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에 없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은 매 초 딜레마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옳고 그름마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닥쳐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유네스코의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줄곧 ‘21세기의 대화’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토론에는 전 세계의 과학자, 지성인, 작가, 정책결정권자들이 참여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논점을 제시한다. 

아달베르토 바레토는 빈민가의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위해 오랫동안 일해 온 브라질의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가난과 소외과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황폐화하는지 꿰뚫어본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마치 유령처럼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아달베르토 바레토는 공동체 치료를 통해 자존감과 희망을 되찾는 길을 제시한다.



소외와 마음의 병
아달베르토 바레토

나는 12년 이상을 브라질 포르탈레자(Fortaleza) 근방에 위치한 거주자 28만 1,000명의 한 파벨라(파벨라favela. 브라질의 슬럼가, 빈민가, 뒤이어 나오는 파벨라두는 파벨라의 주민을 말한다.)에서 일해왔다. 포르탈레자는 인구 200만 명의 대도시이다. 여러 파벨라의 주민들이 가뭄 때문에 농촌에서 빠져나와 도시로 이주했고, 소외를 야기하는 불공정한 경제정책이 빚어낸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전쟁의 가담자들이 되었다. 외관상 무기가 없는 이 전투는 개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 이 이주의 움직임이 그 개인들을 어떤 상실의 과정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이 과정은 경제적 빈곤화로 시작하여 문화, 전문 지식, 사회적 관계와 자긍심의 빈곤화로 이어진다.

대도시로의 도착 자체가 가장 뿌리 깊은 쓸쓸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시는 그들을 환영하지 않으며,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주자들은 도시 주변의 외곽, 빈민 지대에 머무른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단지 악몽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이 깨닫는 데에는 아주 짧은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일련의 또 다른 문제들이 시작된다. 어디에 살아야 하나? 수단도 없이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부양할까? 직업 훈련도 받지 않고 어떻게 일자리를 구할 것인가? 파벨라두(favelado)가 된다는 것은 지옥의 고통을 겪는 유령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안하고 절망스러운 일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추구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는 결코 그를 보거나 듣지 못한다. 추방당한 이들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 친숙한 주제들은 아마도 인정받지 못한 삶, 살아갈 공간을 가질 권리가 없는 삶의 실질적인 감정을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지옥의 고통에 빠진 유령은 21세기 브라질에 나타난 마음의 질병들의 원형일까?


공동체 치료의 고안

이러한 맥락에서, 맨 처음 우리는 파벨라 인권 센터의 중개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정신의학적인 상담을 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단지 일회적이었던 이 개입들을 통해, 우리는 예를 들면 실직당한 남편을 두고 집도 먹을거리도 없는 여성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한 개인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늘 자문하곤 했다. 대학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또한 개인적이고 생의학적인 틀을 넘어서, 가족과 공동체의 수준으로 배려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대학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양성하는 것은 그 사람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배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수많은 사람이 즉각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는 파벨라의 상황에서는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우리의 작업 방식을 바꿔야 했다. 또한 우리는 구원자의 모델, 해결책을 실어 나르는 전문가의 모델과 단절하고, 빈곤함을 넘어 인간적 그리고 문화적인 잠재력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 빈곤함에 너무도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강연을 열고 싶어 하고 약품들을 주거나 조언을 주고 싶어 하지만, 그런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이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과 1주일에 한 번씩 만남을 가졌고, 우리가 '공동체 치료'라고 불렀던 것을 발전시켰다. 관건은 자각과 집단적인 반성의 공간, 모든 사람이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을 표현하도록 시도해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함 소리가 난무하고 폭력이 곧 행동으로 옮겨지고 가장 강한 자가 이기는 공간이 이 파벨라에서, 우리는 대담하게도 '이 고통을 말'로 옮길 수 있도록 대화와 표현의 공간을 창조하고자 했었다. 이 계획은 야심찬 것이었지만 결실을 가져왔다.

이러한 만남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집단이 치료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집단 속에서 사회조직이 공고해지고, 사회적 소속감이 일깨워지는 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상호적인 표현과 개인적인 경험들의 교환, 타인에 대한 지지와 애정 어린 관계, 문화적 가치의 강화를 통해서이다. 개인들은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성공적으로 더 나은 사회 통합에 이른다.

우리는 여기에 여러 해 전부터 우리가 채택해오던 R.A.P, 즉 '적극적 참여 행위 연구(Recherche Action Participative)'의 방식을 접목했다. 이 방식은 대학이 지식 생산을 독점하는 것에 대한 거부로 정의되며, 일반인을 향한, 일반인의, 일반인을 위한 지식에 호소한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질병들이 집단 자체에 의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 안에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울 필요는 있다.

이 모델은 우리가 이미 브라질의 가난한 13만 개의 공동체와 함께 작업하는 브라질 가톨릭교회의 기관인 아이들의 목자(Pastorale del'Enfance)와 협력하여, 2,600명의 정신 보건 요원-우리는 이들을 공동체 정신 치료 전문의로 부른다-을 양성한 이래, 오늘날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이 정신 치료사들은 정신의학적인 어떤 해석이나 성찰을 행하는 대신,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도록 집단을 동원한다. 가령 집단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불면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면, 정신 치료사들은 다른 구성원들이 과거에 유사한 상황을 경험한 바가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다른 구성원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병의 원인이 되는 세 가지 근본 축

: 버림받음
여러 파벨라 지역의 주민들은 사회로부터 거절당해 버림받았다는 감정과 애도의 감정에 빠져 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부축해주지 않는다. 이런 버림받음의 영향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 나타나고, 신체적 외관에서도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때 이른 주름들, 갈라진 치아를 가진 턱, 덥수룩한 머리. 그 영향들은 여러 명이 되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가족들은 거리에서 살아간다. 버림받음의 영향들은 또한 사회적인 수준에서도 표면화된다. 허술한 건축, 마분지와 목재 조각들로 이루어진 동네 모습은 이러한 삶의 이야기들, 가족의 조각난 실존, 개인적 실존이 지닌 내면의 상처를 반영하고 있다.

이 버림받은 상황을 극복하는 데에는, 매우 다양한 제각각의 방법이 존재한다. 지역 단체들과 조합들은 생필품과 음식물을 한데 모아, 연결망을 구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젊은 사람들은 모여서 종종 범죄에 빠지고, 그들 중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은(우울증, 알코올중독, 약물 중독과 같은) 정신병적 대응물에 빠져들기도 한다.

종교적인 의식에 호소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예식들은 점점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장소가 되고 있다. 신체가 느끼는 고통의 감정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움직인다. 가톨릭적인 것이든, 아프리카계 브라질의 토속 종교적인 것이든, 개신교적인 것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적 의식은 실존에 중점을 둔 진정한 배려가 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삶의 가혹함 때문에 생기를 잃은 영혼을 사랑하게 된다. 일부 종교들은 위협적이기도 하다. 특히 펜티코트스파(펜티코티즘(Pentecôtisme). 성령의 작용을 강조하고 생활의 성성(聖性)을 역설하는 미국에서 발생한 종교운동)의 새로운 교회들과 하나님 왕국의 범세계적인 교회(최근 들어 파리에 등장한)는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문화적인 믿음을 거부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여러 세대를 거쳐 내면화된 준거 모델들과 단절하기를 권하고 있다. 이들이 야기하는 것은 사실상의 정체성 상실이며, 모두가 전적으로 따라야 하고, 다른 종교를 부정함으로써 긍정되는 종교적 가치에 맞추어진 거짓된 자아의 탄생이다. 악을 몰아낸다는 구실로 인간에게서 그 자신, 그의 믿음들, 그의 비판적인 생각, 그가 가진 가치들, 그리고 그의 영혼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프리카계 브라질 종교인 움반다(Umbanda)와 같은 다른 종교들은 정체성 형성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동거하는 새로운 가족 형태 안에서 환대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정체성 형성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민초들의 문화를 존중함으로써 좀 더 관용적인 형태의 공동체에 어울리는 것이 될 수 있다. 


: 치안 불안
치안 불안의 분위기는 사회 내부를 폭력과 분열로 들끓게 만드는데, 이는 그 분위기가 양산하는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주는 공포로 인해 자극받고 지속된다. 파벨라에서 비행과 범죄, 공격 본능과 같은 폭력은 실업과 맞물려 더 심해진다. 부자가 자신의 키보드를 통해 가상세계의 웹에 들어간다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반사회적인 인터넷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다른 사회단체들에까지 뻗어나간다. 나는 폭력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이 폭력 문화는 모든 선진국의 패러다임이고,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첨단 기술적 대항-문화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TV가 폭력, 특히 모든 파벨라 지역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까지 내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적 요소로서 치안이 상호 간의 신뢰를 만들어가는 데 필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치안이 보장된 삶은 또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본능을 지배하여 그것을 삶을 지탱할 힘으로 변형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 자존감의 상실
가장 비극적인 비참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파벨라두의 내면화된 비참함, 말하자면 무능력이라는 깊이 박힌 감정이다. 그들은 더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며, 소외되었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 이 자존감의 상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가령 침묵 같은 것을 통해 드러난다. 브라질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입술이 침묵할 때에는, 장기들(organes)이 말을 한다고들 이야기한다. 이 사람들이 집단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들이 타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에게서 박탈하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가족 내에서도 아이들을 깔보는 억압적인 교육은 아이들의 자존감의 상실은 직업상의 실패를 초래한다. 일자리는 구했지만 한 달 이상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불안감이 하도 커서 결국 그만두고 마는 것이다.

공동체 치료 기간과 병행하여, 우리는 자존감을 일깨우는 집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잠재력과 자신의 문화가 가진 잠재력을 재발견하도록 하고, 또 이 잠재력을 한데 모아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인 동력을 만들어내도록 할 목적에서 말이다. 이 동력은 그들 각자가 자기 역사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존재를 책임질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예방 정치를 위하여

버림받음과 치안 불안, 자존감의 상실과 관련된 문제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염려해야 하는 사태이다. 이 문제들로 인해 사회 내부가 폭력과 분열로 들끓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이 야기하는 공포와 비이성적인 행동들은 긴장과 절망, 불안의 분위기를 가중시키는데, 이것은 오직 집단적으로 활동하는 참여제도가 있을 때에만 해소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들이 없거나 효력이 없을 때, 개인들은 자신의 규칙과 제도를 창조한다. 이 '자신의 일에만 충실한 각자'는 동족상잔의 폭력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고통을 받는 개인들이 창조적 활동을 하도록 복돋워주는 적합한 수단을 고안하는 것은 반드시 고유한 개인적 가치들과 이전에 실추된 문화적 가치들에 근거해야 한다. 이 새로운 수단은 참여적이고 공동체적인 맥락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선험적인 가치 체계를 자신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각자가 지닌 경험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낳는 것은 바로 집단이다. 이러한 접근은 고통을 설명하는 모델과 이 모델이 함축하는 개입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치료 전문가들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모델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선형적이고 환원적이다. 예를 들면 화학요법을 권장하는 생의학 모델이나, 때로는 교육적이지만 때로는 억압적인 행위들을 외부로부터 강요하는 사회적 모델이 그러하다.

개인의 자기 계발은 사회집단을 변화시키는 요인으로서, 절대 권력을 지닌 근대의 복지 국가 모델과 같은 간섭주의적 모델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 모델은 종속을 강화하고 창조성을 질식시킨다. 예산 투자를 기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소외된 개인의 사회문화적 자본을 실제로 활용하여,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수동적인 희생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하여 그 개인이 사회 재건의 책임을 함께 떠맡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서 비판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정겨운 사회적 유대를 촉진시킬 만한 장소, 그래서 생활공동체에 새겨진 문화적인 소속감을 솟아나게 하는 장소를 만드는 것은 주체에게 필수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장소에서 유대로 이동하는 일이며, 단 한 사람이나 정책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개인적인 모델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해답이 공동체적인 것에 있다고 확신한다. 참여 운동을 시작해야 하며, 이 운동을 통해 각자는 집단이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하게 발전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집단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자존감의 상실은 자기에 대한 앎과 관련하여 무지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정체성 회복의 장소들을 마련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학문적인 지식은 결국 소위 대중적 지식을 인정하고 한데 아울러야 한다. 소외당한 자들의 자존감 회복은 21세기가 지닌 마음의 질병들에 맞선 투쟁의 초석이 될 것이다.

치료 요법을 실시하는 동안 내가 들은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끝마치고 싶다. 세상의 혼란과 무질서에 반항하는 자신의 아들을 진정 시키기를 바랐던 한 아버지가 세계 지도를 작은 조각들로 찢어버리고는, 세상을 바꾸기를 원했던 아들에게 그 지도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맞추라고 요구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그 지도를 다시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분이 흐른 후 아들은 그 지도를 다시 복원했다. 매우 놀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그 지도를 찢기 전에 그 지도의 뒷면에 한 사람의 초상화가 그러져 있던 것을 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의 유일한 관심은 그 사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을 되찾으면서, 세상을 되찾았던 것이다.


<아달베르토 바레토 Adalberto Barreto>
정신과 의사이자 민족학자. 세아라 연방 대학 의과 대학 교수, 통합된 지역 사회 정신 보건 운동의 브라질 총괄 책임자이다. 그는 노르데스테의 빈민가 지역들, 특히 포르탈레자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여러 저작을 출간했으며, 그 중에는 L'Indien qui esten moi(1996)가 있다. 엘리안 콘티니Éliane Contini의 저서 Un Psychiatre dans la favela(1995)는 그의 경험을 기술하는 데 바쳐진 것이다.


<이 기사는 (주)문학과지성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06.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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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에 없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은 매 초 딜레마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옳고 그름마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닥쳐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유네스코의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줄곧 ‘21세기의 대화’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토론에는 전 세계의 과학자, 지성인, 작가, 정책결정권자들이 참여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논점을 제시한다. 

사회학자, 소설가, 수필가, 기자, 방송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프랑스의 여류 저술가 드니즈 봉바르디에가, 우리 삶을 조각조각 해체하고 속박하는 현대의 시간 활용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의 속박과 영혼의 질병
드니즈 봉바르디에

오늘날, 누가 아직도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을까? 글쓴이 나 자신은 현대적 시간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텔레비전 기자인 관계로, 나는 시간을 조각조각 나누고, 시간을 조롱하고, 끊임없이 시간에 맞서 싸워야 하는 직종에 종사한다. 다른 한편, 작가로서 나는 시간에, 이 거의 우회해갈 수 없는 글쓰기의 시간에 복종해야만 한다. 고백컨대 시간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사로잡는다. 이러한 시간에 관한 불경이 영혼에 야기하는 질병을 분석하는 임무는 정신과 의사와 정신분석가에게 맡기겠다. 나는 단지 이와 같은 시간과의 끊임없는 경주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몇 가지 생각을 따라갈 것이다.



드니즈 봉바르디에. 저술가.


오늘날의 사회와 시간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 이상의 시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시계들 중의 일부는 땅 위에서뿐만 아니라 물속에서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방수 처리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사실 물에서는 시간이 멈춘다. 이제 집 안의 모든 방 안에서, 모든 공공장소에서 시계를 발견할 수 있다. 단 카지노는 예외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도박꾼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생 전체를 따기 위해(또는 잃기 위해) 건다!

우리는 또한 휴대전화 중독과 같은 새로운 정신적 질병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기다린다는 관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사생활이라는 관념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모두가 "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처럼 사회가 모든 인간의 활동을 단축시키도록 강요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의학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기관들을 좀 더 내구력 있는 인공적인 기관들로 대체하려고 들 뿐만 아니라(이에 대해 우리 모두 매우 만족스러워한다). 어떻게 하면 외상의 치유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우리의 보건 체계에서, 시간은 바로 돈이다! 요즘의 그 대단하다는 외과 수술들을 받으면, 여러분은 아침에 악성종양을 제거하고 나서 정오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환자가 병원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체계적인 방식으로 줄어든다.

이와 비슷하게 퀘벡에서는 빈소에서 망자들을 공개하는 기간이 전통적으로 3일이었으나 하루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이 곧바로 매장하거나 화장해달라고 유언으로 요구하는 일도 있다. 고인과 가까웠던 이와 같은 통과의례는 더 이상 존중되지 않는다.

시계의 관습적인 시간은 그것이 풍요 사회의 시간이냐 제3세계의 시간이냐에 따라 높은 가격이 매겨지거나 아니면 싸구려로 취급된다. 우리와 같은 서구 사회에서 시간이란 자원은 아마도 경제 시스템에서 가장 값비싼 재산일 것이다. 주식시장은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즉각성 덕분에 불타오른다. 눈 깜빡하는 순간이 100만 달러의 소득으로 혹은 손해로 변해버린다. 수익성을 계산해보면, 시간이란 항목은 최고의 중요성을 갖는다. 하나의 재화를 이루는 각각의 요소에는 시간 지수가 있다.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 소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 낡은 것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 그리고 곧이어 제거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같이 말이다. 따라서 미래의 고인이 유언을 통해 자기가 죽은 뒤 친지들이 애도하는 데 들일 시간을 〔미리〕 확정해놓는 행위는,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에 대한 이와 같은 상업적 접근을 통해 정당화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 혐오스러운 계산에서 사건들, 마음의 상태들, 행복과 불행의 단편들 등 우리의 삶에서의 몇몇 측면을 예외로 할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빠르게 살아가기

다른 한편, 여가 활동을 짜는 과정에서 더 이상 고독에는 어떤 시간도 남겨두지 않는다. 북미 지역에서는 모든 것이 분단위로 구성된다. 그런데 여가란 정의상 자신의 시계를 쳐다보지 않는 것, 그리고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25년 이상 TV에서 일해왔다. TV는 시간의 적이다. 가득 채워져 있는 것 같지 않은 시간, 또는 우리를 지루하게 만드는 시간에 대한 성마름이 아니라면 무엇이 채널 돌리기란 말인가? 언젠가 우리는 채널 돌리기가 지식의 전달, 아이들의 집중력, 타인과의 관계 구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몇몇 철학자는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일이다. 채널 돌리기는 분명 젊은 사람들이 수업 시간 동안 수업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과 관련이 있다. TV 앞에서 채널을 돌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가 자신의 선생님을 '채널 돌리듯'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순식간에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창조적인 고독의 시간, 또는 잃어버린 시간과 자유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독특한 정신적 추진력으로 시간의 이 상업적 모델을 떨쳐내고, '선함과 좋음을 관조'하는 데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성인군자 시대에 흔히들 말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씩 조금씩 인간으로부터 그 자신을 앗아가는 이 고통 없는 인원 모집에 맞서, 인간이 거의 저항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랑의 관계가 꾀하는 바는 일종의 조화로운 완벽함으로의 희귀이다. 행복이 당신을 엄습해올 때, 당신은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그렇다면 다른 감정들처럼 사랑도 앞으로는 그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해놓았을 몇몇 사람만의 희귀한 특권이 되지 않을까? 예전에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사랑의 관계가 점점 짧아지는 경향을 띤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북미에서는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 각자의 삶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새겨진 이 정서적 삶의 파열들은, 그것들이 진행되면 될수록, 각자가 가질 수 있는 자기 확신을 조각조각 가져가버리는 경향이 있다.

시인은 말한다. "오 시간이여, 너의 비행을 멈추고 그대, 자비로운 시간들이여, 당신의 흐름을 멈추시오." 지나간 과거의Passé 시인 라마르틴을 우리는 정말로 넘어선 것일까dépassé? 어쩌면 우리의 관례적인 인사말인 "어떻게 지내세요?"가 "시간 있어요?"라는, 끔찍하면서도 슬프게도 그토록 자주 쓰이는 이 다른 문구로 바뀌는 것을 모면하기 위해, 우리는 더더욱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드니즈 봉바르디에Denise Bombardier>
의사소통에 관한 사회학 박사이며, 수필가이자 소설가이다. 라디오-캐나다Radio-Canada의 기자인 그녀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TV 방송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가 저술한 많은 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주요 저서로는 Une enfance à l'eau bénite(1985), La Déroute des sexes(1993), 특히 최근의 Ouf(2002)가 있다. 또한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클로드 생-로랑Claude Saint-Laurent과 함께 Le Mal de l'âme. Essai sur le mal de vivre au temps présent(1988)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기사는 (주)문학과지성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06.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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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에 없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은 매 초 딜레마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옳고 그름마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닥쳐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유네스코의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줄곧 ‘21세기의 대화’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토론에는 전 세계의 과학자, 지성인, 작가, 정책결정권자들이 참여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논점을 제시한다. 

조지 아나스는 ‘과학과 지식, 그리고 전망’을 주제삼은 대화에서 유전과학의 발달에 주목하였다. 유전과학은 우리에게 기술과 함께 전에 없었던 새로운 ‘관점’ 역시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관점은 다른 인간을 보는 관점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창이기도 하다.


 

유전자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미래의 가능성

조지 아나스

21세기가 인간유전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새로운 유전학 기술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변화시킬 뿐만 이니라,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를 바라보는 바로 그 방식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갖는 피상적인 인식 때문에 종종 인종주의가 생겨나곤 했다. 간단히 정의하면, 인종주의는 '인종이 인간의 변별적 특성들과 능력들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유전자 사냥, 특히 인종 분류를 따라 구별된 집단들에 대한 유전자 탐구는 DNA 배열 특징에 기초해 있는 '유전자주의' (아직 공식적으로 승인된 용어는 아니지만, 나는 이 용어를 유전자가 인간의 변별적 특성들과 능력들을 결정한다는 이론으로 정의하려고 한다)에 이를 수 있다. 이 유전자주의는 그 결과로서 인종주의만큼이나 파괴적인 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

새로운 유전학이 가져올 두번째 결과는 우리의 새로운 힘을 우리 자신을 변형시키는 데 이용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더 나은 아기,' 심지어는 다음-인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부류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는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경고했던 사태이다. 헉슬리의 세계는 어떤 검사를 통해 이루어진 세계였는데, 이 검사를 통해 유전적으로 '우등한 자들'이 범주적으로 '열등한' 인간을 노예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있음직한 결과는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다. 이는 기존의 인간들의 새로운 인간들을 제거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위험들을 각각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유전적 보편성, 아니면 유전자주의?

유전체학의 커다란 희망은 다음과 같다. 즉 유전체학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러한 증명으로 인해 우리는 인간들 내에 구별을 만들려는 경향을 버리고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유전체학은 이미 과학이 맡은 부분을 완수했다. 일례로 지난여름 인간 게놈의 밑그림이 발표된 이후,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크리스 스트링어Chris Stringer는 "우리들은 모두 피부 밑으로는 아프리카인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유전학자들도 다른 말들을 통해 동일한 지적을 했다. 한 유전학자는 "인종은 단지 피부 두께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고, 또 다른 학자는 "인종에 관한 어떤 것도 과학적이지 않다. 인종의 경계를 규정하는 어떤 종류의 어떤 유전자형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사적 부문에서 게놈 지도를 작성하려는 시도의 선두주자인 크레이그 벤터Craig Venter는 "인종은 사회적 개념이지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10만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이동하여 세계〔곳곳〕에 이주한 소수의 같은 부족들로부터 진화했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며, 따라서 유전학자들은 이러한 반인종주의의 메시지를 일반 사회에 알렸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유전학의 메시지는 인종주의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그것의 사악한 형제인 유전자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것이 유전자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매사추세츠 과학기술연구소의 유전학 지도자인 에릭 랜더Eric Lander는 우리 모두가 99.9퍼센트 유전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0.1퍼센트의 차이가 우리의 게놈 속에서 300만 개의 변이들을 구성해낸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유전적 변이들 하나하나가 유전적 속성에 기초하는 차별을 지지해줄 사이비 과학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주요 게놈 연구자들은 이 점을 인정해왔으며, 고용과 건강보험, 생명보험과 신체장애보험에서 유전자상의 차별을 금지하는 입법 조치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차별의 유일한 격투장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게놈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우리 삶의 가능성들을 바라보는 방식, 심지어는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에 끼치게 될 영향들이다. 유전학자들은 게놈 암호를 이해한다면 분자 수준에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분자나 원자 혹은 아(亞)원자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와 살이 있는 완전한 몸을 가진 인간존재로서 살아간다. 인간을 유전자들의 집합으로 보는 이러한 환원주의적 시각이 바로 유전자주의의 핵심에 있다.

그 하나의 예로 이제는 사라진 인간 게놈 다양성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종종 '사라지고 있는 세계의 부족들'로 칭해지는, 약 700개에 달하는 세계의 고립된 민족 집단들로부터 DNA 샘플들을 모으고자 노력했다. 이 프로젝트의 취지에서 보면, 그 집단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보다 과학이 그들로부터 DNA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전 세계에 있는 토착민은 몹시 완강하게 이 프로젝트를 거부했고, 그들의 인권이 미덥지 않고 환원주의적인 이 프로젝트보다 상위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들은 모두 피부 밑으로는 아프리카인이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DNA 중 차이를 만들어내는 0.1퍼센트 내에서 유전적 차이들을 찾아내려고 마음먹는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들 서로에 대해서 그런 차이들을 이용할 것이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철학자 에릭 유엥스트Eric Juengst는 이 점을 잘 지적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인구 유전체학의 잠재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차이들을 기술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과학적 쐐기를 생산하여 이미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사회적 균열 안에 박아 넣게 될 것이다."

피부색의 차이를 분자적 차이로 대체함으로써 인종주의가 남긴 자리를 유전자주의가 이어받는 것을 막는 일은 쉽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두 개 조치는 반드시 취해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유전자 프라이버시genetic privacy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유전자도 권한 부여를 명시하지 않고서는 분석될 수 없다. 물론 어떤 '유전자 신분증'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두번째로, '인종들'간의 유전자 차이들을 파악하는 것을 취지로 하는 사이비 과학적 프로젝트는 거부되어야 한다.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미래의 가능성

차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게놈들을 선별해내는 것은 더 많은 차별의 여지를 만들어낸다. 유전공학에 의한 '더 나은 인간' 만들기를 시도하기 위해 새로운 유전학을 이용하는 것은 차별을 넘어 제거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데, 이는 유전학적 종족 말살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선동적인 언어는 정당화되는가?

유전공학의 프로젝트는, 간단하게는 클로닝으로 알려져 있는, 처세포 핵 전이를 통한 인간의 유전자 복제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실존하는 한 인간의 유전자 복제물이 되는 아이를 창조하기 위한 클로닝 작업은 복제아clone child의  개성과 자유를 훼손하고, 동시에 그 아이를 우리 자신의 의지와 과학기술의 생산물로 만듦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우롱한다. 물론 당장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즉, 생산물이라는 점에서 복제된 아이들의 인권이 의문시될 것이며, 원본의 복제물이라는 점에서 이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류의 시민으로 취급받고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처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닝은 유전공학 프로젝트의 시작에 불과하다. 다음의 단계들은 유전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려는 시도, 그다음에는 초인이나 다음-인간을 창조하여 유전적 특성을 '개선'하거나 '향상'시키려는 시도들을 포함하고 있다.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전망을 가장 개연성 높은 귀결로 낳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이다. 그 까닭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우리가 다음-인간들이 우리와 동등한 권리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거나 또는 다음-인간들이 우리를 그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극도로 희박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가 그들을 위협적인 자들로 여겨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기 전에 가두거나 아니면 그냥 먼저 그들을 죽이려고 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아니면 반대로, 다음-인간이 우리(보통의 흔한 인간)를 노예로 삼거나 우선적으로 대량학살되어야 할 인권이 없는 열등한 하위 종으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고 이름 붙인 바 있는, 유전자 차이에 근거한 종족 말살의 가능성, 이것이 바로 종을 개조하는species-altering 유전공학을 잠재적인 대량학살 무기로 만들고, 책임 없는 유전공학자를 잠재적인 생물학적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책임 없는 유전공학자를 잠재적인 생물학적 테러리스트로 만든다. 조금은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르완다에서의 종족 말살을 막기 위해 미국이 조치를 취하지 못한 사실에 대한 분석이 보여주듯, 행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반드시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종족 말살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경우도 정치적·도덕적·상상적 결함들에서 기인하지, 정보의 결함들에서 기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유전학의 희망적인 측면은 유전학이 우리를 새롭게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 견인차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바클라브 하벨Vaclave Havel이 우리의 '종적 의식'이라고 말한 바 있는 것을 형성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이 종적 수준의 의식을 통해 우리의 유전과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결과들을 생각해보고, 예견 가능한 재앙을 막기 위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유전학의 잠재적인 폐해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명 윤리가 요청되어왔다. 그러나 생명 윤리가 의사-환자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개인의 결정에 초점을 두고 있는 한, 생명 윤리의 종(種) 전체에 걸쳐 있는 문제들과 대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생명 윤리가 도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잠재적으로 훨씬 더 효력을 갖는 기틀은 국제 인권이란 말과 그 실천이다.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인간사회의 주변부에서 활동하는 이단 종파나 그 밖의 이들이 인간 복제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세계에 어떤 계기를 마련해준다. 세계가 여태껏 극도로 어려웠거나 혹은 불가능했던 방식들로 예방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계기 말이다.

특히, 유네스코의 인간 게놈과 인권에 관한 세계 선언, 그리고 전 세계 사람과 정부가 보여준 인간 복제 계획에 대한 압도적인 반발은 인간 종의 보전에 관한 공식적인 조약의 체결로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지금 이를 제안하는 것이 합당하고 책임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 조약은 종 개조 기술과 종을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실험을 모두 금지해야 한다. 특히 인간존재가 지닌 유익한 근본적인 특성들에 대한 개조를 꾀하는 과학기술들을 금지해야 한다(이런 개조는 인간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에 클로닝-무성 복제-을 추가함으로써 유성생식을 선택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 결과 우리의 특성들도 선택 가능한 것이 되는 방식으로, 아니면 배아의 유전암호를 바꿈으로써 그 결과로 나온 아이가 인간의 아종이나 혹은 새로운 종의 일원으로 간주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종을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실험들이란 종 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실험들이다. 이종 이식을 위해 돼지의 기관을 이용하려는 요즘 유행하는 기획들이 그런 실험들인데, 이 기획은 HIV와 유사할 수 있는 새로운 치명적 인간형 바이러스를 생겨나게 할 위험이 있다.

이 조약은 또한 감시하고 검토할 수 있는 본부를 가진 민주적이고 책임 있는 시행 메커니즘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종을 개조시키거나 멸종시키는 범주 안에 있는 어떤 실험도 이 본부의 우선적인 조사 검열과 승인 없이는 합법적인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과 기업들의 개입이 생명 종에게 해가 되기보다는 훨씬 유익할 것이라는 점을 그들 스스로 증명하도록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이 조약은 종을 개조시키고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개입에 대해 환경운동의 사전주의 원칙 입장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우리에게 과학이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이끌고 가도록 내맡겨두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측면과 종적 자멸의 위험을 높이는 측면 양쪽 모두에서 너무 강력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서로에 대해 지는 상호적 책임을 더 이상 방기할 수 없다.


결론

나딘 고디머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 관한 그녀의 기존 관념을 뒤흔드는 시사적 소설 『가정의 총』에서, (친구를 죽인 한 젊은이의 부모인) 해럴드Harold와 클로디아 린드가드Claudia Lindgard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린드가드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만일 인종주의자가 다른 색의 피부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며, 피부색이나 종교, 국적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믿거나 믿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의사인 클로디아는 피부 아래에서는 살과 피, 그리고 고통이 모두 같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해럴드 역시 자신의 신앙을 통해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은 신의 피조물이며, 누구도 다른 이보다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 중 아무도 운동에 참여하거나, 항의하거나, 공개된 시위에서 행진을 하거나, 이러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의견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그것이 실패한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혈액형과 같이 변경할 수 없이 결정된 문제인 듯 말이다.

아파르트헤이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행동이 취해져야 한다. 비록 린드가드 집안의 사람들은 행위의 유전적 결정주의를 믿는 것 같지만, 당면해 있거나 임박할 우려가 있는 인권유린 앞에서 아무런 행위를 취하지 않도록 유전암호화되어 있거나, 그런 행위를 변명해 줄 어떤 유전자(혹은 혈액형 특성)도 없다. 유전자주의에 직면하여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우리는 다 함께 유전자 프라이버시를 촉진하고, 인간에 대한 클로닝과 유전공학을 막아야 하며, 존엄과 평등에 근거해 있는 보편적 인권을 촉진하고 보호해야 한다.

종적인 차원에서의 행동이 없다면, 유전자주의는 지구상의 가장 파괴적인 병폐로서 인종주의를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인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조지 아나스 George J . Annas>

보스턴 대학의 보건과 법학부, 생명 윤리와 인권학부 교수이다. 저작으로는 The Rights of Patients(1975), Some Choice: Law, Medicine, And The Market(1998), Health  and Human Right(1999) 등이 있다.


<이 기사는 (주)문학과지성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06.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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