 쉽다. 에이즈를 유발하는 인간면역결핍바이러스(HIV)는 전염성이 아주 강하며 성관계나 혈액을 통해 다른 사람에게 전염된다. 에이즈에 걸릴 임산부가 낳은 아이는 에이즈가 전염될 확률이 15~30퍼센트나 되며, 완벽한 치료약은 아직 없다.

에이즈는 당사자의 삶을 파괴할 뿐 아니라, 그 전염성 때문에 순식간에 주변까지 황폐화시킨다. 가난 때문에 진단과 예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아프리카에서는 한 사람이 에이즈에 걸리면 배우자도 바로 감염되고, 아이들은 순식간에 고아가 된다. 에이즈로 부모를 모두 잃고 고아가 되는 아이들이 너무 많은 나머지 에이즈 고아라는 신어가 사전에 등재될 정도이다. 2009년을 기준으로 전 세계에는 1,500만 명의 에이즈 고아들이 있으며, 이중 3/4에 가까운 1,200명이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 집중되어 있다. 아프리카에서는 지금도 하루에 6,000명, 14초에 한 명꼴로 고아가 늘어나고 있다. 초등학교의 평균 학생 수가 600명이라고 했을 때 매일 열 군데의 초등학교가 에이즈 고아로 가득 차는 셈이다.

모든 것을 파괴하는 에이즈의 전염성도 막강하지만, 오스틴과 <희망의 링> 이야기는 서로 돕고 나누는 행위에도 강한 전염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오스틴과 그 가족에게는 큰 돈도 스마트한 전략도 없었다. 차고에 만든 사무실과 노트북 몇 대가 전부인 평범한 가족과 아이들에 불과했다. 4분짜리 홍보 동영상을 본 아홉 살 어린이 한 명의 움직임이 세계적인 구호 단체의 설립까지 이어졌다. 세상을 바꾸려는 노력이 가진 전염성의 힘이라고밖에 말할 수 없다. 

"2007년 12월 19일 워싱턴의 한 스타벅스 드라이브인 매장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한 손님이 자기 커피 값뿐 아니라 뒤에 있는 사람의 커피 값까지 계산했어요. 크리스마스 선물로 주는 즉흥적인 행동이었지요. 뜻밖의 친절에 놀란 뒷사람은 자기 뒤에 있는 차의 커피 값을 계산했습니다. 한 사람의 즉흥적인 친절로 일어난 일이 1,112명까지 이어졌어요. 이처럼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전염성이 있는 것 같아요. 자기 커피만 받고 가버린 1,113번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할지도 모르겠지만 요점은 그게 아닙니다.

전염이란 보통 직접 혹은 간접적인 접촉을 통해 한 사람에게서 다른 사람에게 무언가가 전달되는 현상을 말합니다. 도움이 필요한 곳을 발견하고 열정을 찾아서 비전을 추구하면, 다른 사람들도 나를 따라 세상을 바꾸는 일에 동참합니다. 다시 말하지만 세상을 바꾸는 일에는 전염성이 있습니다." -<나는 희망을 던진다> 중에서, 오스틴 구트와인.

오스틴과 오스틴에게 전염된 사람들은 지금도 희망의 바이러스를 세상에 퍼뜨리고 있다. 오스틴 구트와인이 직접 쓴 <나는 희망을 던진다(Take Your Best Shot, 뜨인돌)>에 자세한 이야기가 실려 있으며, <희망의 링> 공식 사이트
http://www.hoopsofhope.org/ 에서는 항상 참여자를 모집하고 있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나는 희망을 던진다

오스틴 구트와인 | 장택수 옮김

뜨인돌 2010.05.25


이진의 기자 (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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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과의학의 아버지는 의사가 아니라 이발사" 

구태와 싸운 실천의학의 선구자, 앙브루아즈 파레 이야기
 

오늘날 의학이라고 하면 바로 서양의학을 의미할 정도로, 양의학은 현대의학에서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서양의학이 이처럼 신뢰를 얻는 것은 서양의학이 과학적이라는 인식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처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다. 중세는 물론이고 학문이 부흥을 이룬 르네상스 이후까지도 유럽의 의학은 과학과는 거리가 멀었다. 파리 대학 의학부에서는 라틴어로 쓰여진 추상적인 이론만 신주단지 모시듯 했고, 정규 의사들은 환자에게 직접 처치나 수술을 하는 것을 천하게 여겨 기피했다. 치료는 기능직인 외과의사나 이발사의 몫이었다. 따라서 정규 교육을 받은 의사들은 현장의 지식과 경험이 전무했으며, 현장에서 일하는 외과의나 이발사들도 낡고 열악한 치료법을 고수하는 이들이 많았다.
심지어 16세기에 이르러서도, 당시 최고 권위를 인정받던 의학책 <외과실제(practica in arte chirurgia)>에는 총탄의 화약에 독이 있다는 잘못된 주장이 실려 있었다. 그것도 모자라 이 책에서는 해독을 위해 끓는 기름으로 상처를 지지라고 지시했다. 종군 의사들은 아무 비판 없이 이 치료법을 답습하여 병사들의 상처에 펄펄 끓는 기름을 들이부었고, 치료받는 병사들은 끔찍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신성로마제국과 전쟁 중이던 프랑스 군의 한 진영에 부상병이 너무 많아 기름이 모자라는 일이 벌어졌다. 병영의 종군 의사는 할 수 없이 미처 치료를 못 받은 병사들에게 화농연고를 발라 주고는, 병사들이 독 때문에 죽게 될까 밤새 걱정했다. 그런데 이튿날 아침에 보니, 기름으로 지진 병사들은 열이 나고 상처가 부어 괴로워하고 있는데 연고만 발라준 병사들은 순조롭게 나아가고 있었다. 그 의사는 전부터 환자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는 끓는 기름 치료에 회의를 품고 있던 차라, 이를 그냥 지나치기 않고 같은 치료를 여러 번 시험해 보고는 기존의 치료법이 틀렸다는 결론을 내린다. 전쟁이 끝난 후, 그는 이와 같은 사실을 프랑스어 논문으로 발표해 널리 알렸다. 이 의사가 바로 오늘날 근대 외과학의 아버지로 불리는 앙브루아즈 파레(Ambroise Paré, 1510~1590)다.


45세의 앙부르아즈 파레(1561). 출처 16세기 문화혁명


최하급 의료직인에서 국왕의 수석 의사로

처음 전쟁에 종군했을 때, 파레는 의사 중에서도 가장 하급인 이발외과의사에 불과했다. 마을의 초등교육과 이발외과의사의 도제 수업을 받았을 뿐 정규 대학을 나오지도 않았고, 빈민 의료 시설에서 쌓은 경험밖에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나 그 덕택에 오히려 파레는 전통 의학의 선입견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었고, 이후 수많은 전쟁터와 의료 현장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보이며 명망을 얻고 마침내 국왕 샤를9세의 수석 외과의 자리에까지 오른다.
그는 책 속 이론보다는 현장 경험을 중시했으며, 환자의 고통을 먼저 생각하는 인도주의적 감수성의 소유자였다. 합리적이고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지녀, 정규 의사들이 들은 체도 하지 않는 민간 요법에도 귀를 기울였다. 전쟁터에서의 경험을 쓴 파레의 논문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화상 치료에 쓰는 찜질약을 가지러 약 보관소로 가자, 마침 거기 있던 나이 든 아낙네가 소금을 약간 뿌린 생양파를 썰어 상처에 갖다 대는 게 초기 처치에 좋다고 가르쳐 주었다. 가끔 실제로 경험은 했던 것이지만, 그렇게 하면 물집이 터지거나 곪는 것을 막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아낙이 말한 치료법을 기름에 화상을 입은 취사병에게 시험해 보았다. 다음 날 양파를 붙인 부위의 물집은 가라앉았지만, 그러지 않은 부위엔 큼직한 물집이 잡혀 있었다.”
또한 파레는 이렇게 새로운 치료법을 알게 되면 바로 결론을 내리지 않고 기존 치료법과 대조하여 어느 쪽이 더 효과적인지 판단하는 근대적인 대조 실험을 반복했다.
“다른 병사가 손과 얼굴에 화상을 입었을 때, 얼굴 한쪽에는 양파 조각을 붙이고 다른 한쪽에는 흔히 쓰이는 화상 연고를 발랐다. 다음 치료 때 양파 조각을 붙여 둔 부위에는 물집도 없고 피부 파괴도 나타나지 않았다. 반대편은 물집이 생겨 퉁퉁 붓고 피부도 뭉개져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나는 이 치료 방식에 믿음을 가지게 됐다.”
이처럼 합리적인 실증주의는 스콜라 철학에 경도되어 있던 당시의 의학계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1542년 페르피냥에 부임했을 때는 총알이 몸 속 어디에 박혀 있는지 몰라 치료를 받지 못하는 병사들에게 피격 당시의 자세를 취하게 함으로써 총알의 위치를 정확히 찾아내 병영에서 명성이 자자해졌고, 이후로도 수많은 전투에 종군하면서 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구해 군 상층부에서 일반 병사에 이르기까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 포위된 메츠에 잠입하기 위해 이탈리아인 대위와 둘이 적진을 가로지르는, 소설 속에서나 나올 법한 모험을 감행하고, 스페인군의 포로가 됐을 때는 적군 장교를 치료해 줘서 풀려나기도 했다. 이는 대학의 의사들은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권위주의와 싸워 근대의학을 열다

그의 의학적 성과 중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결찰법, 즉 일종의 혈관 봉합술이었다. 당시에는 사지가 절단된 환자의 지혈을 위해 절단부를 불에 달군 인두로 지지는 참혹한 처치가 행해지고 있었다. 이에 비해 파레는 1552년 처음으로 혈관을 실로 묶어 혈류를 차단하는 결찰법을 사용했다. 인두로 지지는 방식은 고통스러울 뿐 아니라 합병증의 위험이 높았던 데 비해, 결찰법은 신속하고 안전하며 환자의 고통도 적고 치유도 빨랐다.

하지만 구습과 권위의식에 젖어 있던 대학 의사들은 이 방식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격렬하게 비판하며 파레의 저서 출판까지 방해했다. 하지만 파레는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고 상대의 주장을 차근차근 반박하는 반론서를 출간하는 등 현장 경험을 바탕으로 한 자신의 지식에 강한 자신감을 보였다.

또 파레는 어렵게 얻은 지식과 기술을 독점하지 않고 널리 보급하려고 애썼다. 당시 대학 의사들은 프랑스어를 ‘속어’ 라고 폄하하며 라틴어 출판만을 고집하고 이로써 의학 지식을 독차지하려 하고 있었다. 심지어 의료 직인 신분의 외과의나 이발사들마저도 스스로 고안한 치료법이나 조제법을 비밀로 숨기곤 했다. 파레는 이런 굴절된 비밀주의에 반대하였으며, 치료법, 해부학, 외과학 등에 대해 수많은 저서를 출판하였다. 그의 저서는 누구나 읽을 수 있도록 프랑스어로 쓰여졌으며, 1575년에는 ‘앙부르아즈 파레 전집’으로 새롭게 묶이기도 했다. 이에 대해 파리대학 의학부 의사들은 물론 일부 엘리트주의에 빠진 외과의들마저 비난을 퍼부었지만, 전문적 의료 지식에 목말라 있던 사람들은 크게 호응했고 이 전집은 ‘속어 의학의 금자탑’으로 불리게 되었다.

파레는 책상물림 학문이던 의학을 환자 중심의 실천적 지식으로 전환시켰으며, 직인 기술 취급을 받던 외과학을 근대 과학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1550년 출판한 <해부실시 초록>에서 “이 책에는 나 자신의 활동으로 터득한 것, 나 스스로 해 본 것이 아니면 담지 않았다”고 언명하고 있다. 손을 더럽히며 일하는 외과 직인-최하층 이발외과의-이었던 앙브루아즈 파레는 바로 그 때문에 합리적이고 실증적인 근대 외과학의 가능성을 열었던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하여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16세기 문화혁명

야마모토 요시타카 | 남윤호 옮김

동아시아 2010.03.05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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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7km로 카레이싱에 우승한 자동차


모터스포츠는 자동차의 탄생과 동시에 생겨났다. 자동차를 만들어낸 제조자들은 마차를 대신하는 이 값비싼 발명품을 실용적인 탈것으로 인정받기 위해 경쟁자보다 뛰어난 성능을 입증해야 했고, 가장 좋은 방법은 레이스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로마 시대의 관중이 2륜 전차 경주에 열광했듯이 새로운 스포츠에 쉽게 빠져들었다.
역사상 가장 처음 열린 자동차 경주는 1894년 프랑스의 신문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이 주최한 파리-루앙 126km구간 경기였다. 당시에는 모터스포츠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가솔린차, 전기차, 증기차 등 다양한 엔진을 얹은 차들이 마구잡이로 출전했다. 

 

1899년 경의 증기자동차. (빅터 사)


에밀 르바소와 르네 파나르, 그리고 파나르-르바소의 자동차.

이 대회에서는 세계 최초로 자동차 제조 공장을 건립해 유명해진 파나르 르바소(Panhard Levassor)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파나르 르바소는 공동 설립자인 에밀 르바소 (Emile Levassor)와 르네 파나르(Rene Panhard)의 이름을 딴 메이커로 1960년대까지 활동하다 시트로엥(Citroën)에 합병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드 디옹 부통(De Dion-Bouton)의 증기 자동차가 가장 먼저 결승점에 골인했지만 트레일러를 달고 달려 대회 규칙 위반으로 탈락, 평균 시속 17km로 달린 파나르 르바소가 우승했다.


<이 기사는 다우출판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

카레이싱 이야기

김재호

기쁜하늘 2005.10.22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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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에 우승한 챔피언
F1 그랑프리의 기구한 죽음들

짜릿하고 아찔한 자동차 경주.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경기가 포뮬러 원 그랑프리(F1)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 땅 위에서 가장 빠른 사람을 가리는 이 경기에는 연간 2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린다.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F1 경주의 짜릿함 이면에는 가슴아픈 역사가 있다. 수많은 사망 사고들이 그것이다. 그중에는 사실로 믿기 힘들 정도로 기구한 사고도 여럿 있다.

목이 잘린 참사

오스트리아 드라이버 헬무스 쾨닉(Helmuth Koinigg)은 1974년 미국 그랑프리에서 서티스(Surtees)팀 경주차를 몰다가 브레이크 파손으로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이 가드레일이 찢어지며 흉기로 돌변해 그의 목을 잘랐다.

죽은 뒤 챔피언 결정
1970년 로터스(Lotus)팀의 간판 주자 요헨 린트(Jochen Rindt,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출전하면서 부인에게 챔피언이 되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예선전에서 서스펜션이 부러지면서 경주차가 구조물을 들이받는 사고가 났고, 린트는 안전벨트가 몸을 압박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비록 죽긴 했어도 린트는 앞선 9차례의 경기에서 5승을 거두며 높은 득점을 쌓아 그 해의 챔피언이 되었다. 린트의 사망 이전 점수를 뛰어넘는 드라이버가 없어 모터스포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부인과의 은퇴 약속은 기구하게도 ‘죽음’으로 지켜졌다.

나는 새와 부딪혀 사망
1960년 벨기에 그랑프리에 참가한 알렌 스테이시(Alen Stacey, 영국)는 날아오는 새와 부딪쳐 사망했다. 헬멧 제조 기술이 현재처럼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빠른 속도로 달리는 드라이버의 안면으로 뛰어든 새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달리다
소화기에 머리 맞아 사망
영국 드라이버 톰 프라이스(Tom Pryce)는 1977년 카얄라미(Kyalami)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에서 반대편에 있던 경주차를 구조하기 위해 트랙을 가로질러 가던 오피셜 요원을 들이받아 사망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따라서 세상을 떴다. 오피셜이 들고 있던 소화기에 머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사고 뒤 후송되어 의료 사고로 사망
스웨덴 레이서 로니 피터슨(Ronnie Peterson)은 1978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로터스 경주차를 몰다가 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졌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현재 F1그랑프리가 열리는 경기장에는 반드시 메디컬 센터가 갖춰져 있다. 행사 당일에는 2대 이상의 구급차는 물론 소방차, 구조 헬리콥터 등이 배치되고 일반외과의, 정형외과의, 마취의, 화상전문의는 물론 뇌신경전문의까지 대기하여 ‘움직이는 응급실’을 차린다. 많은 비극적인 사고를 교훈삼아, 국제자동차연맹과 각 개발사에서는 경주의 안전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F1의 안전 규정과 개발 제한은 끊임없이 강화되고 있으며, 방호벽과 차체의 충격 흡수 능력, 레이서의 방염복 제조 기술 등 모든 부문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4년 레이싱 스타 아일톤 세나(Ayrton senna)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F1에서는 사망 사고가 나지 않고 있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하여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카레이싱 이야기

강재형|김재호

기쁜하늘 2005.10.22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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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도 작심삼일? 명품계획이 실천을 만든다
작심3일 대신 ‘작심후3일’!  
 

작심삼일이란 말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살면서 수많은 결심을 하지만, 그 결심은 대개 오래 가지 못한다. 스스로를 을러대도 보고 달래도 보지만 소용이 없다. 멀쩡했던 애초의 결심은 3일을 채우지 못한다. 이런 일이 반복되면, 어느새 결심이 무너지는 데 익숙해져서 더는 실패에 충격조차 받지 않는다. 왜 매번 이런 일이 일어날까? 어째서 한번 먹은 마음이 오래 가질 못할까?
 

작심삼일의 정체는 ‘무계획’

전략기획자 김일희 씨에 따르면 답은 놀랍게 간단하다. 마음 먹은 것이 오래 가지 못하는 것은, 마음 먹는 것 밖에 하지 않기 때문이다. 무계획 상태로 그저 ‘잘 해보자’는 생각만 하기 때문에, 먹은 마음이 실행력으로 이어지지 않는 것이다. 흔히 실패는 의지 부족, 실행력 부족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실행력이 아니라 계획력이 없었던 탓이다.
 

작심하고 3일이 아니라 ‘작심후3일’이 중요하다.

허술한 작심에서 비롯된 작심삼일을 끝내는 묘약이 있다. 바로 ‘작심후3일’전략이다. 정확히 말해, ‘작심 후 3일 동안 계획하기’다. 우리에겐 ‘작심’이 아니라 ‘작심 이후’가 필요하다. 작심을 구체화하는 과정(3일이면 충분하다)을 가져야 한다는 이야기다. 성공과 실패는 작심후3일 동안 당신이 얼마나 충실한 계획을 짜는지에 달렸다.
 

자신을 관찰하라

중요한 것은 3일 동안 자신을 면밀히 관찰해보고, 그 결과를 자세히 기록해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야 계획의 내용이 충실해진다. 자신에 대한 기본 데이터가 있어야 현실적인 계획을 짤 수 있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회사원에게 주 5회 영어 학원 다니기는 비현실적인 계획이다. 하지만 전철 출퇴근 시간이 왕복 2시간이라면, 매일 전철에서 영어 소설 읽기라는 계획을 세울 수 있다.
 

목표다운 목표를 세워라

단순히 열심히 하자는 것은 목표가 아니다. 얼마나 해야 열심히 한 것인지 알 수 없으니 이런 목표는 지킬 수도 없다. 김일희 씨가 이야기하는 목표다운 목표의 조건은 다음과 같다.
1. 구체적일 것.
2. 측정 가능할 것.
3. 행동 지향적일 것.
4. 시간 개념을 둘 것.
5. 현실적일 것.
예를 들어 막연히 ‘다이어트를 한다’ 가 아니라, 측정 가능한 숫자로 몇 kg를 감량할 것인지,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식단, 운동 방법과 횟수)으로 감량할 것인지, 이 목표를 몇 개월 동안 실행할 것인지를 다 포함하여 목표를 세워야 한다. 덧붙여 이 계획이 현실적이어야 비로소 실천이 가능해진다. 

계획에도 품질이 있다.

어떤 목표에든 장애물이 있다. 이 장애물을 뛰어넘을 방법을 미리 준비하는 것이 바로 계획의 힘이다. 실패한 목표가 있다면, 자신의 계획이 어땠는지부터 돌아볼 일이다.

작심삼일은 의지력 부족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단지 무계획을 가리키는 말일 뿐이다. 작심삼일을 벗어날 수 없는 숙명처럼 여기고 있다면, 작심후3일 동안 한번 철저하게 계획 인간이 되어보는 것이 어떨까.
 

계획을 수립하는 것은 성공과 실패의 분기점이다. 왜냐하면 계획을 할 때 생각을 확실하게 하게 되고 확실한 생각은 행동에 채찍질을 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부호 폴 마이어는 이런 말을 했다. "명확한 계획은 명확한 결과를 낳는다. 그러나 불명확한 계획이 불명확한 결과를 낳는 것은 아니다. 불명확한 계획은 아무런 결과도 낳지 못한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하여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작심후 3일

김일희

다우 2007.12.15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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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기는 필연, 그러나 방법은 있다
미국의 포춘지는 매해 세계 500대 기업을 선정하여 발표하지만, 채 5년도 지나지 않아 이중 3분의 1이 리스트에서 빠져나간다고 한다.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100대 기업에 올랐던 회사들의 평균 수명은 30년 정도에 불과하다. 시장에 영원한 승자는 없고, 경제 상황은 항상 급변한다. 만년 일등기업, 위기 없는 기업은 있을 수 없다. 위기에서 무너지는 기업과 위기를 겪고도 살아남는 기업이 있을 뿐이다. 

위기의 삼성토탈을 구한 TPM의 힘
삼성토탈은 현재 세계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우량 기업이지만, IMF 당시만 해도 빅딜 대상 1순위 어려운 처지였다. 회사 전체가 경영혁신에 나섰지만 막막한 상황이었다. 이 때 구체적 실천수단으로 역할한 것이 TPM이었다.

TPM은 Total Productive maintenance, 전사(全社)적 생산보전을 뜻한다. 사원 전원이 주도적으로 현장에서의 설비고장, 재해, 제품불량과 같은 생산성 저해 요인을 제거하고 구성원과 설비의 체질을 혁신하기 위한 조직활동이다. 1920년대 미국에서 처음 시작됐을 때만 해도, TPM은 전문 유지관리요원들에 의한 설비보전 활동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일본으로 건너가면서 현장에서 근무하는 모든 직원들이 참여하는 종합적인 설비 관리 운동으로 확대된 것이다. 
 

TPM, 현장 직원이 스스로 모색하는 생산성제고
처음 삼성토탈에서 TPM을 도입했을 때는 현장 직원들의 반발이 컸다.
“멀쩡한 볼트, 너트를 모두 풀어내 녹을 닦으라고 하는데 이것이 과연 안정운전에 도움이 되겠나 싶은 생각이 들기도 했죠.”
처음 TPM에 참여했던 직원들 대부분의 생각이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업무만 가중시킨다고 기름으로 찌든 콘크리트 바닥을 닦으면서 짜증을 내는 직원도 많았다. 간부들이 솔선수범해 보고, 해외 벤치마킹을 위해 수 백의 직원을 연수 보냈지만 상황은 지지부진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자 점차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TPM을 시도하기 전, 공장의 폐수처리장은 엄청난 소음과 냄새를 발생시키는 최악의 환경이었다. 결국 직원 한 명이 난청 판정을 받기에 이르렀다. 문제가 제기되었지만, 직원들 중에 폐수처리에 대한 전문지식을 가진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어디 물어 볼 곳도 없었다. 방법은 스스로 공부해서 알아내는 것뿐이었다.
직원들은 TPM의 기본 철학에 따라 스스로 해결책 모색에 나섰다. 필요한 책을 뒤지고 외부 폐수처리장을 직접 쫓아다니며 지식을 습득하고 개선 방안을 강구했다. 이 같은 직원들 스스로의 노력으로 결국 폐수처리장의 소음과 냄새가 사라지게 되었다. 이 결과에 가장 기뻐하고 감탄한 것은 그 작업에 참여한 직원들 스스로였다. 

그 이후로 직원들의 TPM에 대한 시각은 크게 달라졌다. 각자의 노력을 통해 설비들이 새로워지고 고질적인 문제점이 해결되어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직원들의 보람과 만족감이 커지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 적당히 근무하고 월급만 받으면 다라고 생각했던 직원들의 생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TPM이 결국 회사와 나를 함께 위하는 것이라는 중요한 원칙도 깨달았다.
TPM의 효과는 기대 이상이었다. 단순 운전만 담당하던 직원들이 점검과 정비 능력까지 갖추게 되면서 설비에 대한 이해가 깊어져 작업의 능률도 함께 올라갔다. 개개인의 능력이 향상되었을 뿐 아니라,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하는 과정에서 직원들 사이의 단합도 강해졌다. 맡은 작업뿐 아니라 공정 전체, 나아가 회사 운영에 대해서까지 참여의식과 책임감이 늘어나, 식사비 절감을 위해 잔반 남기지 않기 운동까지 전개될 정도였다. 

위기 상황이라서 비로소 가능했던 혁신의 역설
현재 삼성토탈의 공장 운전능력은 세계 최고 수준이다. 자금난에 허덕이던 삼성종합화학에게 세계적 화학기업인 토탈이 합작 사업을 제의해온 것도 삼성이 보유한 뛰어난 공장뿐만 아니라 그 공장을 운영하는 세계 최고 수준의 직원들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 직원들은 특별하게 선발한 사람들이 아니다. IMF 당시 부실기업 소리를 듣던 삼성종합화학의 직원들이 혁신하고 변화하여 능력을 이끌어낸 것이다.
이런 놀라운 변화가 가능했던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빅딜 대상으로 거론될 만큼 악화되었던 회사 상황 덕택이었다. 당장이라도 직장이 없어질지 모른다는 위기감이 경영진과 직원들에게 TPM이라는 커다란 변화와 새로운 책임을 받아들이게 한 것이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한 자다.” 라는 말이 있다. 위기는 누구에게나 찾아온다. 하지만 존망의 위기에서 살아남은 기업에는 그만큼 강하고 성공적인 기업문화가 배양된다. 부실기업 1순위에서 세계적 화학기업으로 뛰어오른 삼성토탈의 발자취에서 그 견본을 찾아보는 것도 흥미로운 일이 될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살아남는 자가 강하다

삼정KPMG|정택진|송병무|윤권현

글로연 2010.05.06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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