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천 5백만 장 이상 음반 판매.
30곡 이상 빌보드 탑 10 진입.
25번 그래미 상 최다 수상.


이 모든 것이 단 한 사람이 세운 기록이라면 믿어지는가.
태어나자마자 사고로 시력을 잃은 그는 ‘리틀 스티비 원더’란 이름으로 11살이던 1962년에 첫 싱글 을 내면서 발표 즉시 빌보드 싱글차트 1위을 차지했다. 그리고 이 기록은 놀랍게도 아직까지도 깨지지 않았다. 인상적인 데뷔 이후 그는 7천 5백만 장 이상의 앨범 판매고를 올렸으며 남성 솔로 아티스트 중 그래미 최다 수상자(25회)에 이름을 올린다. 지난 해에는 그의 팬임을 자처하는 오바마 대통령에게 미국 대중 음악계에서 최고 권위를 자랑하는 ‘거쉰 공로상’을 받았다.
그의 이름은 스티비 원더(Stevie Wonder). 정말 이름 그대로의 삶을 살아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오바마 대통령에게 '거쉰 공로상'을 받는 스티비 원더>


1950년생으로 반세기동안 노래를 해온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기회가 우리에게 찾아왔다.
8월 10일 그의 슈퍼콘서트가 올림픽체조경기장에서 펼쳐진다. 이번 무대는 1995년 이후 15년만에 갖는 두 번째 내한 공연으로, 티켓은 10만원이 훌쩍 넘는 가격에도 예매시작 20여분만에 매진되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스티비 원더는 피아노, 하모니카, 오르간, 베이스 기타, 드럼 등 여러 가지 악기를 능숙하게 연주하는 것으로 유명한데, 그런 그가 이번 공연은 게스트 없이 처음부터 끝까지 무대를 꽉 채울 예정이라고 한다. 게다가 LED화면으로 그의 일상이 담긴 영상을 공개할 예정이라 팬들의 기대는 콘서트 날짜가 다가올수록 커져만 가고 있다.


                                                                           <현대카드 콘서트>

<배철수의 음악캠프>로 많은 이들에게 친근한 음악인 배철수는 스티비 원더에 대해 "어떤 앨범의 어떤 곡을 방송해도 믿음직스런 아티스트"라며 "한때 이 사람 같은 음악적 능력을 가질 수 있다면 나 역시 시력을 포기할 수도 있겠다는 터무니없는 상상을 하기도 했을 정도니 더 말해 무엇하랴."고 극찬했다. 스티비 원더의 앨범 중에서도 배철수가 최고로 뽑는 앨범은 『Songs In The Key of Life』이다. 우리나라에도 널리 알려져 있는 「Isn't She Lovely」를 필두로 주옥같은 음악이 가득한 이 앨범을 음악평론가 배순탁 씨가 평했다. 다가올 공연을 기다리는 동안, 스티비 원더의 대표 앨범을 통해 그의 음악세계를 엿보도록 하자.


<배철수가 스티비 원더의 앨범 중 최고로 꼽는『Songs In The Key Of Life』의 앨범쟈켓>


그의 연대기 중 가장 빛나는 순간
배순탁 

1970년대 스티비 원더가 남긴 자취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은 그가 건설해놓은 끝없이 펼쳐진 거대한 성채로 접근하는 것과 다름없다.

1972년 『Music Of My Mind』를 공개하며 야심차게 첫발을 뗀 그는 같은 해 걸작 『Talking Book』을 발표하며 지정(地釘)작업을 시작했다. 그 후 『Innervisions』와 『Fulfillingness' First Finale』를 통해 1974년과 75년 연속으로 그래미 '올해의 앨범(Album Of The Year)' 부문을 획득함으로써 기본 뼈대를 구축했다. 이때부터 거칠 것 없는 성공시대가 시작되었고 드디어 1976년 그의 연대기 중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기록되는 본 앨범이 공개된 것이다.

평단에서는 더블 앨범으로 발표된 본 작품을 스티비 원더만의 영예가 아닌 대중음악사에 영구히 기록될 최고의 순간 중 하나로 포착한다. 지금까지도 계속해서 이 앨범의 위대성과 파급력에 대한 언급이 쉬지 않고 흘러나오는 것이 이를 방증한다. 그만큼 명반이라는 말이다.

곡 하나하나에 흘러넘치는 마력을 거론하지 않는 것은 실례다. 위대한 재즈 아티스트 듀크 엘링턴(Duke Ellington)에게 헌정하는 「Sir Duke」, 재즈와 팝의 기묘한 공존 사례 「I Wish」와 같이 앨범의 투톱 싱글은 말할 것도 없다. 또한 싱글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그 이상의 인기를 누린 「Isn't She Lovely」와 후일 메리 제이 블라이지(Mary J. Blige)와 조지 마이클(George Michael)에 의해 가치가 재발견된 「As」, 그리고 힙합 뮤지션 쿨리오(Coolio)에 의해 리메이크된 「Pastime Paradise」등 돋을새김 되지 않은 부분이 없을 정도다.
생각할 틈도 없이 음과 악의 황홀경을 향해 투사되는 그의 곡들 안에서 우리는 록, 발라드, 재즈, 소울, 펑크 등 인류가 만들어낸 음악 유산의 집대성을 손에 넣을 수 있다. 그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너무나 자연스럽게도 1977년 그래미 '올해의 앨범' 주인공은 다시 한번 그의 몫이었다. 역사상 최초로 세 개 앨범 연속 '올해의 앨범' 트로피 수상자로 지명된 것이다. 시상식 당시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음악 연구 차 머물고 있던 스티비 원더는 화상 통화로 수상 소식을 접하며 예의 그 환한 웃음을 보여주었다. 그래미에서 처음으로 수상자와의 전화 연결을 위해 인공위성을 띄웠던, 초유의 사건이었다.
그런데 만약 그가 이 음반을 1년만 일찍 발표했더라면 '3년 연속 제패'라는 전무후무한 대기록이 추가되었을지 모를 일이었다. 이를 의식한 폴 사이먼(Paul Simon)이 1976년 그래미에서 '올해의 앨범'을 수상하며 "이번 해에는 스티비 원더가 음반을 내지 않아 다행이다"라고 소감을 밝힌 에피소드는 너무나 유명하다.

작품성과 대중성의 가장 이상적인 병존, 완벽한 짜임새와 구성력, 장르를 초월해 경외를 불러일으키는 신기에 가까운 가창력과 연주력, 명작의 조건 중 단 하나도 누락될 것이 없는 퍼펙트 레코드다.
이 음반을 끝으로 스티비 원더의 길었던 전성시대는 1막을 고하지만, 앨범은 지금까지도 한계가 드러나지 않는 영감을 후배들에게 불러일으키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스티비 원더는 언제나 현재진행형이다.


배순탁

「배철수의 음악캠프」 작가. 음악 웹진「IZM」을 시작으로 Oi Music, 강앤뮤직 등을 거쳐 현재 MBC 라디오국 구석에 '쭈구리'마냥 앉아 음악 듣는 것을 직업이자 삶의 낙으로 삼고 있다. 오늘도 그는 「배철수의 음악캠프」 방송을 준비하는 한편 다양한 음악매체에 칼럼을 기고하는 등 음악평론가로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이 기사는 (주)위즈덤하우스와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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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은 지금 응웬옥뜨 열풍… 끝없는 벌판
2006년 베트남 작가협회 최고작품상 수상자. 감동의 성장소설 끝없는 벌판


놈들은 여자를 잡아채서 던지고, 흩뿌려진 쌀겨더미 위에 사정없이 처박았다. (…) 이미 만신창이가 된 몸에 계속해서 발길질을 해댔다. 논바닥까지 다 타버린 흉작의 계절을 어떻게든 잊기 위하여, 곤궁기의 배고픔을 그렇게라도 잊기 위하여 놈들은 여자를 만만한 시빗거리 삼아 화풀이를 해대고 있었다. 무슨 새로운 건수가 생기지 않는 한 놈들은 눈앞의 재밋거리를 오래도록 즐길 것이었다. 놈들은 여자의 머리칼을 잡아채어 마른 풀을 한 움큼씩 베어내듯이 날카로운 칼로 사정없이 잘라냈다. 머리칼 끄트머리가 완전히 잘리면서 순간적으로 여유가 생겼을 떄, 여자는 틈을 놓치지 않고 벌떡 일어나 쏜살같이 우리 거룻배로 뛰어들었다-



주인공과 남동생 디엔, 그리고 아버지는 거룻배를 집 삼아 베트남의 메콩 강 유역을 유랑하는 오리치기 가족이다. 우연히 지나치던 어느 촌락에서, 그들은 마을 남자들에게 린치를 당하던 여자를 도와주게 된다. 인적이라곤 없는 허허벌판에서, 여자는 오리를 치는 주인공 가족과 함께 생활하기 시작한다.


나는 무슨 일로 그렇게 두들겨 맞았는지 물었다.
“몸을 팔았어.” (…)
-남의 피와 땀, 눈물을 먹고 사는데 그렇게 두들겨 맞는 것도 당연하지 않겠니?
여자는 이렇게 말하면서 씁쓸하게 웃었다. 자신이 그런 대가를 치르는 게 마땅한 업보라 여기는 듯했다. “그런데 정말 운 좋게도, 그런 일 덕분에 너희들을 만나게 됐잖니. 이렇게 너희들과 함께 지내게 된 게 난 얼마나 기쁜지 몰라…” (…)
하지만 디엔과 나는 여자가 결국에는 지쳐서 이곳을 떠나리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여자가 우리 곁에 머무는 시간은 언제나 희미하게 보일 뿐이었다.


하지만 유랑 생활에 지친 디엔과 주인공은 여자에게 마음을 온전히 열 수 없다. 두 사람에겐 어머니가 떠나버린 아픈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어렸을 때, 가난에 시달리던 어머니는 옷감 장수가 가져온 붉은 옷감을 걸쳐보다 그 색에 마음을 빼앗기고 말았다.


그렇게 이상한 빨간 색을 나는 본 적이 없었다. 마당의 목부용(木芙蓉) 꽃보다도 붉고 핏빛보다도 더 빨간 빛깔이었다. 엄마는 우리를 쳐다보면서 물었다. “뭐가 어때서 너희들은 그렇게 빤히 쳐다보고 그래?” 내가 말했다. “엄마가 너무 낯설어 보여요. 알아볼 수도 없을 것 같아요.” 그 말에 엄마는 뛸 듯이 기뻐했다. “정말로?” 나는 너무도 울고 싶은 심정이었다. 엄마와 자식이 서로 낯설다는데, 어떻게 저리도 기뻐할 수 있단 말인가?”


어머니는 결국 옷감 장수와 정을 통하고, 디엔과 주인공 남매는 쌀 바구니 뒤에서 그 광경을 모조리 목격한다. 아이들에게 부정을 들킨 것을 깨달은 어머니는 옷감 장수를 따라 마을에서 도망친다. 아버지는 집을 불태워 버리고 좌절에 빠져 남매와 함께 유랑을 떠난다.
하지만 상처로 마음이 황폐해진 아버지는 남매를 냉랭하게 대할 뿐 아니라, 유랑하다 들르는 곳 마다 여자를 꼬셔내어 가정을 버리게 했다가는 바로 내치는 행동을 반복한다. 남매의 삶은 점점 외롭고 처절해져 간다.


아버지는 우리를 만성적인 결핍의 나락으로 계속 떠밀어 넣었다. 머물던 장소에서 떠날 때면, 우리가 지금 이주를 하는 것인지 도망을 가는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우리는 인간사의 기본적인 권리를 모두 잃어버렸다. 배웅도 없었고 흔드는 손길에 마음이 일렁일 기회도 없었으며 뜰에서 갓 뜯어낸 채소 한 묶음, 바나나 한 다발 같은 농촌의 소박한 선물도 받지 못했다. “안녕히, 잘 가세요. 건강하시구요…” 그 정도의 살가운 당부의 말도 듣지 못했다. (…)
디엔이 웃음을 지었다. ‘어라, 우리 둘은 인-간-의-말-소-리를 낼 수 없게 되었나 봐.’ 디엔 녀석은 전혀 입술을 움직이지 않았지만, 나는 디엔의 생각을 읽을 수 있었다. (…) 상처 가득한 작은 가슴을 미친 바람이 채찍이 되어 후려치고 있었다. 


그리고 이토록 외로움과 상실감, 가난만이 가득한 남매의 삶 속으로, 마찬가지로 상처받고 외로운 처지의 여자가 들어온 것이다. 그녀는 남매에게 애정을 보이고, 아버지에게 연심을 표시한다. 하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고, 설상가상으로 조류독감이 유행하자 가족의 삶은 더욱 곤란에 처하는데…


소설 <끝없는 벌판>은 베트남 최고의 베스트셀러 작가 응웬옥뜨의 대표작이다. 출간 이틀 만에 초판 5천부가 모두 매진된 화제작이면서, 미풍양속에 반한다는 이유로 작가가 사상교육위원회에 소환되는 해프닝을 만든 문제작이기도 하다. 베트남 작가협회는 이 책에 2006년 최고의 작품상을 수여했다.

책을 펴고 몇 페이지 넘기다 보면 어째서 베트남 사회가 이 작품에 그토록 열광했는지 금세 이해가 간다. 작품 전체가 베트남 농민들의 생활을 생생하게 그리고 있고, 품으로 파고드는 듯 절절한 감정 묘사, 이야기를 감싸고 부드럽게 흐르는 듯한 문장은 독자를 정신없이 몰입시킨다.
캐릭터의 힘도 빼놓을 수 없다. 주인공, 디엔, 아버지, 여자의 네 인물들은 모두 상처받아 일그러져 있지만, 그 사연에 얽매이지 않고 국면마다 놀랍도록 입체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인물들의 다양한 면모에 설득력을 부여하는 것은 사람에 대한 저자의 깊은 이해, 그리고 기저에 깔린 절절한 연민이다.

때로 가난하다는 것과 외롭다는 것은 같은 말이다. 슬프다는 것과 남을 슬프게 만든다는 것이 같은 말이 될 때도 있다. 많은 이들이 오늘도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응웬옥뜨는 그럴 수밖에 없는 우리 삶을 이해하는 사람이다. 그녀가 풀어내는 이야기들은, 저자의 바람 그대로 우리들의 가슴을 촉촉한 물방울로 적신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끝없는 벌판

응웬옥뜨 | 하재홍 옮김

아시아 2007.09.30


정다운 기자
(dawn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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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에 대한 모멸, 반복되는 '죽음의 이야기'
철학가 사사키 이타루가 말하는 1Q84 - 이 소설은 문학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이 소설은 잘못되어 있다. 픽션에 '옳고 그름'이 문제가 되는가 라는 당연한 의문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의문 이전에 이 소설은 결정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소설이다. 왜 그럴까?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전에 옴진리교 사건을 접하고 큰 충격을 받았다고 했다. 또한 옴진리교 교주인 아사하라 쇼코가 전했던 강력한 이야기에 저항할 수 있는 이야기, 원리주의적인 컬트 집단이 전해주는 이야기에 대항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내야 한다며, 그것이 자신과 같은 소설가의 책무라고 했다. 진지한 발언이며 올바른 자세라고 생각한다. 여기에 이견은 없을 것이다.

우선 이 점을 확인하고 들어가자. 소설에 나오는 '선구'처럼 신좌익 붕괴 이후 출현한 사이비교단에 공통된, 특히 옴진리교에서 전형적인 형태로 발언되는 언설이 있다. '바르드의 인도'라는 세뇌 비디오에서 아사하라 쇼코의 말, "너는 죽는다, 반드시 죽는다, 절대로 죽는다. 죽음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는 언설이다. '어차피' 죽는 것이기 '때문에' 어떻게든 해야 한다는 '죽음의 공포'를 부추겨서 행동으로 몰아세우는 이야기다. 더구나 죽음의 위협을 받으며 행하는 '어떤 것'도 사실 '죽음' '절멸'과 표리일체인 구제를 위해 존재한다.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죽음과 절멸인 것이다. 본래 종말론은 이 세계에 끝이 있다는 사고방식이기에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종말이 찾아오지 않는다 해도 종말론이라 이름한다. 하지만 옴진리교적인 종말론은 자신이 살아 있는 동안 종말이 오기를 바란다. 그들의 논리 근저에 흐르는 것은 "어차피 죽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 죽고 싶다. 그리고 내 죽음과 이 세계 전체의 절대적인 죽음, 즉 멸망을 일치 시키고 싶다"는 기묘한 욕망이다. 자신의 죽음과 세계의 죽음이 일치되고 '모든 것'의 종말이 '하나'가 된다는 꿈같은 절대적인 향락의 순간, 그것이 누구나 바라는 종말의 순간이라고 한다.

죽음으로, 죽음의 공포를 선동함으로써 죽음으로 더 나아가는, 그리고 스스로의 죽음과 세계의 멸망이 일치하는 절대적 순간으로 이동한다. 이것은 나치적인 언설이다. 토마스 만은 일찌기 이런 명언을 남겼다. "나치스의 본질이란 전쟁을 위한 전쟁, 스스로가 내포된 죽음과 멸망을 위한 전쟁이다"라고 말이다. 푸코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도 나치스는 결국 '자살'을 그 목적으로 한다고 했다. 더구나 세계와 함께 스스로를 죽음에 이르게 하는 것이다. 히틀러는 텔레그램71호에서 이 세계 다른 모든 민족을 멸망시킴과 동시에 "독일인의 생존조건을 파괴하라"고 명령한다. "내 죽음의 순간이 모든 타자, 모든 세계의 죽음, 즉 멸망의 순간과 일치한다"는 명제를 '절대적 향락'으로 꿈꾸고 있었다. 이 죽음의 이야기, 죽음을 선동하는 이야기, 그리고 모든 죽음이 일치하는 순간으로 가는 이야기, 이것이야말로 무라카미 하루키가 대항해야 하는 이야기의 전모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옴진리교적인 이야기에 대항할 것이라고 확실히 말했다. 그러므로 이 죽음의 이야기에 대항해야 한다. 그렇다면《1Q84》는 과연 그런 소설인가? 그렇지 않다. 완전히 거꾸로다. 이 '죽음의 이야기'는 반복된, 그리고 강화된 죽음의 이야기가 되어 버렸다.

주인공 중 하나인 아오마메라는 여성이 있다. 그녀는 자신의 삶과 이 세계의 생을 모멸하며, 반대로 그것을 해소해 줄 죽음과 멸망을 사랑하며 그 속에 빠져 있다. 어느 노부인이 이끄는 단체에 속해서 아오마메는 살인을 한다. 이 단체는 강간이나 가정폭력의 피해자인 여성을 보호하는 한편, 그 행위자인 남자를 차례로 죽여 간다. 아오마메는 그 집행자로서 사람들을 죽인다. 아이스픽이라는 지극히 남근적인(팔루스, Phallus) 무기로 남성을 살해하는 팔루스 사냥을 한다. 그리고 아오마메는 이따금 롯폰기 등지의 바에서 남자 사냥을 한다. 그 파트너가 된 아유미라는 경찰도 권총을 무척 좋아한다. 따분하고 평범한 '팰릭 걸'(서구의 터프한 전사적인 여성들에 반해 일본의 세일러 문을 비롯한 전투미소녀를 구별하여 전자를 팰릭(Phallic) 마더, 후자를 팰릭 걸이라 한다. 팰릭은 '팔루스=페니스를 가진'이라는 의미로 일종의 완전성을 상징한다 -역주)들의 이야기다. 그 자체는 그냥 괜찮다고 해두자. 하지만 '피로 범벅된 팔루스적인 여성들에 의한 팔루스 사냥'에 대해 두 사람은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그치만 아오마메 씨 (……) 이 세상은 이치도 안 통하고 친절한 마음도 부족한 것 같아"/"하지만 이제 와선 교환도 안 되지"/"반품유효기간은 벌써 지나버렸고" / "영수증도 내다버렸어" / "그래도 뭐 상관없잖아. 이런 세상 따위 눈 깜짝 할 사이에 끝나버린다구" 아오마메가 말했다. "그거 정말 재미있을 것 같다" / "그리고 왕국이 우리에게 찾아오는 거야" / "아, 어떻게 기다려" 아유미가 말했다.

이런 내용은 두 번 반복된다. 아오마메는 종말과 죽음에 빠져있다. 그녀는 항상 말끝에 '죽고 싶다'고 하며 무척 강하게 '삶'을 모멸한다. 1980년대에 경제적으로 풍요로운 사회를 향수하며 무엇 하나 부족함이 없는데도 자신의 인생을 '의미 없고 역겨운, 남겨진 찌꺼기 같다'고 한다. 노부인의 의뢰로 '선구'의 리더를 살해해야 하는 힘든 임무 앞에서도 이렇게 말한다. "내겐 잃을 게 아무 것도 없어요. 일도 이름도 도쿄에서의 지금 생활도, 내게는 별반 의미가 없는 것들이에요"라고 말이다. 공허하고 역겨운 삶에 대한 묘사는 그 밖에도 모습을 드러낸다.

아오마메는 삶을 경멸하고 죽음에 경도되어 있으며 종말을 동경하고 팔루스적인 흉기로 팔루스를 가진 남성을 살해하고, 그러다 지치면 팔루스를 사냥하며 시간을 보낸다. 아유미는 마음속에 '결락'을 안고 있다고 묘사된다. 그 결락을 메우기 위해 죽음과 팔루스를 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오마메에게는 하나의 구원이 존재한다. 아유미와 달리 자신 속에는 결락이 아닌 '사랑'이 있다고 말한다. 다시 말해서, 열 살 때에 종교단체에 속해 있다는 사실로 따돌림을 당했던 자신을 감싸 준, 또 하나의 주인공 덴고에 대한 20년 동안의 사랑이 있다고 한다. 

삶의 모멸과 죽음과 종말에 대한 갈망, 그리고 팔루스 향락에 덧칠된 아오마메를 그 세계에서 구제해 줄 유일한 것은 덴고에 대한 사랑이다. 죽음과 종말 이야기의 탈출구로서 그녀는 이미 사랑을, 사랑 이야기를 지니고 있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덴고에 대한 사랑을 이야기할 때 아오마메는 항상 죽음을 말한다. 그에게 안기면 "그 자리에서 당장 죽어도 상관없어, 정말"이라고 한다. 어쩌다가 그를 만나게 되면 "어쩌면 그를 죽이고 싶은 생각이 들지도 몰라. 헤클러&코흐로 그를 우선 쏴 죽인 후에 내 뇌수를 쏴서 뚫어버릴 지 몰라" "하지만 대신 그를 위해 죽을 수 있어. 그걸로 됐어. 난 웃으면서 죽을 수 있어"라고 말이다. 그녀의 내부에서 덴고에 대한 사랑은 결정적으로 죽음과 결부되어 있다. 다른 예를 들어보자. 《1Q84》는 이야기가 전개됨으로 써 다른 현실이 창조되는 테마로 일관되어 있는데,《1Q84》라는 세계를 만들어냈다고 여겨지는 <공기 번데기>라는 소설이 존재한다. 그것은 덴고가 후카에리의 원고를 철저하게 리라이팅해서 태어난 소설이다. 그 소설을 아오마메가 읽는 장면이 나온다. 그 소설 바로 그 장면에서 아오마메는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덴고가 만들어낸 이야기 속에 있다, 그의 몸속에 있다, 그의 체온으로 감싸여, 그의 심장박동에 이끌리고 있다, 그건 분명 그의 문체일 것이다. 얼마나 멋진 일인가"─ 바로 뒤에는 이렇게 이어진다.
"이것이 왕국이야, 그녀는 생각한다. 나는 죽을 준비가 되었어. 언제라도."

결국 아오마메의 덴고에 대한 사랑이란 죽음이다. 아오마메의 이야기는 한없이 피로 얼룩져 죽음과 팔루스로 갇혀 버린다. '무거운' 것과 '가벼운' 것을 굳이 병렬해서 보여주려는 하루키 특유의 아이러니컬한 표현이 이 작품 속에도 나타난다. 아오마메는 '가정내 폭력을 휘두르는 비열한 남자들'과 '편협한 정신을 가진 종교적 원리주의자들과 똑같을 만큼' '이 세상에서 가장 혐오스러운 것'으로 '변비'를 든다. 아오마메는 가정내 폭력을 휘두르는 비열한 남자들을 살해하고 종교적 원리주의에 대항하기 위해 사람을 죽인다. 그렇다면 변비 때문에도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루키적인 아이러니는 이 지점에서는 전혀 효과가 없다. 재미있지도 않고 감흥도 없다. 또한 하루키는 아오마메의 입을 빌어 팔루스로의 직접적인 폭력이 '세계의 종말'이라고 한다. 가벼운 농담일지 모르지만 지극히 썰렁하기만 하다. 아오마메의 사랑 이야기는 사실 죽음, 팔루스, 종말만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증거로서만 유효할 뿐이다.

다짐해두지만, 결코 등장인물의 행동이 윤리적으로 잘못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아니다. 아오마메의 행동이나 사상이 정치적으로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해봤자 아무 소용없다. 이 소설은 정치적이나 윤리적으로 잘못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문학적으로 잘못되어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사하라 쇼코적인 죽음의 이야기에 대항하기 위해 이야기를 만든다고 스스로 말했다. 그러나 이제까지의 아오마메 이야기에는 어떤 저항도 없었을 뿐 아니라 옴진리교의 죽음의 이야기를 강화시키기까지 했다.

이제 덴고의 이야기로 화제를 돌려보자. 한 마디로 말하면 이렇다. 주인공이며 아오마메를 구제해 줄 사랑의 대상인 덴고가 하는 일은 '선구'의 리더가 하는 일과 완전히 동일하다. 아오마메는 '선구'의 리더를 살해하러 갔다. 하지만 그에 대한 기묘한 공감이 싹튼다. "당신을 살해하지 않아도 될 1984년이 존재할지 모른다"고 말해버릴 정도로 말이다. 실제로 후카에리의 아버지이기도 한 리더는 아오마메의 덴고에 대한 사랑도, 어느 시점에 갈라져 나온 '1Q84'년의 세계에 있다는 사실을 아오마메가 깨닫고 잇다는 사실도 모두 알고 있었다. 아오마메가 '선구'의 리더를 죽이러 간 것은 그가 자신의 딸인 후카에리를 포함한 교단의 나이 어린 소녀들을 강간했기 때문이지만, 실제로 그의 말을 들어보면 후카에리를 비롯한 소녀들은 '공기 번데기'에 의해 만들어진 복제품이었다. 더구나 그의 행위는 강간이 아닌 '다의적인 교접'이며 그럼으로써 마치 신의 목소리를 듣는 것처럼 '리틀 피플'의 목소리를 듣는다고 했다. 이것은 '퍼시버(지각자)'인 소녀들과 '리시버(수신자)'인 리더의 교접에 의해 이루어지며 수신된 목소리로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런데 덴고도 그와 동일한 행동을 한다. 후카에리라는 퍼시버와 덴고는 그야말로 교접을 했다. 리라이팅이라는 의미에서도, 그리고 육체적으로도 말이다. 그럼으로써 현실 세계 그 자체를 생성해내는 이야기를 만든다는 점도 동일하다. 분명 '리틀 피플'이 만들어낸 '공기 번데기'에 의해 후카에리의 실체인 '마더'와 그 복제품인 '도터'는 분열하며, 전자는 덴고와 후자는 아버지인 리더와 '교접'하는 것이다. 하지만 후카에리 자신이 "나는 어디에선가 도터와 바뀌어버린 것 아닐까"라며 자신과 도터의 차이가 부정확하다는 사실을 말한다. 그러므로 '동일'하다.

'동일'한 행동을 한다는 말은 '교접'에서도 마찬가지다. 리더는 자신의 딸(의 도터)을 강간한다. 즉 '교접한다'. 요컨대 이는 근친상간이다. 이 때 그는 리틀 피플의 의지에 "거역할 수 없었다" "내가 그것을 원한 게 아니다"라며 수동성을 강조할 따름이다. 마찬가지로 후카에리와 '교접하는' 장면에서 덴고는 '심한 무력감' '자신의 의사로……컨트롤할 수 없다'고 말하며 '모든 것은 그의 손이 닿지 않는 곳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신체는 완전히 마비되었고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 없었다'고 묘사된다. 아오마메도 어릴 적부터 가입되어 있던 '증인회'로 인해 어쩔 수 없이 인생을 그렇게 보내는 것으로 묘사되어 있다. 결국 이곳에서는 모두가 피해자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옛날에 자신이 가해자가 되는 상황에 공포를 느낀다고 했었다. 이 소설에서는 모든 가해자 전원이 다 자신을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수동적이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진술한다. 모두 '시스템'에 종속된 '계란(하루키의 예루살렘상 수상식에서의 연설 '높고 단단한 벽과 그에 부딪쳐 깨지는 계란이 있다면 나는 언제나 계란 쪽'을 빗대어 표현한 것')이다. 그 계란이 강간을 하고 사람을 죽이는데도 말이다.

자네는 죽으면 덴고는 구제된다는 리더의 말을 믿고 아오마메는 마지막에 자살을 한다(자살미수일 가능성도 남아 있지만). 사랑 때문에 하는 자살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죽음의 이야기'를 사랑 이야기 내지는 사랑을 상실한 이야기로 대항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유한성의 이야기,
'어차피 당신은 유한하다, 때문에'라는 위협의 이야기다. 더구나 앞에서 서술한대로 아오마메의 사랑은 죽음 그 자체다. 그 사랑의 대상인 덴고는 러더와 완전히 동일한 행동을 한다 ─ 결국 그 지점에서 중요한 시선이 드러난다.《1Q84》의 세계, 달이 두 개 떠 있는 세계는 덴고와 후카에리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의해 창조된 것처럼 묘사되어 있다. 앞에 나왔던 에피그램(epigram: 경구, 또는 짧은 풍자시 -역주)이 말하는 것처럼 "이곳은 보여지기 위한 세계, 모든 것이 다 만들어진 것, 하지만 나를 믿으면 모든 것이 진짜가 된다" 이야기를 들려주면 그것이 현실을 만들어낸다. 그야말로 아사하라 쇼코의 말이 현실로 나타나 사람을 죽인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실제로 덴고와 후카에리가 만들어낸 이야기에 의해 만들어진 《1Q84》속 '현실'의 '진짜' 세계도 결국 공포와 죽음의 세계이며 죽이거나 살해당하며 죽음을 열망하고 종말을 갈망하는 것이다. 결국 덴고의 이야기도 '죽음의 이야기'이며 아사하라의 이야기와 전혀 다르지 않다. 조금만 더 부언해 보자. 무라카미 하루키 자신은 '죽음의 이야기'를 정확하게 반복하고 강화한 소설을 '들려주고' 그것을 전 세계에 산포함으로써 어떤 현실을 만들어내려는 것일까? 거칠게 표현한다면, 하루키가 하는 행동은 아사하라 쇼코의 행동과 다르지 않다. 덴고가 하는 행동이 리더와 다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 몇 번이라도 반복할 수 있다. 이 소설은 윤리적 정치적으로 틀렸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현실을 만들어낸다는 '문학' 전쟁에서 스스로 대항하겠다고 확언했던 죽음의 이야기를 반복 강화했다는 의미에서 이 소설은
문학적으로 완전히 잘못되어 있다.

무릇 이야기로써 이야기와 싸울 수 있는가, 그것은 20세기 문학의 유산을 무시하는 행동이 아닌가. 하고 싶은 말은 아직 많지만 이쯤에서 자중하겠다. 그런데 이 소설은 구성상 BOOK3를 쓸 수 있도록 되어 있다. 하루키 스스로도 그 다음을 쓸 것인지 곰곰이 생각중이라는 말을 들었다. BOOK3는 나올 것이다. 무라카미 하루키는 아사하라 쇼코에게 대항하는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라고 단언한 이상, 이 소설을 이렇게 끝맺어서는 안된다. 그것은 소설가로서 그의 의무다. 무라카미 하루키라는 세계적 작가가 이런 사실을 모를 리가 없다. 그가 다음 권에서 내 모든 의혹을 불식시키고 아사하라적·원리주의적·나치스적인 죽음의 이야기를 전복시킬 수 있는 진정한 소설을 완성시킬 것이라 믿는다. 그 완성을 바라 마지않는 바다.
 


지은이 사사키 이타루(佐佐木中)
1973년생. 철학가, 이론종교학가. 저서로《야전(夜戰)과 영원: 푸코·라캉·르장드르》등이 있다. 
 



<이 기사는 (주)도서출판 예문과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1Q84 어떻게 읽을 것인가

가토 노리히로 | 박연정 옮김

예문 2009.12.31


정다운 기자 (
dawn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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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인생을 춤추게 하라

무언가에 진정으로 사로잡힐 때, 삶에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쥬제페, 사로잡힌 남자 이야기>

성공하려거든 일에 미치라는 이야기를 한다. 몰입의 중요성도 자주 말한다. 하지만, 누구나 경험하듯이 몰입이란 것이 하려고 한다고 되는 일은 아니다. 더구나 진정한 몰입은 본인의 의사와는 상관없이 이루어지곤 한다. 그래서 우리는 일에 ‘빠진다’, 눈길을 ‘뺏긴다’, 취미에 ‘미친다’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한 가지만 파고들어 성공을 거둔 사람에게 ‘어떻게 그렇게까지 빠질 수 있을까?’ 하며 경탄 섞인 시선을 보낸다. 흔하게 몰입을 이야기하지만, 사실 우리는 경험해 보지 않고는 몰입이 무엇인지 모른다.
그런 우리들에게, 이시이 신지가 전하는 어른을 위한 동화 <쥬제페, 사로잡힌 남자 이야기>는 진정으로 몰입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 생각해 볼 기회를 준다.
한 남자가 있다. 직업은 레스토랑 서버. 사람들은 그를 ‘사로잡힌 남자’ 라고 부른다. 툭하면 무언가에 정신없이 빠져들어서, 그야말로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오페라, 삼단뛰기, 외국어, 곤충채집, 탐정놀이, 자수, 우표수집……. 한번 사로잡히면 밤낮으로 열중한다. 너무 빠져든 나머지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고, 직장에서 잘리기도 하고, 심지어 고소를 당하기까지 한다. 그래도 그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끊임없이 열정을 쏟은 결과 돈과 명예가 눈앞에 올 때도 있지만, 그것을 쥐려고 하지도 않는다. 그가 사로잡힌 것은 그 일 자체이지 거기 따라오는 혜택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쯤 되면 누군가는 고개를 갸웃하게 될지도 모른다. 부나 사회적 성공을 생각하지 않는 것이 진정한 몰입이라면, 대체 무엇을 위해 희생을 하고 열정을 불태운단 말인가? 단순히 몰입을 위한 몰입만으로도 과연 의미가 있을까?
그리고 작가는 여기에 대해 공감할 수밖에 없는, 웃음으로 가득한 해답을 제시한다. 그것은 우리가 왜 사는가에 대한 대답이기도 하다.

몰입이란 즐겁기만 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괴로운 일에 가깝다. 무언가에 완전히 몰입하는 순간 인생의 다른 부분은 잊혀지고 버려진다. 얻는 것도 있지만 때로는 잃는 것이 더 많을 수도 있다. 하지만 사는 데 이유가 없듯이, 무언가에 사로잡히는 데도 딱히 이유는 없다. 몰입의 순간은 생각지도 않은 곳에서 불쑥 찾아와 삶에 빛과 윤기를 더해준다. 이해득실이니 가능성을 따지며 두려워하기보다는 기꺼이 사로잡혀 주는 것 또한 즐거움이 아닐까.

아직 아무 데도 사로잡혀 본 적이 없다고? 그럴 리가! 누구나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자기 삶에 몰입해 있다. 거기서 한 두 가지 더 무언가에 빠져드는 것이 그렇게 어려울 이유도 없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쥬제페, 사로잡힌 남자 이야기

이시이 신지 | 서혜영 옮김

다우출판사 2002.11.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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