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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0.07.08 [지식|역사] 200년 전 조선의 건달, 무뢰배의 진화사


200년 전 조선의 건달, 무뢰배의 진화사

도둑떼에서 친일파 앞잡이까지… 전횡∙방탕으로 천민자본주의의 그늘 드리워

밤은 두려움의 공간이다. 사람은 원래 어두운 곳을 무서워하지만, 도시의 밤거리에서 느끼는 두려움은 이와는 또 다르다. 밤의 골목길을 걷는 사람들은 어둠 그 자체나 귀신 같은 것이 아니라 사람을 두려워한다. 퍽치기 강도, 깡패, 양아치, 건달, 불량배, 치한과 같은 이들,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정체불명의 사람들을 조선 시대에는 ‘무뢰배’라고 불렀다.

무뢰배(無賴輩)를 글자 뜻 그대로 풀면 기댈 곳, 또는 의지할 사람이 없는 무리가 된다. 의지할 데 없는 사람들이라고 하면 오히려 불쌍히 여기고 돌보아주어야 하는 존재처럼 느껴지는데, 어째서 불량배나 우범자들을 이렇게 불렀을까? 이것은 일과 근면을 중요시했던 유교 문화에서 비롯되었다. 맹자는 항산(恒産), 즉 일정한 생업이 없는 사람에게는 항심(恒心), 한결같고 성실한 마음도 있을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농사지을 땅이나 일정한 직업과 같이 기대어 생활할 근거가 없는 사람들을 신뢰할 수 없는 존재로 여긴 것이다.

조선 초기에 무뢰배로 지칭된 자들은 주로 중이나 백정, 도망노비, 산간이나 절간에 숨어든 도둑떼 등이었다. 호패제가 시행된 뒤에는 여기에 ‘호적에서 누락된 자’가 추가되었다. 생계를 지탱할 직업이 없고, 신분증명도 없으니 이들이야말로 명실상부한 무뢰배였다.

그러나 조선시대 전체에 걸쳐, 무뢰배로 지칭되는 사람들의 범위는 시간이 흐를수록 넓어진다. 조선 중엽 계급의 벽이 두터워지면서부터는 사대부의 세계 밖으로 밀려난 서자, 기술직 관리, 양반은 양반이되 글을 익히지 않은 무인 계층인 무반(武班)이 차례로 무뢰배 취급을 받게 되었다.

연산군과 그를 추종하는 무리들도 후대 식자들에 의해 무뢰배의 전형으로 지목되었다. 연산군은 미모의 젊은 여성들에게 흥청(興淸)이라는 벼슬을 주고 궁으로 불러들여 방탕한 유흥을 즐겼다. 흥청망청이라는 말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이렇게 자신의 누이나 딸을 흥청으로 바치고 별감 자리를 얻은 자들이 꽤 있었다. 이렇다 할 자격이 있어 별감이 된 것도 아니고, 하는 일이라고는 흥청이 된 누이나 딸을 배경 삼아 뇌물을 챙기거나 공갈협박으로 남의 재산을 갈취하는 짓뿐이었으니, 무뢰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재미있는 것은 이 연산군을 몰아내고 중종을 옹립한 무인 무리들도 후일 조광조에 의해서 가차없이 무뢰배 딱지가 붙었다는 것이지만.

이런 과정을 거쳐, 이제 무뢰배라는 말은 특정한 신분적∙사회적 위치에 있는 자를 지칭하는 말보다는 점차 성격이나 심성, 지식에 하자가 있는 자를 지칭하는 말로 더 자주 쓰이기 시작했다. 이미 무뢰배라는 이름의 고유한 의미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았다.


요행을 바라고 세력 있는 사람에게 빌붙는 자들, 그래서 충심보다 사심을 앞세우는 자들은 모두 무뢰배였다. 몰래 담벼락에 익명으로 벽서를 써 붙이는 자는 물론, 권세 있는 자를 대신하여 상소질하는 성균관 유생이나 시골 선비들도 무뢰배였고, 변변한 학식도 없이 과거 시험장에 몰려와 난장판을 만드는 응시자들도 무뢰배였다. 조선 후기 당파 간 다툼이 심해지면서는 반대당파에 속한 자는 모두 무뢰배 또는 무뢰배와 어울리는 자로 지목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래도 세상이 다 아는 대관이나 종친을 자기 당파가 아니라고 해서 바로 무뢰배라 부르기는 어려웠기 때문에, 대신 욕을 먹은 것이 그 대가집의 하인이나 가신 노릇을 하는 겸인(傔人)들이었다. 

겸인이란 방문객 응대, 문서 수발, 행차 호종, 재산 관리 등의 일을 하면서 대가집에 머무는 사용인들을 말한다. 그중에는 노비도 있었지만 문서나 계산에 관련된 일을 하는 평민이나 선비 출신 겸인도 적지 않았다. 이들은 나라가 아닌 일개 사인(사인)에 의탁하는 만큼 무뢰배라는 말이 딱 어울리는 이들이었다. 이들은 상전의 행차를 호위하면서 위세를 돋우었고, 상전에게 갖가지 오락거리를 제공하면서 비위를 맞추어 심복이 되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라면 납치, 강간과 같은 일도 서슴지 않을 정도였다. 이런 식으로 충성심을 인정받으면 별감이나 찰방 같은 벼슬자리를 얻을 수도 있었으며, 거기까지는 못 되더라도 주인이 지방에 내려가면 그 수행 역할인 비장이 되어 나름대로 거드름을 피울 수도 있었다.


조선 말의 별감. 조선에는 종친이나 대관에게 아부하는 겸인들이 별감직을 얻는 경우가 많았다.
시정의 왈짜, 무뢰배의 두령급은 거의가 이자들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땅 외에도 상업에서 얻는 이익이 늘어나면서, 겸인 무리들이 활개칠 곳이 더 늘어났다. 궁방이나 세도가에서는 염전∙어장∙유통권 등을 봉록으로 받거나 사들여서 부를 축적하는 데 몰두했고, 이런 일에는 세상 물정에 밝고 장부를 능숙하게 쓸 줄 아는 겸인들이 적격이었다. 연줄을 얻으려는 사람들과 능력 있는 수하를 두려는 세가∙궁방의 이해가 맞아떨어지면서 영조 연간에는 시전 상인들을 겸인으로 삼는 것이 관례가 되었으며, 이 관례는 조선왕조, 대한제국이 망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한말 친일파 송병준의 겸인 노릇을 한 예종석의 회고에 따르면, 육의전 한 집마다 상인이 2~3인 있었는데 이 중 한둘은 고관 집에서 겸인으로 일했다고 회고했다. 고관들은 시전 상인의 상업적 지식을 활용하여 재산을 늘릴 수 있어 좋았고, 상인들은 든든한 배후를 두게 되어 좋았으니 이런 일이 관행화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오늘날의 조직폭력배들이 형님, 아우라는 호칭을 버리고 새로 사장이니 상무니 하는 호칭을 얻게 된 것처럼 조선 후기의 무뢰배들도 치부책에 정력을 쏟게 된 것이다.

그런데 겸인이 상인이 되었다고 해서 무뢰배 기질이 사라지지는 않았다. 본래부터 국법을 우습게 알고 사적 권력을 배경으로 못된 짓을 하던 자들이었으니, 그들의 상업 활동이란 것도 대체로 무뢰배의 행태를 답습하는 것이었다. 남의 영업권을 빼앗거나 힘없는 상인들로부터 돈을 뜯어내기 다반사였으며, 이렇게 뜯어낸 돈으로 저자에서 왈짜짓을 하며 방탕하게 놀아댔다. 

이렇게 조선 후기 도시 상업 발전 과정에서 형성된 자본에는 무뢰배 자본의 성격이 짙게 배어 있었다. 무뢰배 자본가들은 국가에 대한 도리와 책임은 면피하고 상전의 잇속만 챙기는 자들이었다. 그리고 상전이 몰락하면 재빨리 다른 주인을 찾아 나섰다. 이들은 이른바 한국적 천민자본주의의 원조였다. 본래 대가집 하인에 가까운 존재들이었으니 무슨 노블레스 오블리주 같은 것도 있을 턱이 없었다.

개항 후에도 서울 상인들의 무뢰배 성격은 지속되었다. 한말 서울의 거상으로 지목되던 사람들 상당수가 종친이나 대관 집의 겸인 출신이었다. 친일파 매국노 송병준 역시 겸인 출신이었다. 충성을 바쳐야 할 공적 의무의 대상인 국가가 사라진 일제 강점기에 자본의 무뢰배적 성격, 천민성은 한층 더 증폭되었고, 지금까지도 서울 문화의 한 귀퉁이를 점거하고 있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서울은 깊다

전우용

돌베개 2008.05.06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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