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판 전의 대법원의 내부 모습> 

“수백억원대의 회삿돈을 횡령한 혐의로 기소된 보람상조그룹 최 모(52) 회장에 대해 검찰이 징역 10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2010년 7월 22일자 부산일보 기사다. 이 기사를 보고 최 모 회장이 징역 10년형에 처해졌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렇지 않다. 구형[求刑]은 말 그대로 풀이하면 “형을 요구한다”는 뜻이다. 형사재판에서는 검사가 판사에게 형을 내려달라고 요구하는 것을 말한다. 

구형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형사재판 절차를 알아야 한다. 형사재판에서 먼저 검사는 수사를 통해 피의자를 기소한다. 기소란 법원에서 재판을 구하는 것으로 검사의 고유권한이다. 법원은 공소사실을 토대로 실제로 피고인이 죄가 있는지를 재판한다. 기소된 이후에는 검사와 피고인은 양쪽 당사자가 되고 모든 판단은 법원이 내리게 된다. 판결 1~2주전 재판장은 법정에서 검사와 피고인에게 마지막 진술을 할 기회를 준다. 이때 검사는 판사에게 “피고인을 징역 5년에 처해주시기 바랍니다.”라는 식으로 의견을 밝히는데 이것이 바로 구형이다. 

구형은 피고인이 받아야 할 적당한 형이 어떤 건지 검사가 의견을 밝힌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판사는 구형을 참고할 뿐 그에 따라야 할 의무는 없다. 이에 반해 판사가 판결을 선고하면서 실제 내리는 형을 ‘선고형’이라고 한다. 일반적으로 검사의 구형은 판사의 선고형보다 형량이 세다. 예를 들어 검사가 징역 5년을 구형했다면, 판사는 그보다 낮은 징역 2년을 선고하거나 집행유예를 붙이는 식이다. 검사는 피고인의 죄를 밝혀야 하는 자리에 있기 때문에 아무래도 심판자인 판사보다는 형이 셀 수 밖에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항상 ‘구형 > 선고형’의 공식이 성립하는 것은 아니다.  2010년 광주고등법원은 미성년자를 수 차례 성폭행 해 출산까지 하게 한 40대 파렴치범에 대해 징역 15년을 선고했다. 검찰의 구형한 징역 12년보다 3년이 늘었다. 법원은 검찰이 생각하는 것 이상으로 피고인이 죄질이 무겁다고 판단한 것이다.

반대로 검찰의 구형과는 달리 무죄가 선고되는 경우도 있다. 검찰은 2009년 초 인터넷 논객 ‘미네르바’를 기소했다. 검찰은 미네르바가 “정부의 환율정책 수행을 방해하고 우리나라 대외적인 신뢰도를 저하시키는 등 공익을 해할 목적으로 인터넷으로 공연히 허위 통신을 하였다”고 보고 징역 1년 6개월을 구형했다. 하지만 서울지방지법은 “미네르바가 고의로 허위사실을 게시했다고 보기 힘들며 그의 글이 공익성을 위반했다고 인정되지 않는다”며 무죄를 선고했다.

위의 두 사건은 검찰과 법원의 유무죄 판단이 항상 같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검사의 구형이 의견에 불과한 반면, 판사의 선고형은 실제 형량을 뜻한다. 즉, 현재 보람상조그룹 최 모(52)회장은 아직 ‘선고형’을 받지 않았다. 실제 징역을 될 지 안될지는 마지막 판결 이후에 정해질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책을 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생활법률 상식사전

김용국

위즈덤하우스 2010.01.22


조애리 기자 (joaeri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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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 '보수적 사회'라고 하면 여성에게 정숙과 절제를 요구하고, 성적인 어필을 억압할 것 같은 이미지가 있다. 특히 양갓집 규수들이 외출도 마음대로 못 했던 조선시대 후기라면 더욱 그럴 것 같다. 하지만 실제는 다르다. 통념과는 반대로, 조선 전기에서 후기로 가면서 사회가 보수화될수록 여성 한복은 점점 에로틱한 실루엣을 갖게 된다.

 조선 전기와 후기 여성의 복식. 조선 전기의 상하 1:1 비례, 
 H-실루엣에서 후기 상박하후의 실루엣(기녀의 삼회장저고리)으로의 변화를
극명하게 볼 수 있는 그림. ⓒ소나무

여성의 지위가 남성에 못지 않았으며 외출도 자유로웠던 조선 전기, 여성 한복은 저고리의 길이가 길고 속옷이 단촐해서, 겉보기에는 밋밋했지만 활동하기는 편했다. 하지만 유교가 서민 생활 깊숙이 자리 잡게 된 조선 후기에는 상황이 달라졌다. 여성은 폐쇄·억압된 사회 속에서 경제권과 독립적 지위를 잃고 남자에게 의존해서 살아가게 되었다. 그러면서, 스스로의 활동능력보다는 남자에게 어떻게 보이느냐가 더 중요한 문제가 되었고 이에 따라 여성의 복식은 이성에게 좀 더 매력적으로 보이기 위한 도구로 발전하게 된다.
저고리는 작고 몸에 꼭 맞게 변해 여성의 상체를 가녀리고 앳되어 보이게 하고, 풍성한 치마와 대조를 이루어 한층 에로틱한 실루엣을 만들었다. 머리엔 검고 큰 가체(加髢)를 얹어 풍성하게 만든 후 갖은 보석으로 장식했는데, 이 역시 하얀 피부, 가녀린 상체를 돋보이게 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 후기 여성의 가체, 단소화된 저고리.
여성 복식에 에로틱한 면이 강조된다. ⓒ소나무

이러한 실루엣을 내기 위하여 각종 속옷이 발달하게 된다. 즉, 저고리의 길이가 짧아져 허리에 입던 치마도 차츰 가슴 쪽으로 올라가고, 가슴을 더욱 납작하게 만들기 위한 허리띠(아래그림, 좌), 거둠치마(치마를 걷어 올려 속바지를 드러낸 옷)등이 유행한다. 속옷이 겉으로 드러나게 됨에 따라 속옷 바지의 배래선이 곡선으로 변하고, 바짓부리의 아래쪽을 더 곱게 누빈다든가 더 좋은 옷감을 쓰는 등 속옷의 원래 기능을 넘어서 장식적이고 보여주기 위한 옷으로 발전한다.


여성의 허리띠(가슴 가리개). ⓒ소나무



거둠치마와 장식화된 속옷 바지. ⓒ소나무



여성의 속옷바지. ⓒ소나무


전통적으로 패션은 상층 계급으로부터 하층 계급으로 전파되어 왔다. 서민들로서는 그들이 동경하는 계급의 옷을 부러워하고 따라하고 싶은 것이 당연하다. 조선 전기에는 계층 구별이 엄격해서 신분에 따라 복식 착용이 제한되었지만, 조선 후기에 이르러 경제가 발전하면서 상하 계층의 복식이 혼용되기에 이른다. 이전에 엄하게 제한되던 상층 계급의 복식을 하층 계급에서도 입기 시작한 것이다.

양반층만 입을 수 있었던 삼회장저고리를 기녀들도 입게되었고, 최상층에게만 허용되던 가체는 부유층이 늘어난 조선 중기부터 부녀자들 사이에서 폭넓게 유행하여 후기로 갈수록 그 크기가 더욱 커지게 된다. 특히 조선 후기 여자의 가체는 집 열 채를 호가할 정도로 값이 비쌌을 뿐만 아니라, 여기에 각종 금은보화로 장식한 떨잠, 머리꽂이 등을 장식하여 사치로 인한 폐단이 심했다.

이는 사회 기반 산업인 농업의 발달로 상거래가 활발해지고 경제가 활기를 띠는 과정에서 자본을 축적한 새로운 계층이, 본인의 부를 과시하기 위해 신분 질서로 제한되어 있는 계급의 한계를 극복하려고 하면서 일어난 현상으로 보인다.

반면에 상향 전파도 동시에 일어난다. 천한 신분인 기녀들의 복장을 상류층도 입게 된 것이다. 사회가 풍요로워지면서 사람들의 미(美)에 대한 욕구도 높아졌다. 동시에, 유교 사회의 보수적 분위기 때문에 생활에 자유가 없었던 양반 계층 여성들은, 별 제재 없이 맘껏 멋을 내며 자유로운 생활을 누렸던 기녀들의 복식을 동경하여 모방했다.

그 가장 대표적인 예가 거둠치마이다. 원래 노동을 위해 치마를 걷어 입던 하층 계급의 입음새가 남성들의 시각을 자극하기 위한 도구로 변형되고, 이것이 다시 상층 계급까지 유행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여성 복식에 에로틱한 면이 강조된다. ⓒ소나무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한국문화는 중국문화의 아류인가

최준식|윤지원|이춘자|허채옥|이강민

소나무 2010.06.25


정다운 기자 (
dawn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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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7월 14일 통계청에서 발표한 고용 동향을 살펴보면, 한국 총 실업률은 3.5%이지만, 청년 실업률은 그 2배 이상인 8.3%에 달한다. 88만원 세대, 낙바생(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듯 어렵게 취업하는 졸업예정자), 이태백(20대 태반이 백수) 등의 신조어에서도 이러한 청년층의 취업한파가 그대로 느껴진다. 그러나, 이런 청년층 중에서도 취업 한파를 더욱 심하게 느끼는 계층이 있다. 바로 “순수 인문”을 전공한 학생들이다.
 



                           <취업 포털 사이트 ‘잡 코리아’에 올라온 4년제 대학 졸업생을 대상으로 한 모집 공고들>

취업 포털 사이트에 올라온 모집공고들을 보면, ‘상경계열 전공자’를 뽑는다는 글은 있어도 ‘인문계열 전공자’를 뽑는다는 글은 거의 볼 수 없다. 

표면적으로 보았을 때, 인문대학을 졸업하고 나서 할 수 있는 일은 매우 제한되어 있다. 역사학 분야를 예로 들어보자. 박사과정 졸업 후 취업할 수 있는 대표적인 길은 물론 교수가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교수직이 충분히 많지 않으므로 결국 일부는 다른 직종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자기 전문 분야를 살리면서 취직할 가능성이 그리 크지 않다. 

공학 분야 같은 경우 굳이 대학이 아니라도 연구소나 일반 기업에 들어가서 자신의 전공을 살리는 것이 얼마든지 가능하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인문학 전공자들은 40대 중반이 되도록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느라 고생하며 모멸을 감내하는 경우도 있다. 

취업시장에서 ‘인문대생’이 느끼는 체감온도는 다른 전공자들에 비해서 훨씬 더 낮다. 그러나 정말 '인문학’ 전공이 취업에 불리하기만 할까? 대기업 임원, 방송국 PD, 금융권 임원들 중에서 ‘인문학’을 전공한 사람들이 많다. 그들은 ‘인문학’을 전공한 것, ‘인문대’를 졸업한 것이 실무에 더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현 코오롱 신사업기획팀의 이수영 상무에게 ‘인문대생의 강점’에 대해 물었다.

 
Q: 인문대생이 회사에서 가지는 강점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A: 인문대생이 가지는 강점이 굉장히 많다고 생각해요.
'인문'이라는 게 인간에 대해서 공부하는 거잖아요. 저도 그런 의미에서 책을 많이 읽고 세미나를 하고 그랬던 것 같구요. 그래서 스스로 생각하는 능력, 어떤 사물을 바라볼 때 사고의 깊이와 폭, 이런 것들이 인문대를 다녀서 더 많이 훈련된 게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Problem Solving이라고 하죠? 매일매일 해결해야 하는 어떤 문제들이 있습니다.
특히나 회사는 매일매일 의사결정을 해야 하는데 그때 정확하게 큰 그림으로 보고 그다음에 깊이 있게, 정확하게 근본적인 핵심 이슈에 대해서 빨리 파악해서 해결하는 능력이 굉장히 많이 요구되죠. 그런 사고 능력,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기 위해서는 인문학이 아주 많이 필요하지 않나 생각하고, 위로 올라가면 갈수록 더 그런 것 같아요. CEO들에게 "어떤 책을 읽느냐"고 물으면 경영학 책을 읽는다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하고 역사책, 철학책, 소설책 이런 것들을 읽는다고 하죠.
 
Q: 딱 원하는 인문학 전공자의 상이 있다면 어떤 것입니까?
 
A: 문제해결 능력을 가진 사람이에요.

경영에서 요구하는 능력은 리더십하고 창조적 사고 능력이에요. 왜냐하면 나 혼자는 일을 못하거든요. 여러 사람들이 같이 해야만 되는 것이고, 나 혼자 하면 천년만년이 돼도 못합니다. 조직, 즉 여러 사람이 같이 일하는 조직에서 여러 사람들을 한 방향으로 끌어주는 능력, 그게 리더십입니다.
 
매일매일의 문제를 해결해 나가야 하는데 "이것은 이런 규정이 있어서 안 됩니다"라고 얘기를 하면 그건 문제를 푸는 것이 아니겠죠. "이런 부분들을 고려해서 이렇게 보면 이렇게 해결할 수 있잖아요"라고 이야기를 해줘야죠.
 
그게 바로 창의성입니다. 회사에서 원하는 인간상은 리더십하고 창의성인데 그게 있어야 문제가 해결되고, 문제가 해결이 되면 사업이 만들어지는 것이니까요. "이것은 안 돼"라고 하는 것이 '되도록' 만드는 게 사업이라는 거죠.
 
리더십과 창의성은 사람을 많이 만나고 사람에 대해서 더 많이 안다는 것을 뜻합니다. 나 혼자 일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들을 일하게끔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해 나갈 수 있는 인문학적 능력을 가진 사람이 와서 그런 부분들을 잘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회사에서 가장 원하는 사람이죠.


즉 기술적 능력만이 아니라 인문학적 능력도 충분히 회사에서 쓰임새가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인문학적 능력은 토익점수나 자격증같이 눈에 보이는 것은 아니다. 사회에서 필요로 하는 인문학적 능력은 어떻게 길러질까?

인문대 출신(불어불문학 전공)으로서 금융계에 진출, 외환은행 부행장과 해외사업본부장까지 지낸 노찬 이수화학㈜ 상임고문은 사회 진출을 생각하는 인문대생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사회가 원하는 인문대생, 갖추어야 할 자질이 있다
 
우선 대학시절에는 전공에 충실해야 한다.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전공에 올인해야 한다. 그것이 사회에 나가서 쓸모가 있을지 없을지를 미리 속단하는 것은 큰 잘못이다. 인생은 지금 20대의 여러분이 상상하는 대로 전개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전공에 충실하지 않은 인문대생은 그 가치가 떨어진다
어느 회사에서 독일 현지법인에 파견할 직원을 뽑은 일이 있었다. 그래서 독문과 출신의 직원이 응모를 했는데 "독일어 시 하나를 암송해보시오"라는 요구를 받았다. 그런데 그 직원은 단 한 편의 시도 암송하지 못했다. 이 대목에서 여러분이라면 어떤 인상을 받았겠는가? 연이어 물어보니 단지 독문과를 졸업했을 뿐이지 독일어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독일의 문화를 잘 이해하는 것도 아니고 결국 무늬만 독문과 출신이었다. 그렇다면 굳이 독문과 출신을 보낼 필요 없이 경영대 출신 중에서 독일어를 조금 할 수 있는 직원을 보내면 되는 것이다.
 
둘째, 외국어 서적을 최소 1만 페이지는 읽어야 한다. 

 
1만 페이지라고 하면 언뜻 그 분량이 잘 와 닿지 않을지 모르나, 300페이지짜리 책 33권으로 대학 4년 동안 1년에 8권 정도 읽는 셈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인문대 졸업생 중에는 1만 페이지는커녕 1,000페이지도 읽지 않고 졸업하는 학생이 상당수 있으며 심지어는 500페이지도 채 읽지 않고 졸업하는 학생을 본 적도 있다. 이런 학생들은 인문대를 졸업했다고 하더라도 인문대 출신이라는 장점을 포기했다고 할 수밖에 없다. 이는 최소한의 권고량이다.       

                 
                   <다양한 분야의 외서들>
 

셋째, 목표를 정하고 일정한 금액의 돈을 모아보기를 권한다.
인문대생은 공부하는 분야의 특성상 돈, 경제, 경영과는 아무래도 거리가 있다. 그뿐만 아니라 돈을 주제로 이야기하기를 썩 즐기지 않는다. 돈에 관한 이야기를 하면 뭔가 통속적이고 저급한 주제로 느끼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인문대생도 경제, 경영과 가까워져야 한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결국은 경제활동을 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이다. 인문대생이 경제나 경영과 가까워질 수 있는 방법 중 하나가 돈을 모아보는 것이다.

물론 "나는 등록금도 내가 벌어서 학교도 간신히 다니는데 무슨 돈을 모아 보란 말이냐?"라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바로 당신 같은 경우야말로 돈을 모아보아야 한다"라고 말해주고 싶다. 자신의 부유하지 않은 환경에서 벗어나려면 돈과 정면승부를 해야 하며 대학시절의 경험은 그것이 실패의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평생 재산이 되기 때문이다.


현재 우리 사회는 실용만을 강조하고 있다. 대학조차도 취업률로 평가하고 있는 실정이다. 따라서, ‘순수 인문’을 전공한 대학생들이 상대적으로 위축될 수도 있다. 하지만, ‘인문대’만의 장점을 살려 취업을 준비한다면, 바늘구멍 같다는 취업문도 좁기만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인문의 스펙을 타고 가라

이동진|주경철|표민수|이수영|노찬

사회평론 2010.05.12


조애리 기자 (
joaeri80@gmail.com)




신고

PISA 1위국 핀란드의 전 교육청장, 에르끼 아호 교육을 말하다
개혁에는 지속적이고 일관된 리더십이 필요... 교사 평가제도에 의존해선 안돼

지난 7월 1일과 2일, 전국에서 새로 당선된 교육감들의 취임식이 열렸다. 직선제가 시행된 이래 두번째로 탄생하는 교육감이다. 지난 임기 교육감이 선거와 업무수행 양쪽에서 비리와 오류를 보여준 사례가 있기에 새 교육감들의 어깨는 더욱 무겁다.
새 교육감들이 해결해야 할 문제는 한두가지가 아니다. 고질적인 문제가 되어 있는 수험 위주의 학습체제, 학생인권문제도 해결해야 하지만 학생들의 학력 향상도 소홀히 할 수 없다. 한국과 같은 무한 경쟁사회에서, 공교육을 통해서도 학생들의 학력을 유지할 수 있다는 신뢰를 쌓지 못하면 사교육 문제는 해결할 수 없다. 전인교육과 성적향상, 얼핏 보기에는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과제이다.

하지만 이 두 마리 토끼를 당연하게 잡고 있는 나라가 있다. 바로 핀란드. 유럽 변방의 작은 나라지만 3년마다 시행되는 PISA(국제학생성취도평가)에서 항상 종합 1위를 놓치지 않는다. 학생들의 자발적인 학습 의욕도 높다. 특히 놀라운 점은 핀란드 학생들이 상위권 성적을 차지할 뿐 아니라 고득점자와 저득점자의 점수 차도 세계에서 가장 작다는 것이다. 사교육이나 기타 교육 지원을 받는 학생과 그렇지 못한 학생 간의 격차가 큰 우리나라와는 달리, 핀란드는 전국의 학생들에게 양질의 공교육을 제공하는 시스템을 확립하고 있다는 뜻이다. 항상 교육개혁을 말하면서도 십 수 년 째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는 우리나라로서는 부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2008년 핀란드 교육박람회 EDUCA 현장에서의 인터뷰를 통해, 20년간 핀란드 교육청장을 맡으며 핀란드의 교육개혁을 주도한 에르끼 아호(Erkki Aho)를 만나보자. 에르끼 아호는 교사로 출발하여 대학에서 교육심리학을 연구했으며, 1972년부터 1991년까지 핀란드 교육청장을 맡아 핀란드의 교육개혁을 계획하고 직접 실행에 옮긴 핵심 인물이다. 


"우리는 모든 개혁추진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형평성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에르끼 아호(Erkki Aho, 핀란드 전 국가교육청장) 인터뷰
대담: 안승문(스웨덴 웁살라대학 객원연구원)
일시 및 장소: 2008년 1월 25일, EDUCA 2008 교육축전 현장(헬싱키 컨벤션 센터)


안승문(이하 안): 우선 에르끼 아호 선생님의 경력을 간단히 말씀해주시지요.

에르끼 아호(이하 아호): 간략하게 말씀드리자면, 저는 종합학교 교사로 시작했습니다. 그 후 수년간 이봬스킬라 대학에서 연구원으로 근무했습니다. 그 후 라하티 시에서 학교 심리사로 근무하다가, 1960년대 중반 헬싱키 소재 국가교육청으로 자리를 옮겼습니다. 교육청에서는 종합학교 제도의 시범 실시를 담당했습니다. 그 후 잠시 교육부 장관을 역임하고 다시 1970년 교육청으로 복귀하여 1973년 국가교육청장에 임명되었습니다. 중앙정부 개혁이 시작된 1991년까지 교육청장으로 근무하다가 은퇴한 뒤에는 유네스코와 짧은 기간이지만 세계은행 등에서 여러 프로젝트에 대한 컨설팅을 했습니다. 지금은 은퇴한 지 오래됐고, 주변 정세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고 글을 쓰곤 합니다.


안: 핀란드에는 국가 교육 행정기관으로 교육부와 국가교육청이 있습니다. 이 두 기관의 관계와 역할에 대한 설명을 부탁드립니다.

아호: 교육부는 입법준비, 교육전략 계획수립, 교육연구 개발계획, 교육부문 예산편성을 담당합니다. 교육청은 중앙정부의 전문적인 교육담당기관으로 커리큘럼 및 학습자료의 개발, 교사 재교육 등을 담당하고 지방자치단체의 업무를 지원합니다. 그래서 교육부는 정치적 차원에서, 국가교육청은 전문적인 차원에서 명확한 업무분담을 이루고 있습니다. 물론 두 기관은 긴밀히 협조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국가교육청은 계획수립, 예산편성, 전략수립 등에서 교육부를 지원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국가교육청이 단독적이거나 독립적인 정책을 갖고 있지는 않습니다. 또한 국가교육청은 본 행사에서도 볼 수 있듯이, 국가 차원의 네트워크뿐만 아니라, 유럽연합의 회원국으로서 국제적인 교육 네트워크의 일부를 구성합니다.


안: 핀란드 학교교육의 목표를 간략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아호: 간략히 말씀드리자면, 핀란드 학교교육의 목표는 경제적 측면에서 인력을 양성하는 것뿐만 아니라 도덕성, 사회성, 심미적 안목, 윤리의식 등 한 인간의 전반적인 개발을 지원합니다.

또한 교육의 목표가 자국 문화 및 타국 문화를 이해하고 다른 문화 간의 협력을 도모하는 문화적 인간을 기르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에서는 문화 간 교류가 활발한 만큼 이 점이 중요합니다. 핀란드는 특히 단일 문화국이어서 타 문화권 사람들, 타 문화를 접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문화적인 인간을 양성하는 것이 우리 교육의 목표이기도 합니다.


안: 핀란드에서 해마다 열리는 교육축전인 EDUCA 2008이 있는 날, 핀란드 교육개혁의 산 증인이신 에르끼 아호 선생님을 만나뵈니 더욱 반갑습니다. 우선 EDUCA 2008에 대해서 간략하게 소개해주시죠.

아호: EDUCA 2008은 핀란드에서 해마다 개최하는 교육축전이자 현직 교사들을 위한 심화연수 프로그램의 하나입니다. 지금처럼 이렇게 대규모 행사가 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상당히 긍정적인 경험들을 해왔기 때문에 앞으로도 하나의 전통으로 이어갈 것 같습니다.

교사, 학습자료 및 교재를 만드는 출판업자 등이 이곳에서 서로 만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행사는 현직 교사, 연구원, 출판업자, 모든 교육관계자들이 네트워킹을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핀란드 곳곳에서 소규모 행사들도 개최되지만 본 행사는 전국 규모의 가장 중요한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프로그램에서도 보실 수 있듯이, 매우 흥미롭고 다양한 주제가 다루어지는 것도 장점입니다. 이 행사에서 교사들은 열심히 배우고, 비용 같은 것들은 지방자치단체에서 지불합니다. 이 행사는 계속해서 발전해왔고, 이미 핀란드에서는 전통으로 굳어진 행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안: 핀란드가 본격적인 교육개혁을 추진하게 된 역사적·사회적 배경은 무엇이었습니까?

아호: 먼저, 1950년대 말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당시 핀란드는 농경사회였습니다. 하지만 그 후로 급격한 변화가 시작되어, 경제구조면에서 산업 및 서비스부문이 증가하고 농업 종사자는 감소했습니다. 이 같은 경제구조의 변화와 더불어 핀란드 경제가 서방경제에 통합되어갔습니다.

1962년 핀란드가 유럽자유무역연합에 가입하면서 시장은 더욱 개방되었습니다. 우리는 국제 경쟁에서 우리의 능력을 증진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이것이 교육개혁을 추진하게 된 경제적 측면의 중요한 이유입니다.

둘째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은 모두 형평성을 매우 중요한 가치로 여기는 복지국가 건설을 시작했습니다.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국가들 중 하나인 핀란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때까지 핀란드의 교육제도는 독일처럼 조기에 인문 또는 직업학교로의 진학을 구분하는 제도였는데, 그렇게 11년의 교육기관을 거치면 학생들이 극단적으로 양분되었습니다. 이것은 민주적인 제도가 아니었지요. 그래서 좀 더 민주적인 학교제도를 마련할 필요성이 강하게 제기되었습니다.

요컨대, 첫 번째 이유는 경제적인 측면으로, 경제구조가 변화하면서 수준 높은 교육을 통해 산업 및 서비스 분야에서 종사할 수 있는 인력 양성이 필요했다는 것이고, 두 번째 이유는 복지국가 건설과정에서 민주주의와 형평성의 가치가 더욱 중요해진 것입니다. 이에 따라 1960년대 중반에 핀란드 의회가 종합적인 시스템에 바탕을 둔 민주적인 학교제도를 도입해 차별적 교육에서 벗어날 것을 결정했습니다.

여기서 교사들의 미래와 관련하여 한 가지 지적하고 싶은 점이 있습니다. 구조적인 교육개혁을 단행할 때에는 교사들이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배려와 교사들의 적극적인 의지가 매우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저희는 먼저 구 제도 속의 모든 교사들이 아무런 전제조건 없이 새로운 제도로 옮겨갈 수 있게 했습니다. 즉, 교육제도의 개혁과 병행하여 교사조직을 개혁한 것입니다. 이렇듯 교사부문에서의 발전을 지원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했습니다. 그로 인해 강력한 단일 교사 조직과 개혁에 대한 협상도 하고 계획도 세울 수 있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안: 핀란드 교육개혁 추진 과정의 특징이나 교육개혁을 추진하면서 지향했던 중요한 가치를 든다면 어떤 것입니까?


아호: 핀란드는 1970년대 초반부터 새로운 제도를 도입하기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중앙집권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국가교육청 및 교육부에서 도입계획을 수립했고, 5년에 걸쳐 핀란드 전역에서 새로운 제도를 실시할 수 있도록 했습니다. 개혁은 북부지역부터 시작했습니다. 정치인이나 관료들이 개혁이 가장 필요한 곳이 인구가 희박한 북부지역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헬싱키는 새로운 제도를 마지막으로 도입한 도시였습니다. 즉, 라플란드지역(북유럽 최북부지역)에서 시작해서 5년에 걸쳐 점점 남쪽으로 내려오면서 마지막으로 헬싱키에서 새로운 제도를 도입한 것이죠.

그래서 전국적으로 새로운 제도를 실시하게 된 때는 1977년이었습니다. 처음에는 중앙집권적으로 개혁을 추진하다가 전국이 새로운 제도를 받아들인 뒤로는 의사결정능력을 점차적으로 지방자치단체, 단위 학교, 교사들에게 이양하였습니다. 그렇게 한 이유는 좀 더 근본적인 사회개혁 및 교육개혁을 단행할 때에는 우선 중앙정부가 주도하여 추진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개혁과정에서 직면한 가장 어려운 과제를 어느 정도 해결한 뒤에 점차적으로 의사결정권을 지방자치단체와 학교에 넘긴 것이죠.

그러던 중, 1990년대 초에 핀란드가 매우 심각한 경제불황을 겪게 되었습니다. 모든 지방자치단체와 학교가 이 중요하면서도 심각한 경제불황의 위기를 극복해야 했던 것이죠. 그때 그들은 예산삭감을 비롯해 최상의 조치를 취할 능력이 충분히 있음을 보여주었습니다. 동시에 국제평가의 결과에서도 볼 수 있듯이, 우리는 좋은 결과를 도출했고 형평성의 가치와 개혁조항들을 그대로 유지했습니다.
전반적인 개혁과정의 중심에는 항상 형평성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초기에 중앙에서 개혁을 추진하고 점차적으로 지방자치단체와 단위 학교로 의사결정권을 이양하는 과정을 거쳤습니다. 그리고 모든 개혁추진 과정에서 민주주의와 형평성의 가치를 강조했습니다.


안: 핀란드가 추진한 교육개혁이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좋은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가장 중요한 원인이나 배경에 대해 말씀해주십시오.


아호: 먼저, 9년제 종합학교 제도의 도입입니다. 종합학교 제도는 1학년에서 9학년까지의 모든 학생들이 어떤 차별도 없이 균등하게 교육받을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으로 매우 포괄적입니다. 종합학교는 완전한 무상교육으로, 학생들에게 점심급식과 통학수단 제공은 물론 사회적, 물리적, 심리적 지원 및 상담을 제공하는 등, 진정으로 우리 어린 학생들의 전반적인 발달을 위해 최대한 지원하는 제도입니다. 종합학교라는 제도는 핀란드 교육성공의 으뜸요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둘째는 수준 높은 교사들입니다. 핀란드에서는 모든 교사들이 석사과정까지 밟기 때문에 교육수준이 매우 높다고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교사들을 믿을 수 있고 평가를 통한 통제나 외부로부터의 통제에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 말은 즉, 교사들이 창의적인 해결책을 강구할 여유를 갖게 되고, 개인적으로 또는 학교 차원에서 함께 협력하여 해결책을 찾게 된다는 말입니다. 우리나라의 교사들은 내년 봄(학년말)엔 또  어떤 평가를 받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이 점 또한 매우 중요합니다.

셋째는 지속적인 리더십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개혁을 시작하면서 우리는 형평성, 민주주의, 사회적 책임이라는 매우 견실하고 연관성 있는 목표를 명확하게 수립했고, 국가와 지방 차원, 지역사회와 학교 차원에서 개혁을 추진하면서 이 목표를 일관성 있게 지켜왔습니다. 단순히 오늘날의 핀란드 교육제도만 보고, 우리가 좋은 학교를 갖추고 있고 학교에서 훌륭한 식사를 제공한다는 정도로는 제대로 된 설명을 할 수 없습니다. 좋은 교육을 위한 토대는 1950년대, 1960년대, 1970년대에 걸쳐서 꾸준히 마련되어온 것이고 오늘날의 좋은 결과는 그처럼 오랜 과정을 통해 얻어진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 지속적인 리더십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우리는 혁명이 아니라 진화를 만드는 것이라고 말하곤 했습니다. 그래서 교사들은 항상 과거의 좋은 전통과 새로운 혁신을 접목하고자 했습니다. 이렇게 진화적인 발전, 진화적인 과정을 지향한 것이지요. 한편으로 보면, 좀 보수적인 접근법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항상 좋은 전통을 배우고자 해왔으니까요. 이렇게 좋은 전통을 익히고 학교에 적용해보면서 전통과 새로운 것을 접목한 것입니다. 즉, 급격한 변화보다는 전통과 혁신을 함께 추진해왔다는 점이 중요한 요인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연히 정치 차원에서의 강력한 합의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핀란드는 작은 국가이고 보유자원도 별로 없습니다. 우리가 갖고 있는 자원은 모두 여기 우리 머릿속에 있죠. 나라 안에 있는 쓸 수 있는 모든 지적 자원을 활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모든 정당들이 적극적으로 교육개혁을 지원했습니다. 물론,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토의와 논쟁도 있었고 자원이 부족하여 어려움도 있었지요. 하지만 의회 및 정당들 모두가 잘 교육받은 인력을 기르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추구해야 할 목표임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개혁을 지원했습니다.


안: 한 나라의 교육개혁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교사들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합니다. 핀란드의 경험에 비추어, 교사들이 신뢰와 존경을 받는 가운데 책임 있는 교육개혁의 주체가 되기 위해 해야 할 일은 무엇이라고 보십니까?

아호: 핀란드에서 교직과 교사에 대한 존경심이 깊은 이유를 이해하려면, 먼저 핀란드 교육제도의 역사에 대해 설명드려야 합니다. 우리 핀란드에서는 항상 교사를 존경해왔습니다. 작은 시골도시에서 교사들은 매우 중요한 존재였고, 도시에서도 초등학교 교사는 대단히 신망받는 존경의 대상이었습니다.

1960년대 중반에 개혁을 시작했을 때 정치인과 우리 모두는 9년 과정의 종합학교가 교사들에겐 큰 도전이 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학교제도의 개혁과 동시에 교사양성제도의 개혁도 단행했습니다. 즉, 1960년대 중반 교육구조의 개혁을 시작할 때, 교사양성제도에 대해서도 더 높은 수준의 교육을 목표로 한 것입니다. 교사가 신뢰와 존중을 받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은 교사들이 수준 높은 전문성을 갖춰야 한다는 것입니다. 교사의 교육수준이 다른 직종 사람들보다 낮다면 이런 존경을 받기 어려울 것입니다. 따라서 교사들에게 높은 교육수준을 갖게 하는 것이 첫 번째 핵심 사항이라고 하겠습니다.

두 번째 핵심 사항은 종합학교로의 개혁 같은 교육개혁을 계획할 때, 정치인들이 교원단체와 긴밀하게 협의했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교사들이 개혁과정에 동참할 의지를 갖게 됐고 교육개혁을 바로 자신들의 개혁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더 나은 학교제도를 만드는 데 있어서 교사 자신들도 개인 차원에서 이 과정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고 느끼게 된 것이지요. 다른 나라에서도 어떻게 하면 교직에 대한 존중과 교사에 대한 신뢰를 높일 수 있을지를 고민한다면, 교육개혁을 계획하는 단계나 교육과정의 개정 또는 학습자료의 개발 등 모든 개혁 추진과정에 교사들의 지식을 수용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 번째 핵심 사항은 평가제도에 의존하지 않는 것입니다. 평가제도나 통제 수단을 사용하면 교사들의 마음은 항상 평가에 대한 걱정으로 가득 찰 것이고, 평가결과를 급여와 연계한다면 재앙에 가까운 결과를 낳을 것입니다.
핀란드에서는 교사들의 급여수준이 충분히 높아야만 교사양성기관(대학)에서 더 능력 있는 젊은이들을 모집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이유로 핀란드에서는 정부가 법과 규제로 교사급여를 결정하지 않고 교사조직과 지방자치단체 간의 협상과 합의를 통해 결정하게 함으로써, 교사들이 자신의 급여수준에 영향을 미칠 수 있게 했습니다. 즉, 자신의 급여수준을 결정하는 과정에도 참여한 것이지요. 급여란 매우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1970년대 초반에 교육제도 개혁의 초창기에는 정부가 급여를 결정했지만, 교육제도를 개혁하면서 이와 연계하여 교사조직과 지방자치단체의 합의 아래 급여를 결정하도록 바꾸었습니다.

결론적으로 말씀드리자면, 가능하면 교육과 관련된 모든 분야의 개혁과정에 초기 단계부터 교사들을 동참시켜야 합니다. 그래야 교사들이 개혁 추진 과정의 일부가 될 의지를 갖게 됩니다. 이것이 또한 부모들이 안심하고 교사들에게 자녀를 맡기고 교사들이 좋은 교육을 제공할 것이라고 믿는 신뢰의 바탕이 됩니다. 또, 부모들도 시간 날 때마다 교사들에게 연락하여 자녀에 대해 의논합니다. 정치인들 역시 교사들을 신뢰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학교에 예산을 제공할 때 교사들이 최적의 방법으로 예산을 쓸 것이라고 믿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듯 수많은 단계에서 교직 및 교사들의 전문적인 능력을 최대한 존중하게 할 수 있으며, 꼭 그렇게 해야 합니다.
감사합니다.

안: 긴 시간 동안 인터뷰에 응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앞으로, 핀란드와 한국의 교육자들이 자주 만나고 교류하면서 함께 새로운 교육을 만들어갈 수 있기를 기대하겠습니다.


<이 기사는 한울림출판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핀란드 교육개혁 보고서

에르끼 아호|까리 핏까넨|파시 살베리|강수돌|심상정 | 김선희 옮김

한울림 2010.05.31


이진의 기자 (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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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도는 커피 마시지 말라고? 커피와 부의 역사
커피 상인은 17c에도 부동산 부자.. 교역으로 막대한 부 쥐어

시내를 걷다 보면, 전철역 앞이나 사거리 같은 노른자위 땅마다 어김없이 스타벅스, 커피빈 등의 커피전문점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얼마나 돈을 많이 벌기에 저런 위치에서 장사를 할까 싶기도 하다. 오늘날 커피산업의 규모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스타벅스와 같은 다국적 대기업은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막대한 부를 긁어모으고 있다.

그런데 사실, 커피 사업자들이 부자인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300년 전 과거에도,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유럽 등지에서 커피 교역을 하는 커피 사업자들은 제일가는 부동산 부자였다.

커피의 어원은 아랍어 ‘카화’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지만, 세계로 전파된 것은 아라비아를 통해서다. 유럽이 한창 중세의 미몽에 빠져 있던 13세기, 아덴 만을 사이에 두고 에티오피아로 건너편에 자리 잡은 예멘 항구 아덴은 이미 커피 집산지였다. 예멘은 인도양과 홍해,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를 잇는 교역의 십자로다. 예멘에 전해지면서 커피나무 열매는 '분(Bun)', 음료인 커피는 '카화(Qahwah)'라고 불리게 된다. '카화'가 커피의 어원이다. 무슬림에게는 음주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티오피아에서 커피가 건너오자 음료로 곧 환영을 받았다. 카이로의 수피들은 커피의 각성 효과에 주목하고 철야 기도 때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북상하여, 1554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세계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출현한다. 이 시대에 이집트에서 커피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습관이 시작되었고, 커피는 오스만 제국을 거쳐 프랑스로 전해졌다.

커피는 유럽에서 한때 일부 기독교도의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무슬림 음료'라며, 판매 금지 조치를 해달라는 청원이 로마 교황청에 접수된 것. 교황 클레망 8세는 이에 대해 1600년 기독교도들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집트 최고 부동산 소유자는 커피상인

오랫동안 이집트 국부의 근원이었던 인도에서 오는 향신료 독점 무역이 대항해 시대를 맞아 무너지고, 커피는 17세기 이를 대체하는 교역품이 되었다. 커피는 피륙과 함께 이집트의 당시 양대 무역 물품이었고, 이에 종사하는 상인의 수는 17,18세기에 500~600명이었다. 이들 상인은 이집트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1679년에서 1700년 사이에 카이로의 등기부에 오른 168건의 부동산 중에서 커피 상인 80명의 부동산이 전체 부동산 가액의 64%를 차지할 정도였다. 18세기 초반 최고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커피 상인이었다. 커피 상인 카심 알 샤라이비(Qasim al-Sharailby)의 보유 부동산은 시세가 884만 9660파라였다. 카심 알 샤라이비는 커피 상인연합회 수장이었는데, 1734년 죽었을 때 그의 재산 규모는 강력한 장군들의 재산과 비교해도 상당한 규모였다고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앙드레 레이몽은 말했다. 카심의 장례식에는 모든 고위직 마믈룩(권력을 가진 복속민. 무사계급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이 조문을 했다고 하니, 대상인의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당대 최고 권력자 우스만 캇크후다(Uthman Katkhuda al-Qazdaghli)는 애도를 위해 장지까지 걸어서 장례 행렬을 따라가기도 했다.

커피 상인 중에는 외국인도 많았다. 1776~1798년에 섬유와 커피 무역에 종사하는 무역상은 142명이었고, 이 중 44%인 63명이 외국인이었다. 이들은 전체 부의 44%를 쥐고 있었다. 이집트의 개방성에,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면서 카이로의 무역 집산지 기능이 강화된 탓이었다.


궁전 같은 집 짓고 황제처럼 호화로운 생활

나폴레옹이 카이로를 점령하고, 1798년 12월 수에즈에 갔을 때 카이로 상인들이 일부 수행했는데, 상인들은 최소 8명의 하인을 데리고 왔다. 하인 한 명은 주인의 물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커피를 끓였으며, 세 번째 하인은 천막을 책임지는 식이었다. 한 상인은 나폴레옹 장군의 수행원이 단출함에 놀라 "하잘것없는 무역상인 나도 11명의 하인이 도와주는데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 단 세 명의 시중을 받고 있다니"라고 말했다.

17세기 후반의 커피 무역 붐은 카이로의 건축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일부 상인이 지은 집은 작은 궁전과 같아, 19세기 초 통치자 무함마드 알리는 이들의 집을 외빈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무역 붐에 따라 대상 숙소도 속속 새로 들어섰다. 6개의 대상 숙소가 1699~1702년에 세워진다. 18세기 가장 두드러진 커피 상인이었던 무함마드 알 다다 알 샤라이비는 칸 알 함자위 시장 인근에 대상 숙소를 지었다. 큰 문을 열고 들어가면 1층에는 14개의 점포가 있었고, 그 위로 3층까지는 숙소였다. 대상 숙소는 대개 4층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데, 1층에는 상점이 있고, 그 위에는 숙소가 있다. 가말리야 거리에 있는 대상 숙소 '바자르 위칼라'에는 1인용 독방부터, 3개의 방을 3개 층에 걸쳐 함께 쓰는 스위트룸도 있었다.

지금도 카이로의 베인 알 카스린 거리에는 18세기의 커피 상인 무스타파 가아파르(Ga' far)의 웅장한 저택이 그대로 남아 관광객들에게 당시의 호사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향신료, 그리고 커피. 예나 지금이나 막대한 부를 가져오는 사업이 생필품이 아닌 기호품, 사치품 사업이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우리에게 막연하게나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함두릴라 알카히라

최준석

메디치미디어 2009.05.10


이진의 기자 (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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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l역사] 드라마 '동이', 진실은 이렇다

지식 2010.07.23 04:46 Posted by NewsInBook
 

장희빈하면 인현왕후를 떠올린다. 또 인현왕후 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장희빈이다. 이처럼 우리의 머릿속에는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 구도가 깊이 뿌리박혀 있다. 하지만 역사적 사실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이 구도가 당시의 여인천하를 실질적으로 대표하는 게 아님을 알 수 있다.


인현왕후 대 장희빈의 대결은 어찌 보면 매우 '점잖은' 것이었다. 왜냐하면 이 구도하에서 쌍방은 중전 자리를 차지하는 데 주력했을 뿐, 상대방의 목숨을 빼앗으려 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점은 두 여인 사이에서 벌어진 두 차례 대결에서 잘 드러난다.

숙종 15~16년에 벌어진 제1라운드의 승자는 장희빈이었다. 이 대결의 결과로 인현왕후는 중전에서 평민으로 강등되었고, 장희빈은 후궁에서 중전의 자리에 올랐다. 4년 뒤에 벌어진 제2라운드에서는 거꾸로 인현왕후가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에는 인현왕후가 평민에서 중전의 자리로 복귀했고, 장희빈은 중전에서 희빈으로 강등되었다.
 

구분

연도

승자

결과

인현왕후

장희빈

제1라운드

숙종 15~16년(1689~1690)

장희빈

폐위

중전 책봉

제2라운드

숙종 20년(1694)

인현왕후

중전 복위

희빈 강등

두 사람의 상대 전적은 1승 1패로 동점을 이루었지만, 승패로 인한 영향은 인현왕후 쪽이 훨씬 더 컸다. 제1라운드에서 장희빈은 후궁에서 중전으로 이동한 데 비해 인현왕후는 중전에서 평민으로 이동했다. 제2라운드에서 장희빈은 중전에서 후궁으로 이동한 데 비해 인현왕후는 평민에서 중전으로 이동했다. 장희빈의 이동 범주는 후궁↔중전이었지만, 인현왕후의 이동 범주는 중전↔서민이었다. 승패로 인한 충격이 인현왕후 쪽에 훨씬 더 크게 나타났던 것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두 사람의 대결이 최종적으로 어느 한쪽의 몰락으로 이어진 것이 아니라 양쪽의 공존으로 이어졌다는 점이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1패 뒤 복수의 1승을 거둔 인현왕후가 패자에게 잔혹한 쓴맛을 보여야 할 것 같지만, 실상 두 사람은 오랫동안 숙종의 처첩으로 공존했다. 인현왕후가 복위되고 나서도 장희빈은 계속해서 정1품 빈의 자리를 지켰다. 두 사람의 대결은 어찌 보면 의외로 '싱거웠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와 비교하면 최숙빈과 장희빈의 대결은 달랐다. '최숙빈과 장희빈의 대결'이라는 표현이 좀 낯설게 다가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을 정도로 두 사람 간에는 그러한 구도가 실제로 존재했다. 그리고 이 구도는 인현왕후-장희빈 구도보다도 훨씬 더 치열한 양상을 보였다.
두 사람의 대결 구도는 얼마나 치열했을까? 단도직입적으로 말해서 최숙빈-장희빈 대결 구도는 목숨을 걸고 전개된 구도였다. 선제공격을 가한 쪽은 장희빈이었다. 『수문록』에서 이들의 첫 대결을 확인할 수 있다. 최숙빈이 숙종의 승은을 입은 뒤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때였다. 이 시기에 장희빈은 곤위(중전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선대왕(숙종)이 베개에 기대어 조는 사이에, 홀연히 꿈에서 신룡이 땅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하다가 가까스로 머리 뿔을 드러내고는, 울며 선대왕에게 말하기를 "전화, 속히 저를 살려 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여기서 "신룡"은 태아를 가리키고, "땅속에서 나오고자 하되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은, 여인의 뱃속에 있는 아이가 위급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의미한다. 이상한 느낌이 든 숙종은 장희빈의 처소로 곧장 달려갔다. 최씨와도 관계를 가진 적이 있지만 장희빈이 이미 두 번씩이나 자기 아들을 낳은 적이 있기에 혹시 장희빈에게 아이가 또 생겼나 하는 느낌이 들었던 모양이다.

숙종은 장희빈의 처소에서 처음에는 별다른 것을 발견하지 못했다. 장희빈도 멀쩡했다. 그런데 담장 밑에 있는 큰 독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독이 엎어진 상태로 있었기 때문이다. "저 독은 어째서 거꾸로 세워 두었느냐?"라고 숙종이 묻자, 장희빈은 "빈 독은 본래 거꾸로 세워 둡니다."라고 대답했다. 숙종은 뭔가 이상했던지 환관에게 독을 똑바로 세우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때 다음과 같은 일이 벌어졌다.

그 속에서 결박당한 여인이 나타났다. 선대왕이 크게 놀라 살펴보니, 얼마 전 밤에 가까이 했던 나인이었다.

폐비의 생일상을 차려 놓고 있다가 숙종에게 발견되어 승은을 입은 궁녀 최씨가 바로 독 안에 있었던 것이다. 숙종은 혹시라도 장희빈이 임신했을까 싶어 그리로 달려갔던 것이지만, 실제로는 최씨의 뱃속에 아이가 있었던 것이다.

숙종이 나타나기 직전까지 장희빈은 최씨에게 어떤 신체적 고통을 가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다가 임금이 갑자기 나타나자 최씨를 얼른 독 안에 숨긴 것이다. 최씨가 인현왕후전의 나인이었던 데다가 숙종의 아이까지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자, 장희빈으로서는 어떤 형태로든 손을 봐야겠다는 판단이 들었을 것이다. 장희빈이 가한 신체적 고통은 비록 최씨의 목숨을 빼앗기에는 부족했을지 모르지만, 적어도 태아의 생명을 지우려는 시도로 보기에는 충분했다. 최씨 입장에서는 아이를 지우려는 행동이 곧 자기를 죽이려는 행동과 조금도 다를 바 없었을 것이다. 최씨 입장에서는 장희빈이란 인물이 저승사자만큼 두렵고 증오스러운 존재가 아니었을까.

 

                                         총 50부로 제작되고 있는 MBC 월화드라마 동이 속 최숙빈과 장희빈 

여기서 이런 의문을 고려해 볼 필요가 있다. 최숙빈-장희빈 대결이 그토록 필사적이었던 까닭은 무엇일까?
인현왕후는 다수 세력인 서인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장희빈으로서는 인현왕후를 중전에서 내모는 것으로 그치고 더는 공격할 수 없었다. 만약 장희빈이 인현왕후의 목숨까지 거두려 했다면, 서인은 인현왕후를 보고하고자 결사적인 태도를 보였을 것이다. 그런 이유 때문에 장희빈의 공격에는 한계가 있었다.
이 점은 인현왕후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장희빈이 비록 중인 출신이라 할지라도 그는 남인의 지지를 받는 인물이었다. 인현왕후가 복위된 뒤에 서인이 장희빈을 후궁 자리에서 완전히 끌어내리지 못한 것도 장씨의 배후에 정치 세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최숙빈-장희빈의 대결 구도는 그렇지 않았다. 최숙빈은 아무것도 가진 게 없었다. 장희빈이 처음에 최씨를 막 대했던 것은 그가 만만하게 보였기 때문이다. 또한 장희빈이 최씨에게 극단적인 행동을 한 것도 최씨를 보호해 줄 정치 세력이 없다는 판단에 따른 것이었다. 자신의 목숨을 노리는 장희빈에게 맞서기 위해 가진 것 없는 최숙빈 또한'극단적인 태도'를 취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최숙빈

김종성

부키 2010.04.30

정다운 기자 (dawn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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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사의 사탑, 언젠가 무너질까?
매해 1~2mm씩 더 기울어져... '2150년에 붕괴한다' 일부 학자들 주장

갈릴레이가 낙하실험을 했다고 해서 더욱 유명한 이탈리아의 건축물 피사의 사탑. 기울어진 탑을 보기 위해 사람들이 몰려 지금은 유명 관광지가 되었지만 이토록 신기한 탑은 세상 어디에서도 보기 힘들다. 지금도 계속 기울고 있다는 이 탑은 결국 무너지게 될까, 아닐까. 시공부터 현재까지, 피사의 사탑의 모든 것을 밝힌다.


이탈리아 서북부의 피사(Pisa)는 오랜 역사를 지닌 도시로서 아르노(Arno) 강가에 자리 잡고 있으며 바다로부터 12km 떨어져 있다. 이 도시에는 많은 고적지가 있는데 가장 유명한 곳을 꼽으라면 피사의 사탑(Leaning Tower of Pisa)을 들 수 있다. 피사의 사탑은 원래 교회당의 종루로 지어진 것이다.

1173년에 시작된 사탑 공사는 높이 58.36m에 무게가 1만 4,453톤이나 나가는 대규모로 진행되었다. 구조는 8층으로 되어 있고 각 층의 바깥쪽에는 복도가 연결되는 형식이었다. 294개의 층계가 바닥에서부터 정상까지 놓여 있는 탑 안의 나선형 계단은 건물 정상까지 이어져 있고, 정상에는 큰 종이 있다. 이 탑이 완공되었을 때인 1350년에는 본체의 중심이 수직 중심선에서 1.4m 벗어나 있었고, 그 후로 매년 약간의 차이를 보이면서 계속 기울어져 지금은 5m가 넘게 벗어난 상태다. 일부 학자들의 예상대로라면 매년 1~2mm씩 기울어져 적절한 조치를 취하지 않을 경우 대략 22세기 초가 되면 완전히 붕괴할 것이라고 한다.


피사의 사탑. ⓒ예문

재앙과 복은 함께 따라다닌다고 했던가? 이런 기울기와 편차가 의외의 이익을 가져왔다. 수많은 관광객이 앞 다투어 이탈리아로 찾아와 오히려 그곳의 주요 건축물을 외면한 채 사탑을 구경한 것이다. 인구 10만의 작은 도시 피사는 세계적으로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피사의 사탑이 유명해지면서 몰려온 관광객들은 무엇보다 그 불가사의한 모습에 넋을 잃는다. 저렇게 높은 탑이 기울어져 있으면서도 어떻게 쓰러지지 않을까? 애초에 시공을 잘못해서일까? 기술적인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보는 사람들은 누구나 이런 생각들을 하곤 한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는 당시 이탈리아 건축사가 높은 기술을 자랑하기 위해 일부러 탑을 기울여 만들었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무너질까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런 주장은 전혀 근거 없는 것이 아니어서 1982년부터 기우는 현상이 사라지고 오히려 반대쪽인 서남 방향으로 이동했다.

그러나 애초에 공사 지역을 잘못 잡았고 기반 공사를 제대로 하지 못해 기울어졌다는 것이 전통적인 주장이다. 건설 초기, 3층까지 지었을 때 남쪽으로 기울어진 것을 발견하고 할 수 없이 공사를 중단한 채 보강조치를 취했다고 한다. 이어 1272년에 공사를 재개했을 때에는 기울어진 것은 어쩔 수 없다고 판단하고 바닥 층을 기준으로 하여 수직방향으로 건물을 올리기 시작했다. 후에 두 차례의 중단과 재개의 과정을 거쳐 사탑은 1372년에야 최종 완공 되었다. 중단과 재개를 반복하면서 약 200년 동안 4대에 걸쳐 지은 결과 지금의 기형적인 형태를 갖게 된 것이다.


피사의 사탑 설계도 일부. ⓒ예문

이것이 피사의 사탑이 기울어지게 된 원인에 대해 가장 일반적인 설명이다. 피사의 사탑의 신비가 풀렸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이런 해석에 근거하여 모의실험을 해보았지만, 기울어져 있으나 무너지지 않는 탑을 지을 수는 없었다. 1934년, 피사 시는 90톤의 콘크리트를 사탑의 기반에 쏟아 부었지만 탑이 기울어지는 속도를 가속시키는 결과만 초래했을 뿐이다. 본체가 기우는 원인이 정말 기반에 있었다면 이런 결과는 생기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학자들은 피사의 사탑이 이렇게 기울어진 채 수백 년이 지났어도 무너지지 않는 근본 원인은 지질 문제에 있다고 주장했다. 피사는 먼 옛날의 퇴적층에 자리 잡고 있으며, 탑 또한 평탄치 않은 작은 언덕에 자리 잡고 있는데, 지하 암반수의 변동이 점토층의 수축에 영향을 줬다고 한다. 지하의 점토층이 압력을 받으면 그 압력에 따라 수축하기 때문에 건물이 기울어지는 현상을 초래하는 것이다. 피사에는 현재 20여 개의 탑이 있는데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모두 조금씩 기울어지는 현상을 보이고 있다. 이들이 기울어져 있지만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사탑의 밸런스가 매우 좋기 때문이다. 탑을 이루는 돌들이 서로 단단하게 결합되어 탑 전체가 일체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이는 현대적 건물 가운데 콘크리트 빌딩이 지진이 일어났을 때 부서지지 않고 빌딩 전체로 넘어지는 것과 같다. 이를 역으로 해석하면 만일 피사의 사탑 일부를 해체할 경우 균열이 생기면서 붕괴될 수 있다는 것이다.

한편, 장기적으로 지하수를 뽑아 올려 지반 침하를 가속화시켰기 때문에 건물이 기울어졌다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예를 들어 19세기 초, 한 기술자가 탑이 기우는 이유가 지하수 때문인 것으로 보고 펌프로 탑 지하의 지하수를 뽑아냈는데, 오히려 더 기우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이런 일련의 행동들이 피사의 사탑 지하 구조를 파괴했다는 것이다. 그 이후 피사의 사탑은 보다 큰 폭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이런 현상은 분명히 일부 현대 건축물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지금의 피사의 사탑도 이러한 원인으로 경사가 가속화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이것이 결코 사탑이 기울게 된 최초의 원인은 아니었다.

시간이 지나면 이 탑이 결국 무너질 것이라고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피사의 사탑이 건립된 이후 매년 1~2mm씩 경사가 진행되어 1350년에는 수직에서 1.4m정도 기울었지만, 1996년에는 수직에서 무려 5.4m나 기울어졌다고 한다. 각도로 따질 경우 2008년, 중심축으로부터 5.5도 정도 기울어져 있어 매우 위태로워 보인다. 일부 학자들은 확실한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남쪽에 가해지는 하중이 주춧돌을 파괴하게 되고 북쪽의 기둥뿌리가 뽑히면서 2150년 이전에 균형을 잃고 탑이 무너질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그 주장에 대해 중심선 주위로 흔들림이 있을 뿐 절대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고 정면으로 반박하는 학자들도 있다. 실제로 16세기에 한 건축가가 탑의 기반을 강화한 후, 기울어지는 현상이 100여 년 동안 기적적으로 멈췄고, 그 후로 경사의 속도가 크게 완화되었다. 1934년, 다시 지반에 방수처리를 한 뒤 탑은 방향을 가리지 않고 불규칙적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초조와 불안 속에 1년이 지나자 탑은 다시 원래의 방향을 회복하고 매년 1mm씩 기울기 시작했다. 적당한 조치만 취하면 얼마든지 무너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는 주장이다.

주장하는 의견들이 분분하지만 어떤 것이 맞는지는 시간이 지나봐야 알 수 있는 일이다. 이탈리아 사람들은 어서 빨리 피사의 사탑의 비밀을 파악하여, 만에 하나라도 사탑이 무너져서 자신들의 자랑이 없어지지 않기를 진심으로 기원하고 있다.


< 이 기사는 (주)예문과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

발칙한 건축학

왕리 | 송철규 옮김

예문 2009.12.05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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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07은 실존인물이었다? 영국 역사상 최고의 첩보원 다스코 포포프의 삶
어딜가나 미녀가 따르는 최고의 첩보원... 진주만 침공 예견

한때 남자들의 로망이었던 007 제임스 본드. 영화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원작은 소설이다. 저자 이안 플레밍은 영국 첩보부에서 근무한 경험을 바탕으로 작품을 썼으며, 덕택에 제임스 본드의 모델이 이안 플레밍 자신이라는 소문도 돌았다. 하지만 소설 속 제임스 본드가 워낙 팔방미인 '엄친아'인 탓에, 그런 소문을 믿기는 쉽지 않다.
그런데, 소설 속 007만큼이나 영화같은 인생을 산 인물이 실제로 존재했다면? 소설 007시리즈가 발표되기 십여년 전인 1940년대 영국의 첩보원으로 활약했던 다스코 포포프(Dušan Duško Popov, 1912~1981)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의 스파이 활동은 영화 속 007과 비교했을 때 조금도 손색이 없었다고 한다.

1912년, 세르비아의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다스코 포포프는 선천적으로 플레이보이의 기질을 갖고 있었다. 염문설이 끊이지 않았고 어느 곳에 가든지 미녀와 사귀었다. 천부적인 첩보원으로서 이탈리아어, 프랑스어, 영어 등을 유창하게 구사하는 언어의 천재였던 그는 빠르게 스파이들의 핵심이 되었다.
 


다스코 포포프, 1912~1981

처음으로 스파이 활동에 참여하게 된 것은 1940년 2월, 친구인 존 니의 전보를 받으면서부터이다. 존은 포포프가 1936년 독일 프라이부르크대학 재학시절에 알게 된 친구로, 전보 내용은 2월 8일 세르비아 호텔 앞에서 만나자는 것이었다. 포포프는 모르고 있었지만 당시 존 니는 나치 간첩으로 고용되어 있었다. 그 만남은 포포프를 이용해 영국 내에서의 교류를 넓히고 정보를 수집하여 연합군에 대항하기 위함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는 영국 문서보관소가 새롭게 공개한 기밀문서에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1940년, 히틀러의 정책에 반감을 지녔던 포포프는 독일군에게 이용되기 싫어 주도적으로 베오그라드 주재 영국 상무관을 찾아가 영국에 정보를 제공하고 독일의 정보망을 흔들 수 있기를 바랬다. 며칠 뒤, 런던은 이 계획을 승인했다. 포포프는 자신이 계획한 '이중 플레이'에 의해 독일 간첩조직에 진입하여 이중간첩 생활을 시작했다.

기밀문서에는 또 포포프가 보이지 않는 잉크를 만들어 사용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그의 관련 문서에는 날짜가 적힌 문서와 보이지 않는 잉크로 적은 엽서, '이미 열어 봄' 또는 '검사'라고 찍힌 우편물, 여자친구에게 보낸 편지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보이지 않는 잉크로 쓴 비밀정보. 이 손수권에 화학약품을 묻히면 글씨들이 나타난다. ⓒ예문

1941년 7월, 포포프는 미국에 파견되어 첩보조직 내에서 활동했다. 그의 독일인 상사가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전쟁을 벌일 수 있는데, 우리는 이를 좌시할 수 없다"라고 말했을 때 포포프는 이미 진주만을 기습하려는 일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다.

영국 정보국의 동의를 얻은 포포프는 미국 주재 유고슬라비아 신문 특파원의 신분으로 뉴욕으로 건너 가 독일 정보기관이 지시한 임무를 완수한 뒤 미연방조사국에 '일본이 미국을 침공한다'는 소식을 전했다. 영국 정보국과 연락을 취한 미 연방조사국 국장 애드가 후버는 포포프를 소환했다.

영국 정보국이 이미 포포프의 신분을 확인했음에도 불구하고 미 연방조사국은 이를 의심했으며, 국장은 포포프가 풍류를 즐기며 프랑스 영화배우와 종일 시간을 보냈기 때문에 포포프에게 아무런 기대도 하지 않았다. 후버는 결국 그를 비판하며 이렇게 말했다. "당신은 정말 사기꾼 같은 간첩이다. 당신이 여기 온 이후 나치주의자라는 한 놈도 만나지 않았다. 나는 세계에서 가장 깨끗한 경찰 조직을 이끌고 있다. 그런데 당신은 6주 동안 호화로운 호텔에 머물면서 영화배우들이나 쫓아다녀 우리 법률을 심각하게 파괴했다. 심지어 내 부하를 세뇌하려고 했다. 나는 더 이상 참을 수 없다!"

그러자 포포프는 후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가 미국에 온 것은 당신들이 전쟁에 대비 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서였다. 나는 각종 방식으로 당신들에게 엄중 경고했다. 확실하게 말하겠는데 장소와 시간, 방식은 모르지만 미국은 틀림없이 공격을 받을 것이다." 그리고 5개월 뒤 일본이 진주만을 공습했다.

이런 만남에 매우 실망한 포포프는 착잡한 기분으로 미국을 떠났다.

1942년 11월, 포포프는 다시 영국에 나타났다. 연합군은 독일에 허위 경보를 보내고 독일에 대해 연속적으로 '스타지 행동'과 '마키아벨리 계획'을 실시하여 독일인들을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스타지 행동'을 통해 영국은 독일 정보기관에 허위 정보를 제공하여 영국이 칼레 항 일대에서 대규모 상률 작전을 준비중이라고 알렸다. 그래서 독일 폭격기들을 영국 황실공군 기지로 유인하여 사정권으로 끌어들였다.

'마키아벨리 계획'에서 포포프는 위조 문서와 서신을 영국 장교의 시체와 함께 파도에 실려 보내 스페인 해안에 닿게 했다. 그 문서들 속에는 그리스 침공에 대한 기밀서류가 있었고, 독일군은 그 시체 속에서 '의외'의 정보를 얻게 되었다. 아울러 포포프는 독일인들에게 건네는 보고서 속에 많은 영국인과 미국인이 스코틀랜드에서 진행되는 낙하산부대 훈련에 참여했고, 영국에서 최근 일어난 비행기 실종사건을 은폐하려 한다는 등의 소식을 전했다. 베를린 당국은 즉시 사틴 섬에 부대를 증강하고 잠수함을 크레타 지역으로 이동시켰다. 그 결과 시칠리의 방어력이 약화되어 패튼 장군이 쉽게 진격할 수 있게 해주었다.

1944년 5월 초순, 정보가 넘쳐나자 이중간첩의 업무도 늘어났다. 그들은 정보를 진지하게 조작하고 연구하여 연합군의 전략 계획에 발을 맞추고 적들에게는 신임을 얻었다. 그러나 이렇게 많은 정보를 물샐틈없이 정확하게 조작하기란 힘든 일이었다. 과연 약간의 착오가 독일 정보기관의 주의를 끌게 되었다.

1944년 5월 중순의 어느 깊은 밤, 영국 정보국의 한 인물이 포포프에게 달려와 소식을 전했다. 적에게 발각되기 전에 헝가리 리스본으로 가 다른 대원들을 피신시킨 뒤 벨기에로 도망치라는 내용이었다.

포포프는 곧 리스본으로 가 조직원들의 피신을 도우려 했다. 그러나 때가 이미 늦어 활동 중이던 첩보원들은 나치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자신도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다.

1944년 6월 6일, 연합군이 프랑스에 상륙하기 하루 전에 그는 연합군을 도와 노르망디가 아닌 다른 지역에 상륙할 것처럼 독일군을 속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포포프는 2차대전 기간 동안 수많은 첩보 활동에 참여했다. 그는 첩보 활동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은 신비로운 사람들로서 못 들어가는 곳이 없으며, 없는 곳이 없다. 승리해도 자랑할 수 없으며, 실패해도 변명할 수 없다. 나의 무기는 거짓과 기만이다. 나 자신도 살인처럼 정상적인 사회 규칙을 위배하는 행동을 한다. 그러나 이것은 단지 임무라는 생각에 불안감을 갖지 않는다."


다스코 포포프의 만년의 모습. ⓒ예문

영국은 전쟁이 끝나고 2년 뒤인 1947년에 포포프의 공적을 인정하여 그에게 OBE(Order of The British Empire,영국 제국 훈장)를 수여했다.

포포프는 다음과 같은 명언을 남겼다. "내가 위험한 삶 속에서 생존할 수 있었던 것은 너무 진지한 태도로 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주)예문과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발칙한 군사학

장지리|야오샤오화 | 송철규 옮김

예문 2009.12.31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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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서 가장 으스스한 유적지, 카타콤의 유래와 역사


사람 뼈로 만들어진 제단, 벽에 난 구멍마다 시체가 들어찬 어두운 통로……. 공포 영화의 배경 묘사가 아니다. 지금도 로마 근교를 비롯해 많은 지역에서 볼 수 있으며, 기독교의 성지로 수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고대의 지하무덤, 카타콤의 모습이다.

카타콤은 로마시대 기독교인들이 교우를 묻기 위해 만든 지하무덤이었다. 2~4세기 로마제국에는 사람이 죽을 경우 화장하거나 성벽 안에 묻어야 한다는 법률이 있었다. 이 법령은 모든 로마 시민들에게 엄격하게 적용됐는데, 기독교도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죽음을 맞이한 교우는 땅에 묻어야 부활과 영생을 누린다는 것이 기독교의 신앙이었다. 자신들의 신앙을 보호하면서도 로마제국의 법령을 어기지 않기 위해 부유한 기독교도들은 성 밖 도로 옆에 무덤을 만들었다. 이런 무덤을 카타콤(Catacomb)이라고 불렀다. 최초의 기독교도 무덤은 이처럼 도로 양편의 공터에 세워졌다.

초기의 카타콤은 2세기부터 지어지기 시작했으며, 비교적 소박한 동굴 형태였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 동굴에 묻히는 사람의 수가 늘어나자 곧 거대한 지하묘지가 형성됐다. 로마의 지하묘지 대부분은 4층으로 되어 있고 좁은 통로와 계단이 체계적으로 이어지도록 만들어졌다. 망자의 사체는 동굴의 벽에 구멍을 뚫고 안치했다.

원래 이 지하묘지는 '파수리'라고 불리던 전문가들이 지은 것이다. 이들은 자신의 경험과 지혜를 십분 발휘해 로마 지하에 거대한 지하세계를 건설했다. 지하묘지의 통로는 여러 층으로 나뉘어 사방팔방으로 뚫려 있었는데, 각 층은 좁고 가파른 계단으로 연결돼 있었다. 그들은 이런 작업 이외에도 바위를 정교하게 다듬어 이 지하묘지가 인공이 아닌 천연적으로 이루어진 동굴인 것처럼 보이게 하는 솜씨를 발휘했다.

도굴을 막고 사체의 부패를 방지하기 위해 초기 작업자들은 복도를 좁게 그리고 미로처럼 만들어 구조를 모르는 사람이 들어오면 여간해서는 출구를 찾거나 되돌아갈 수 없도록 했다. 이는 망자의 영혼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지하묘지는 어둡고 습하기 때문에 공기 중에는 악취가 만연했다고 한다. 더욱 중요한 것은 칠흑같은 어둠이었다. 지하묘지에 들어선 사람들은 누구나 이 절대적인 어둠 앞에서 공포에 사로잡혔다.


카타콤의 갱도 ⓒ예문 

그런데 3세기 무렵, 이처럼 음습한 지하묘지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기독교에 대한 박해로 인해 자유롭게 집회를 가질 수 없게 되자 기독교도들은 당국의 눈을 피해 로마의 성 밖에서 은밀히 모였다. 이때 가장 안전한 장소가 바로 지하무덤 안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발렐리아누스 황제는 지하공동묘지를 색출했고, 묘지 출입 금지령을 내리기도 했다. 

가장 많은 기독교도들이 카타콤으로 숨어든 것은 '피의 시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때였다. 이 시기 기독교도들은 종교가 드러나는 즉시 재산을 몰수당했으며, 주민 전체가 기독교도로 들어난 마을은 그대로 불태워졌다. 발각된 기독교도들은 콜로세움에서 열리는 검투대회에서 맹수의 밥으로 던져지기도 했다. 이러한 박해를 피해 수많은 기독교도들이 음습한 묘지 속으로 숨어들었다. 카타콤의 갱도는 미로와 같이 복잡했기 때문에 이를 이용해 추격하는 로마 병사들을 따돌리는 데 적합했다. 미로 속을 헤매다 시체로 발견되는 병사들도 있었다고 한다. (오늘날에도 길을 잃는 여행객들이 왕왕 발생하기 때문에 로마 당국은 카타콤은 일부만 개방하고 있다.) 이처럼 지하묘지로 피신한 사람들은 함께 식사를 하고, 기도하며 구원을 얻었다. 죽은 자를 묻기 위해 만들어진 카타콤이 기독교도들의 목숨을 살리는 안식처가 된 것이었다.
 


카타콤의 내부. 곳곳에 새겨진 그리스어가 보인다. ⓒ예문

카타콤은 로마뿐 아니라 이탈리아 다른 도시들에도 존재했다. 이러한 지하묘지는 훗날 프랑스에도 지어졌는데, 그 면적이 거의 파리 시내에 맞먹을 정도로 거대하다. 18세기에 도시가 급성장하며 묘지가 부족해지자 이를 해결하기 위해 파리시는 신원미상의 묘지를 폐기하고 유골들을 지하터널에 납골했다. 그 결과 300km에 달하는 지하터널 벽에 인골이 빼곡히 박히게 되었다. 로마의 카타콤과 유래나 의미는 다르지만, 유럽에서 로마 카타콤을 모티브로 하는 지하묘지가 계속해 지어졌음을 보여주는 실례이다.

오늘날 카타콤은 기독교 순례자들이 반드시 찾아가는 성지가 되었다. 박해와 순교, 무수한 죽음과 공포를 이겨낸 신앙의 힘이 깃든 곳, 카타콤은 가장 성스러운 동시에 가장 으스스한 유적지 중 하나이다.


<이 기사는 (주)예문과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

발칙한 고고학

후즈펑 | 송철규 옮김

예문 2009.12.05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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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노타우로스는 실존했다? 식인황소에 바쳐진 인간제물의 진실

크레타의 왕이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을 데려다 식인황소 미노타우로스에게 바쳤다는 신화를 들어보았는가? 그런데 이러한 신화 속 이러한 이야기가 완전히 상상의 산물만은 아님이 밝혀졌다. 크레타 왕국의 유적에서 살해당한 청소년들의 유해가 발견된 것이다.

지중해로 둘러싸인 발칸 반도 남부에는 아름다운 나라 그리스가 자리 잡고 있다. 고대 그리스는 인류 문명의 발원지 중 하나로 손꼽히며 세계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그리스 신화의 주무대이기도 하다. 그런 그리스 신화 중에서도 크레타(Creta)섬의 미궁과 미노타우로스(Minotauros) 신화만큼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는 것도 드물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크레타 섬에는 미궁이 있었다고 한다. 미궁은 크레타의 왕 미노스(Minos)가 만든 것으로 황소에게 사람을 바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그것은 미노타우로스라 불리는 반인반수의 식인황소였다. 미노타우로스의 미궁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크레타의 왕 미노스는 제우스 신이 페니키아의 공주 에우로페와 결혼해 낳은 아들이었다. 그는 강력한 힘을 지닌 국왕으로 도시국가연합을 세우고 법전을 제정했다. 점점 자신의 권력에 도취한 미노스는 어느 날 제사에 쓸 황소를 보고, 신에게 바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나머지 좋지 않은 다른 황소를 보고, 신에게 바치기에는 너무 아깝다고 생각한 나머지 좋지 않은 다른 황소와 그 황소를 바꿔치기했다. 이에 화가 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은 그의 자식들 가운데 소머리를 가진 괴물이 태어날 것이라 예언한다.

후에 이 예언은 현실이 됐다. 왕비 파시파에가 미노스가 바꿔치기한 황소에게 그만 반해버린 것이다. 황소를 사랑하게 된 왕비는 고민 끝에 암소의 몸통을 만들고 그 속에 들어가 황소와 사통했다. 그 결과 머리는 황소고 몸은 사람인 괴물이 태어났으니, 크레타인들은 이 괴물을 '미노타우로스'라 불렀다. 다 자란 미노타우로스는 도끼를 휘두르며 사람을 잡아먹고 궁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왕비가 낳은 엄연한 왕자를 죽일 수는 없는 일. 왕은 천재 건축가 다이달로스에게 부탁해 영원히 나올 수 없는 미궁, 라비린토스(Labyrinthos)를 만들어달라고 부탁했다. 무수히 많은 통로와 방이 있어 한번 들어가면 절대 빠져나올 수 없도록 만들어진 미궁의 중앙에 미노타우로스를 가둬두기 위해서였다.
한편 미노스 왕은 또 다른 아들 안드로게오스가 아테네에서 열린 경기에 참가했다가 사망하자, 아들의 복수를 위해 아테네에 군대를 파견했다. 결국 아테네인들은 항복했고, 9년에 한 번씩 7명의 소년과 7명의 소녀들을 미노타우르스에게 바치게 됐다. 껌껌한 미로 속을 헤매던 아테네의 아이들이 미노타우로스와 마주칠 때면, 미궁에는 비명소리가 메아리쳤다.
미궁의 비극이 끝난 것은 아테네의 왕자 테세우스 덕분이었다. 자진하여 희생제물이 되기로 한 왕자가 크노소스 궁전에 도착하자, 그를 본 공주 아리아드네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그를 본 공주 아리아드네는 첫눈에 반해 사랑에 빠졌다. 어떻게 해서든지 테세우스를 구하고 싶었던 아리아드네는 그에게 마술 검과 실뭉치를 주면서 실을 입구에 매어놓고 가닥을 풀면서 들어가라고 일렀다. 왕자는 미노타우로스를 찾아 미궁 속으로 들어갔고 한 차례의 격투 끝에 마술 검으로 미노타우로스를 찔러 죽였다. 왕자는 다시 실을 좇아 미궁을 빠져나왔고 공주와 함께 아테네로 돌아갔다. 


크레타 섬 유적에서 발견된 황소 경기 장면. 크레타 섬에서 황소는 상징적 의미가 있는 동물이었다. ⓒ예문

신화 속의 왕 미노스는 과연 실재하는 인물일까, 아니면 신화 속의 가상 인물일 뿐일까. 고대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Thukydides)의 저서에도 미노스 왕에 대한 기록이 남아있기는 하지만, 의문은 쉽사리 풀리지 않았다. 미노스 왕조가 있었다는 크레타 섬에서 그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었다.

의문은 19세기 말, 영국학자 아서 에반스(Arthur Evans)에 의해 비로소 풀렸다. 그는 1893년 아테네에서 삼각형 또는 사각형 형태의 문자와 부호가 새겨져 있는 돌을 발견했다. 이 돌이 크레타 섬에서 온 것임을 알게 된 그는, 이듬해 크레타 섬으로 가 폐허에서 대량의 상형문자 파편들을 수집했고 이후 25년에 걸쳐 크노소스 궁전의 유적지를 발굴했다.

에반스가 발굴한 궁전은 현재 크레타 섬의 이라클리온(Iraklion)시에서 동남쪽으로 약 8km 떨어진 곳에 있다. 궁전에는 중앙정원을 중심으로 1,500여개의 궁실이 분포돼 있는데, 높은 지역에 잇는 서쪽 건물은 대다수가 2층집이고 낮은 지역에 위치한 동쪽 건물들은 4층집이 주류를 이룬다. 각 궁실들은 복도, 계단, 대청 등으로 복잡하게 연결돼 있어 미로에 빠진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조금의 과장도 없이 이 궁전은 명실상부한 미궁임에 틀림없다. 왕실의 일원이라 할지라도 자연스럽게 드나들 수는 없었을 것이다. 지금도 많은 이들이 들어가기는 쉬워도 나오기는 힘든 현상이 벌어지곤 한다.
 


크노소스 궁전의 일부. 전설 속의 미궁은 크노소스 궁전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예문 

결국 신화 속의 미궁은 크노소스 궁전 그 자체였던 것이다. 그렇다면 미노타우로스의 존재와, 아테네의 소년 소녀들이 그의 먹이로 바쳐졌다는 이야기 역시 사실인 것은 아닐까? 대부분의 사람들은 미궁의 존재를 극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후세에 덧붙여진 이야기에 불과한 것이리라 믿었다. 그러나 곧 '아테네 아이들이 인신공양의 제물로 바쳐졌다'는 대목이 신화 속 허구만은 아니란 사실이 밝혀졌다.
크레타 왕국의 문화가 제일 찬란했던 기원전 2300~1500년경은 바로 미노스 왕조의 시기였다. 미노스 왕의 강인함과 현명함, 통치력에 힘입어 나라는 번성기를 맞이했다. 에게 해의 여러 섬들은 미노스 왕조의 신하를 자청했으며, 아테네도 공물을 바쳐야 했다. 당시에 미노스 왕조가 고도의 문명을 꽃피웠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크노소스 궁전의 내부. 지금 보아도 화려하고 세련된 무늬의 벽장식과 벽화들이 그대로 보존돼 있다. ⓒ예문

그런데 이상한 것은 기원전 1500년경, 크레타 섬의 모든 도시들이 동시에 파괴됐다는 점이다. 크노소스 궁전도 예외가 아니었다. 비밀이 드러난 것은 1967년, 고고학자 스피리돈 마리나토스에 의해서였다. 크레타 섬에서 북쪽으로 약 70km 떨어진 곳에는 화산으로 이루어진 산토리니(Santorini) 섬이 있다. 연구에 따르면 해발 566m에 불과한 이 화산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심각한 폭발이 일어났다고 한다. 기원전 1500년경 산토리니 화산이 폭발하며 섬 자체가 순식간에 두꺼운 화산재 속에 매몰됐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화산분출이 얼마나 맹렬했던지 이집트 상공에도 3일간 연속으로 칠흑 같은 어둠이 계속됐다고 한다. 곧이어 화산분출로 인해 발생한 높이 50m의 해일이 크레타 섬을 강타해 모든 것을 휩쓸어 버렸다. 스피리돈 마리나토스는 크노소스에 닥친 재앙에 대해 다음과 같이 묘사했다.
"갑작스런 굉음에 놀란 크노소스 사람들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없었다. 이어서 돌과 흙이 뒤범벅된 화산재가 엄습했다. 불똥과 시커먼 연기를 동반한 화산재는 순식간에 도시를 폐허로 만들었다. 화산과 지진으로 인한 해일이 해안을 덮쳐 육지의 모든 것을 휩쓸어버렸다."

순식간에 화산재로 뒤덮인 덕분에 크노소스 궁전과 그 일대는 완벽하게 보존될 수 있었다. 화려하게 채색된 벽화와 도자기, 생활물품들이 다량 발굴됐으며 문자가 기록된 진흙판도 수만 장이나 출토됐다. 그런데 그 진흙판 가운데서 뜻밖의 문구가 발견됐다. '아테네에서 여자 7명, 남녀 어린이 각 7명씩을 공물로 바쳤다', 이는 미노타우로스의 신화에서 전해지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곧이어 발굴된 섬의 지하에서는 200여 구의 인골이 발굴됐는데, 이중 상당수가 10~15세 남녀 청소년의 것으로 밝혀졌다. 유골의 뼈에는 칼에 긁힌 흔적이 있었다. 아이들은 누군가에 의해 살해당한 후 버려진 것이다.
한편 고고학자들이 발굴한 어느 신전에는 사제와 그의 조수 여러 명이 제사를 진행하던 도중 화산폭발을 맞이한 듯 쓰러져 있었다. 신전에는 제사용 도자기 그릇과 제단이 남아있었는데, 제단에 누워있는 제물을 본 고고학자들은 크게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165cm 정도 키의 젊은 남성이었던 것이다. 제단 주변에서는 제물의 피를 받기 위한 그릇과 날카로운 청동칼도 발견됐다. 제물이 된 대상은 기록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아테네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크레타 왕국에서는 실제로 인신공양이 이루어졌다. 아테네인들은 바다 건너 섬에서 행해진다는 무시무시한 제의에 공포를 느끼지 않았을까? 게다가 그들은 크레타 왕국에 공물로 사람을 바치고 있었다. 여기에 미노스 왕조의 강력한 왕권과 크레타 왕국의 황소숭배 풍습이 어우러져 식인 황소와 같은 신화적 존재를 만들어냈을 것이다.
아테네 인들의 상상력은 크레타의 횡포로부터 사람들을 구해줄 영웅 테세우스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신화와는 달리 오늘날 유적은 인간제물의 비극이 크노소스 왕국이 멸망할 때에야 비로소 끝났음을 보여준다.


<이 기사는 (주)예문과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발칙한 고고학

후즈펑 | 송철규 옮김

예문 2009.12.05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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