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네르바가 말하는 최저생계비 논란의 핵심은?

6300원 짜리 '황제의 생활' 누구의 책임인가


참여연대가 실시한 '최저생계비로 한 달 나기 릴레이 체험'이 7월 23일로 마무리되었다. 종료 후 여러 언론에서는 최저생계비의 문제점과 대안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MBC 시사2580에서는 최저생계비 체험자들의 생활을 취재하며 한국의 최저생계비로 인간다운 생활을 하기는 불가능하다는 결론을 냈다. 체험 결과 4인 가구는 적자로 끝났으며, 어느 1인 가구 체험자는 인터뷰에서 심리적 불안감과 무능력감까지 표시했다. 이 프로그램에서는 체험단 취재와 함께 현재 한국의 최저생계비 책정 과정의 비합리성도 지적했다.

반면 같은 캠페인에 참가한 한나라당 차명진 의원은 하루 최저생계비인 6300원으로 황제 같은 식사를 했다는 체험기를 올려 빈축을 사기도 했다. 차 의원은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6300원으로 쌀 1컵(800원), 쌀국수 1봉지(970원), 미트볼 한 봉지(970원), 참치캔 1개(970원)를 구입해 “점심·저녁은 밥에 미트볼·참치캔을 얹어 먹고 아침식사는 쌀국수로 가뿐하게 때웠다”며 “970원짜리 황도 한 캔을 사서 밤에 책을 읽으며 음미했다. 이 정도면 황제의 식사도 부럽지 않다”고 말했다. 차 의원은 또 “남은 돈 1620원 가운데 1000원을 기부했고, 조간신문 1부를 600원에 샀으니 ‘문화생활’도 했다”고 전했다. (세계일보 참조) 이런 반응에 대해 네티즌들은 황당하다는 반응을 보였다. 인스턴트 일색의 식사를 황제의 식사라고 표현한 차 의원의 자평을 참을 수가 없다는 비판이 대부분이었다. 결국 차명진 의원은 인터넷을 통해 사과문을 올렸지만 논란은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토록 논란의 대상이 되고 있는 최저생계비, 무엇이 문제일까?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은 한 가구의 소득이 최저생계비에 미치지 못할 경우 최저생계비를 기준으로 소득의 차액을 정부에서 보전해주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이렇게 정부로부터 지원을 받는 사람들을 기초생활수급자라고 하며, 수급자에게는 현금에서 현물까지 다양한 지원이 제공된다. 하지만, 빈곤층이라고 해도 소득이 아슬아슬하게 최저생계비 이상이라면 수급 대상이 될 수 없다. 이처럼 빈곤층이 지원을 얼마나 받게 되느냐는 물론이고 누가 받게 되느냐까지 최저생계비에 달렸기 때문에, 최저생계비야말로 한국 복지제도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다. 최저생계비의 적절한 책정이 그 나라의 삶의 질과 복지 제도의 수준을 결정한다.


보건복지부는 내년 기초생활수급자의 규모는 163만 2000명, 비수급 빈곤층은 103만 명으로 추정하고 있고, 시사2580은 비수급 빈곤층이 400만 명에 다다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지원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빈곤층이 그만큼 많다는 뜻이다. 기초생활수급자를 현실적인 수준으로 늘리기 위해서는 최저생계비를 현실화할 필요가 있지만, 2010년 최저생계비 인상률은 작년 대비 2.75%에 불과했다. 물가 인상률에 미치지 못한 것은 물론, 2000년 국민기초생활보장법이 제정된 이후로 가장 낮은 인상률이었다.

최저생계비를 결정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은 물가상승률이다. 인터넷 경제 논객인 미네르바는 정부의 물가상승률 산출방식 자체에 문제가 있기 때문에 최저생계비가 제대로 책정되지 않는다고 이야기한다. 그의 저서 <미네르바의 생존경제학>의 한 장을 들여다보자.

한국에서 물가상승률이 2%대라고 하더라도 이것은 통계 착시에 불과하다. 체감 물가로 접근할 경우 한국의 식료품 물가 상승률은 OECD 평균의 11배가 넘는다. 그런데도 물가상승률이 2%대라고 끝까지 우기고 버티는 진정한 이유는 무엇일까?
물론 정부에서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하지만 통계 방식을 바꾸지 않는 핵심적인 이유는 사회복지예산 때문이다. 2010년 최저생계비가 4인 가족 기준 136만 3091원으로, 2009년에 비해서 2.75%, 단돈 3만 6482원이 올랐다. 이는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라는 것이 생긴 2000년 이래 사상 최저 인상률이다. 2009년 7월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전년 동월 대비 1.6%로 2009년 상반기에 비해 상승폭이 많이 줄어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2008년 7월의 소비자 물가상승률은 환율 폭등으로 인해 9년 7개월 만에 최고 수준인 5.9% 수준으로 올랐다.

결국 이것이 사기인 이유가 작년의 물가상승분이 올해 전혀 반영안 된 상황에서 전년 대비 소비자 물가 수준 등락폭을 단순 비교하여 낮은 수준의 최저생계비 인상률을 합리화시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최저생계비를 낮춰 잡는 이유는 최저생계비를 올리면 국민기초생활보장제도 수급자가 늘어나고, 수급자가 늘어나면 수급자들이 받는 급여가 높아지기 때문이다. 거기에 이러한 최저생계비는 의료급여, 노인장기요양보험, 장애수당, 장애아동수당 및 각종 사회복지 서비스의 선정기준으로 활용되기 때문에 최저생계비를 낮게 잡을수록 사회복지 예산을 쉽게 깎을 수 있는 명분이 생긴다.

즉, 대규모 토목건설사업으로 일을 저지르려면 재원 조달을 위해 다양한 방식으로 타 예산을 깎아야 하는데, 사회복지 예산의 경우 손쉽게 예산을 깎을 수 있도록 그 선정 기준을 최대한 낮춰 잡는 것이다. 그 결과 최종 피해자는 누구인가? 국가의 체계적인 복지 혜택이 가장 절실한 계층이 가장 큰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이다. 아무리 이의를 제기해도 힘없는 이들의 목소리에 정부가 귀를 기울일 리 만무하니, 개인당 수령 금액을 깎지 않는 것에 감사하며 조용히 넘어가는 것이 현실이다."

미네르바의 의견대로라면 정부가 복지예산을 축소하거나 예년과 비슷하게 유지하는 이유는 예산을 다른 곳에 써야 하기 때문이다. 6300원짜리 황제의 삶은 4대강 개발 사업과 부자 감세 때문은 아닐지 생각해 볼 문제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미네르바의 생존경제학

박대성

미르북스 2009.11.11


이동준 기자 (
timidbea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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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나 정신병원에 갇힐 수 있다

종교 문제로 갈등하던 남편에 의해 정신병원에 71일 동안 강제 입원 당했던 정백향 씨는 ‘정피모(정신병원피해자인권찾기모임:http://cafe.naver.com/jpmjpm.cafe)’을 이끌고 있다. 정 씨는 자신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끈질긴 노력을 했고, 마침내 담당 의사를 ‘감금죄’로 처벌한다는 법원 판결을 받아내기도 했다. 멀쩡한 사람이 가족에 의해 강제로 정신병원에 입원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만, 관계자에 대한 형사처벌은 정백향 씨의 경우가 처음이었다.


사례를 들자면 끝이 없다. 남편에게 이혼을 요구하자 정신병원에 끌려간 주부도 있고, 재산 다툼의 결과가 정신병원 입원으로 이어진 경우도 있다.

멀쩡한 사람이 정신병원에 강제로 입원 당하는 사실상의 ‘감금’이 가능한 것은 법률에 그 근거가 있기 때문이다. 바로 ‘정신보건법’ 제 24조이다. “정신 의료 기관의 장은 정신질환자의 보호의무자가 동의가 있는 때에는 정신과 전문의가 입원이 필요하다고 진단한 경우에 한하여 당해 정신질환자를 입원시킬 수 있으며……” 뒤에 따르는 조항은, 입원을 위해서는 보호의무자임을 확인하는 서류가 있어야 한다는 것뿐이다.

강제 입원의 필요조건은 가족의 동의와 정신과 전문의의 진단이다. 가족은 앞서의 경우처럼 종교 갈등이나 이혼 등의 불화, 재산 다툼 등의 필요 때문에, 그리고 정신과 전문의는 매출 증대 때문에 강제 입원을 감행하고 있다. 사설 응급 업체에 약간의 돈만 쥐어 주면 가족 구성원 중 한 명을 정신병원에 입원시키는 일은 식은 죽 먹기라는 것이 피해자들의 한결 같은 증언이다.

<2008년까지의 국내 정신병원 입원현황. 환자의 동의 없이 가족, 정신과의사 등의 의사에 따라 행해진 비자의 입원이 자의 입원의 최소 6배 이상이다.> 

강제 입원이 많은 탓에 정신 보건 시설에서 생활하는 정신질환자(또는 정신질환자로 몰린 사람)의 수도 많다 2005년 말 기준으로 6만 8,991명이다. 미신고 시설까지 합하면 7만 명이 훌쩍 넘는다는 것만 확실할 뿐 정확한 통계도 없다. 정신병원, 정신 요양 시설 등의 정신병상 수는 7만 3천 개다. 국민 1천 명당 1.51개로 세계 최고 수준이다. 이탈리아의 0.1개는 물론이고, 영국의 0.69개나 독일의 0.7개보다도 2배가 넘는다.

정신 보건 시설에 수용되어 있는 많은 사람 중에 자의(自意)입원은 8.9퍼센트에 지나지 않고, 91.1퍼센트는 강제입원(2005년 기준)이다. 가족에 의한 강제 입원이 76.8퍼센트, 지방자치 단체장에 의한 것이 13.3퍼센트이다. 유럽의 강제 입원율(영국 13.5%, 프랑스 12.5%, 네덜란드 13.2%)에 비하면 6배나 높다.

입원 일수만 봐도 실태를 알 수 있다. 국립 정신병원 101일, 사립 정신병원 266일, 정신 요양 시설 2,485일이다. 시설 보호 대상자의 경우엔 국가에서 생활비와 치료비 일체가 지급되니 많은 사람을 수용할수록 매출이 뜬다는 장삿속의 결과이다. 대학 병원의 입원 일수는 20일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 국립 정신병원 입원 일수도 이탈리아에 비해 7.8배, 독일에 비해 4배나 된다. 한마디로 너무 많은 사람이 너무 오랜 기간 동안 강제로 갇혀 있는 것이 한국의 현실이다. 한국은 국민당 정신병상 수, 정신병원 강제 입원율, 평균 입원 일수에서 부동의 1위를 고수하고 있다. 2위가 넘보기 힘들 정도로 압도적인 1위이다.

이전에는 아예 법률적 근거도 없었는데 1997년 정신보건법이 만들어져서 그나마 좀 나아졌다는 시각도 있지만, 이게 좀 나아진 것인지, 아니면 합법적으로 강제 입원이 양산되는 계기가 마련된 것인지는 가늠할 데이터조차 없어 알지 못하는 형편이다.

정신병원에 갇히면 멀쩡한 사람도 정신질환자가 된다. 외부와의 접촉이 차단되어 감금 상태로 지내야 하고, 상태를 오히려 악화시키는 강제 투약을 당해야 한다. 병을 치료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독서나 텔레비전 시청을 못하게 하는 경우도 많고, 하루 종일 종이가방 접기 등 강제 노역을 시키는 경우도 너무 많다. 보통의 일과는 밥 먹기, 약 먹기, 잠자기와 단순한 작업하기가 전부이다. 아무리 봐도 범죄자들을 가두는 감옥이 훨씬 낫다. 감금과 비인간적인 처우에 조금이라도 저항하면 당장 결박을 당하고 집단 구타가 쏟아진다.

피해자들이 직접 나서 법 개정 운동을 펼치고 있지만, 막대한 이윤을 챙기는 부도덕한 의사들과 병원, 시설의 로비는 훨씬 막강하다. 주무부서인 보건복지가족부는 인권 사각지대인 정신병원에 대한 감시와 통제에 대해 손을 놓고 있고, 국가인권위원회 정도가 겨우 관심을 갖고 있는 실정이지만, 그것도 겨우 정신과 의사들의 도덕성 회복을 촉구하는 수준에 불과할 뿐이다.


<이 기사는 (주)도서출판 삼인과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오창익

삼인 2008.05.06


정다운 기자 (
dawn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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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트남 숫처녀와 100퍼센트 결혼 성사" "처녀와 결혼-완전 후불제" "베트남 처녀 결혼-초혼∙재혼∙장애인 환영" "100퍼센트 사후 보증" "베트남 처녀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65세까지 완전 성사" "북한 아가씨와 결혼합시다"

국제결혼 알선 업체들이 몇 년 전부터 농촌 지역을 중심으로 도로변에 내건 현수막 문구들이다. 이 현수막에 큼지막하게 적힌 전화번호로 전화를 걸거나, 인터넷에서 검색을 해보면 훨씬 더 자극적이고 기가막힌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온다.

"남편에게 헌신적이다. 남편 말을 무조건 따른다. 혈통이 우리와 비슷하다. 몸 냄새가 아주 좋다. 몸매가 세계 최고다. 섹시하다. 때려도 도망가지 않는다. 정조관념이 투철하다. 사치를 모르고 검소하다. 생활력이 강하다. 자기희생적이며 부지런하다. 어른을 공경한다……."

              


"2006년 '차별적 국제결혼 광고대응을 위한 공동행동' 온라인 캠페인에서 시민들의 자발적인 신고를 받은 국제결혼 광고물들."

분명 우리 주변에 있을 누군가들이 이런 말들을 생산하고 소비한다는 사실만으로 나는 너무나 수치스럽고 절망을 느낀다. 명목은 결혼 알선이지만, 사실 노예 거래와 하등 다를 바 없다. 이 따위의 부끄럽고 반인권적인 문구를 앞세워 홍보를 하는 업자들도 문제지만, 저런 천박한 광고에 눈길을 주는 일반적인 한국 남성들의 의식은 더 큰 문제다. 여전히 많은 한국 남성에게 여성은 그저 섹스 상대가 되어 주고, 애 낳아 주고, 시집 어른들 잘 모시고, 부지런히 살림도 잘하고, 남편 말에 군소리 없이 순종하고, 때려도 도망가지 않는 존재여야 하나 보다. 꼭 농촌에 사는 총각들만이 독특하게 인권 침해적인 사고방식에 젖어 있지는 않을 것이다. 농촌이라 해서 다를 건 하나도 없다. 그저 한국 남성의 평균이 그 어디쯤에 있는 것일 뿐이다.
해서 나는 같은 남성으로 더욱 끔찍하다. 평생의 반려라는 짝을 마치 노예를 고르는 기준처럼 돈을 주고 고르는 현실이 끔찍하다. 노예를 데리고 사는 노예주는 인생의 행복을 만끽할지 모르지만, 노예로 사는 '사람'의 삶은 비참, 그 자체다.
일부 국회의원들은 이러한 광고를 부착하지 못하도록 '옥외 광고물 등 관리법'을 개정안을 제출하기도 했다. "성이나 인종 차별적인 표현으로 인권 침해 소지가 클 경우 현수막과 간판, 벽보 등의 사용을 금지"하고, 형사처벌까지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지금의 법률만으로도 흉측한 문구의 현수막들을 얼마든지 단속할 수 있지만, 우리의 부끄러운 자화상을 떨쳐 낸다는 생각으로 이런 방향으로 법률을 개정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렇지만 '때려도 도망가지 않는 베트남 숫처녀와 결혼하라'는 광고가 버젓이 길거리에 나붙는데도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는 지방자치 단체 공무원과 경찰관들은 도대체 뭐하는 사람들인지 모르겠다. 현재의 법률에 따라서도 '범죄 행위를 정당화하거나 잔인하게 표현하는 것', '음란 또는 퇴폐적 내용 등으로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 '청소년의 보호∙선도를 저해할 우려가 있는 것', '기타 법령의 규정에 위반되는 것' 등은 내다 걸 수 없게 되어 있다. 이러한 행위 역시 1년 이하의 징역이나 1천만 원 이하의 벌금형에 처할 수 있다. 지방자치 단체와 경찰이 몇 군데만 확실하게 대응한다면 그 효과는 당장에 나타날 것이다. 고액의 벌금과 형사처벌을 감수하면서까지 현수막을 내다 걸 용기를 지닌 국제결혼 알선 업자는 없을 테니 말이다.
그렇지만 더 중요한 것은 우리의 반인권적인 의식이다. 저도 사람이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것처럼, 그저 노동력이나 성을 제공하는 존재로 여길 수 있는지가 더 큰 문제다. 광고도 문제지만, 그런 광고가 통하는 현실이 더 문제다.
이런 광고를 본 베트남, 북한, 중국, 필리핀, 캄보디아 사람들이 느끼는 고통을 생각해 보면 절로 몸서리가 쳐진다. 그냥 단순하게 입장만 바꿔서 생각해 보면 어떨까. 미국이나 유럽, 일본을 여행하는데, 한국 여성들과의 국제결혼을 알선하는 비슷한 내용의 현수막을 읽게 된다면, 한국 사람들의 기분은 어떨까?

"대한민국 숫처녀와 100퍼센트 결혼 성사" "대한민국 처녀와 결혼-완전 후불제" "대한민국 처녀 결혼-초혼∙재혼∙장애인 환영" "100퍼센트 사후 보증" "대한민국 처녀는 절대 도망가지 않습니다" "65세까지 완전 성사" "대한민국 아가씨와 결혼합시다"
 


지은이 오창익
권실천시민연대 사무국장으로 일하는 인권 운동가로 활발한 인권 교육 활동을 해왔다.
《한겨레신문》과 《시사인》을 비롯한 여러 매체에 글을 썼고, 성공회대 겸임교수로 대학원 강의도 한다.



<이 기사는 (주)도서출판 삼인과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십중팔구 한국에만 있는

오창익

삼인 2008.05.06


정다운 기자 (
dawn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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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정 무역 커피에 지불한 돈의 90%가 사라진다.

<수확한 원두를 옮기고 있는 엘살바도르의 농민들> 

전 세계적인 공정무역 붐을 타고, 스타벅스, 네슬러, 코스타 등 유수의 다국적 기업들이 공정무역 참여를 선언했다. 스타벅스 코리아는 2010년 5월 8일~9일까지 세계공정무역의 날을 맞아 공정무역 원두인 ‘카페 에스티마’로 오늘의 커피를 판매했다. 

공정무역 커피의 가장 두드러지는 특징은 커피 농부들에게 시장 가격보다 높은 ‘최소가격(minium floor price)’을 보장한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제 3세계의 지속 가능한 개발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는데도 공정무역은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이는 공정무역 제품 값에 포함된 10%의 사회적 초과 이익 때문에 가능하다. 수익의 일정 부분을 반드시 지역 사회 발전을 위한 인프라 구축 등에 재투자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공정무역이 이뤄낸 긍정적인 변화들에도 불구하고, 기업의 공정무역 제품 판매는 기업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한 상술이자 마케팅 전략일 뿐, 근본적인 변화로는 보기 어렵다는 지적이 있다. 

한 예로, 영국에 코스타(Costa)라는 커피 기업이 있다. 코스타는 커피 다이렉트라고 물리는 공정무약 브랜드에서 나오는 커피를 판매하기 시작했다. 이 커피는 고객이 추가 10펜스(약 200원)을 더 내면 제 3세계 농부들에게 더 나은 커피 가격을 지불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그 200원이 과연 100% 제 3세계 농부들에게 돌아갈까? 

정답은 “그렇지 않다.”다.

고객들이 공정무역커피에 지불한 돈의 90% 이상은 중간에서 사라진다. 커피 다이렉트는 물론 농부들에게 커피 1파운드(453g)당 40~55펜스(800~1100원) 사이의 프리미엄을 지불했다. 비교적 적은 이 프리미엄으로 농부들의 수입은 거의 2배로 늘어날 수 있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커피 1잔을 만드는 데 드는 원두의 양은 약 7g, 즉 20원어치에 불과하다. 결국, 소비자가 낸 200원 중 180원은 코스타의 배를 불린 것이다.

같은 공정무역 슬로건이 붙어 있다고 해도, 실제로 공정무역의 본래 취지에 부합하는 제품인지, 소비자의 요구에 떠밀려 유행처럼 만들어낸 상품인지 구별하기 위해서는 소비자의 면밀한 관찰이 필요하다. 대기업이 내세우는 공정무역 기준이 적합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의문을 가져볼 필요가 있다. 공정무역이 단순한 브랜드가 아니라 진정한 사회운동이 되기 위해서는 제대로 된 공정 거래 체계 안에서 적합한 기준을 세워야 할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윤리적 소비

박지희|김유진

메디치미디어 2010.02.25


경제학 콘서트

팀 하포드 | 김명철 옮김

웅진닷컴(웅진.com) 2006.02.05


조애리 기자 (
joaeri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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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
천사를 넘어 전략적 비즈니스로- 이제 사회에 투자하는 시대!


한국의 기부문화도 지금에 와서는 많이 바뀌었다. 한쪽에서는 문근영과 김장훈 같은 스타들이 기부천사 그룹의 선두에 섰고, 이에 질세라 기업의 자선문화에도 새 바람이 분 지 오래다.


구세대 자선가들에게 '사업'과 '자선사업'은 분리된 것이었다. 자선이란, 단순히 '남는 돈'을 어려운 이들에게 나눠 주는 행위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요즘 기업들에게 있어 자선사업은 비즈니스 그 자체다. 이 '사회 투자자들'은 비즈니스 세계의 전략을 이용해, 기부를 일회적 쾌척으로 끝내지 않고 사회 변혁의 흐름으로 이어간다. 그 선두에 있는 한국의 3개 기업에 대해 알아본다.



돈이 있어 기부하는 게 아니라 기부하기 위해 돈을 번다- 푸르메재단 백경학 상임이사


1998년 영국으로 가족여행을 떠났을 때 백경학 이사의 부인은 불의의 교통사고로 왼쪽 다리를 잃었다. 하지만 영국과 독일에서의 인간적인 의료재활시스템으로 그들 가족은 다시 일상의 행복을 되찾을 수 있었다. 귀국한 백 이사는 재활치료를 위한 사회간접자본이나 의료시스템의 부족을 절실히 느꼈다. 개인이 모든 것을 부담해야 하는 병원비부터 많은 환자들이 제한된 공간에서 생활하며 겪어야 하는 인격적인 문제까지, 우리나라의 재활 현실은 너무 낙후되어 있었다. 2005년 그는 재활전문병원 설립을 목표로 푸르메재단의 문을 열었다. 그리고 국내 최초로 하우스맥주 전문점 옥토버훼스트를 출범시켰다.

재활전문병원 설립과 호프집 창업? 어째 어울리지 않는 이야기이다. 어째서 호프집인지, 그 이유를 백 이사에게 들어보자. 


"무엇보다 재단을 설립할 자금이 필요했기 때문입니다. 병원 설립의 전 단계로 비영리 재단 설립을 구상했고, 이 재단을 설립하기 위해서는 목적사업을 감안해 최소한 10억원 이상의 기본자산이 필요했었죠. 맥주 사업이라면 이 돈을 벌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습니다. 한국에서 독일식 고급 프리미엄 맥주는 블루오션이라고 여겨졌거든요."


하지만 당시 한 사람의 직장인에 불과했던 백 이사에게는 맥주 사업을 시작할 자금도 부족했다. 그가 기업가 정신을 발휘한 것이 이 부분이다. 그는 지인 59명에게서 5,000만원씩 총 28억원을 투자받아 사업을 시작했다. 그리고 자신의 옥토버훼스트 지분을 재단의 기본자산으로 내놓았다. 그 후 옥토버훼스트는 종로, 신촌, 마포, 서초동 등으로 사업영역을 넓혔다. 현재 푸르메재단은 옥토버훼스트를 최대주주로 정기적인 배당을 받으면서 다양한 의료문화 프로그램을 통해 기업들의 동참과 지원을 이끌어내고 있다. 단순히 기부자들에게 손만 벌리는 자선기관이 아니라 자립적이고 지속가능한 기부의 모델을 만들어 가고 있는 셈이다.



한 명의 희망이 다른 사람의 희망을 낳는다.- 아모레퍼시픽 희망가게


'건강한 여성들이 많아질수록 아모레퍼시픽도 발전할 수 있다' 아모레 퍼시픽의 사회공헌 활동은 이러한 기업철학에서부터 나온다. 이 말은 그들의 자선사업이 단순한 선의나 의무감이 아니라 기업의 장기적 전략과도 맞닿아 있는 것임을 보여준다.


'아모레퍼시픽 메이크업 유어 라이프' 캠페인은 여성암 환자들의 외모 가꾸기를 도와 자신감과 재활의지를 북돋우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다. '핑크리본' 캠페인은 유방암 예방사업의 일환으로 마라톤 대회를 열어 참가비 전액을 한국유방건강재단에 전달하는 사업이다. 또 우리나라 여성 과학자상으로는 가장 상금 규모가 큰 '아모레퍼시픽 여성과학자상'은 현재 4회에 걸쳐 수상자를 배출하고 그들의 연구를 지원해왔다.


아모레퍼시픽의 자선사업에서 단연 돋보이는 활동은 희망가게 프로그램이다. 이 프로그램은 한 부모 여성가장에게 최대 2000만원까지 소액대출하여 자신의 힘으로 희망가게를 창업할 수 있도록 돕고, 그 희망가게에서 얻은 수익금의 일부를 이자 (연 2%)로 받아 다시 대출자금으로 조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희망가게는 사업 시작 4년 만인 2007년에 선순환 궤도에 올랐다. 아름다운 재단에 따르면, 그동안 창업지원을 받은 23개 가게들이 매달 조금씩 반환해 모아진 자금으로 24호점이 개점한 데 이어 지방에서는 처음으로 부산에서 25호점이 문을 열었다. 최근에는 50호점까지 문을 열었다. 


해피빈이 기부문화를 바꾼다. -네이버 해피빈

 

'기부를 하라는 단체를 어떻게 믿고 기부를 하느냐?'

네이버(NHN)사회공헌실의 권혁일 실장은 '왜 기부를 안 하느냐'고 주변에 물으면 이렇게 반문하는 경우가 의외로 많았다고 말한다. 이러한 문제를 풀기 위해 네이버에서는 자신이 기부한 돈이 어떤 단체에 어떻게 쓰이고, 또 그로 인한 성과가 얼마나 되는지를 쉽고 편하게 피드백 받을 수 있는 온라인 서비스를 만들었다. 이것이 포털사이트 네이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해피빈 서비스'이다.


해피빈 서비스는 2005년 국내 최초로 기부를 모토로 한 포털서비스로 출범했다. 그 후 지금까지 86개 기업 파트너와 500만명의 네티즌이 기부에 동참했고, 기부금은 190억 원이 넘었다. 이렇게 빠르게 해피빈 서비스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쉽고 편하며 사용자에게 먼저 다가가는 기부 모델에서 찾을 수 있다. "해피빈을 통해 이용자들은 온라인에서 클릭 한 번으로 쉽고 편리하게 다양한 기부활동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또한 실제 화폐 대신에 온라인 기부 아이템 '해피빈콩'을 기부하는 시스템으로, 이용자들이 실제 기부액의 크고 작음보다 기부 활동 그 자체에서 더 큰 의미를 찾을 수 있습니다"


다른 온라인 기부 프로그램과 달리 해피빈 서비스가 계속 지속되며 확장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일까? 네이버가 자신들과 같은 포털서비스만이 가능한 사회공헌 모델을 만들고, 그것이 자신들의 브랜드 가치를 올려줄 수 있는 것임을 분명히 인식하며, 장기적 관점에서 그것을 실현했기 때문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하여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

박애 자본주의

매튜 비숍|마이클 그린 | 안진환 옮김

사월의책 2010.07.10

민혜영 기자 (mumu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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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저민 프랭클린의 유일한 오산, 200년짜리 투자실패
 

당신이 천만원을 기부하려고 마음먹는다면, 돈을 기금으로 만들 것인지 아니면 바로 필요한 사람들한테 나누어 줄 것인지 고민하게 될 것이다. 지금 당장 천만원을 소년 소녀 가장 돕기에 사용한다면 많은 사람들을 일시에 도울 수 있다. 하지만 이자를 받거나 주식 투자를 해서 돈의 가치를 불린다면 더 많은 액수의 기부를 할 수 있다. 어느 쪽이 더 효율적일까? 벤저민 프랭클린과  줄리어스 로젠월드의 예를 비교해 보자. 


실패로 돌아간 '투자 기부 프로젝트' 

벤저민 프랭클린은 미국의 위대한 지성으로 손꼽히는 사람이다. 정치가, 외교관, 저술가, 과학자, 언론인 등 수많은 영역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겼고, 그의 어록은 한 마디 한 마디가 금언으로 사람들 사이에 회자되고 있다. 그가 사용한 노트법까지도 '프랭클린 다이어리'와 같은 친숙한 형태로 오늘날까지도 우리 생활에 큰 영향을 주고 있으니, 이만한 팔방미인도 드물 것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인간인지라, 실수를 하기도 했다. 다행히도 실패가 드러난 것은 그가 죽고 200년이 흐른 뒤였다.

벤저민 프랭클린은 죽음이 눈앞에 다가왔을 때, 특이한 형태의 기부를 했다. 그의 자산 9000달러를 4500달러씩 나누어서 투자를 했다가, 200년이 지난 후 그 이익금을 각각 보스턴과 필라델피아 시민의 미래를 위해 사용하라는 유언을 남긴 것이다. 요즘도 기부를 하라고 하면 '돕고 싶긴 한데, 지금은 넉넉지 않으니 있는 돈을 불려서 나중에 더 많이 기부하겠다'는 사람들이 간혹 있는데, 벤저민 프랭클린이 이런 발상의 선구자였던 셈이다. 

그러면 그의 '투자를 통한 장기적 기부 계획'은 실제 어떻게 되었을까? 그는 200년이 지나면 그가 남긴 선물이 각각 900만 달러 가치에 이를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1990년, 투자 기간이 만기되었을 때 보스턴 시민들이 받게 된 금액은 500만 달러였으며, 필라델피아의 경우에는 겨우 225만 달러에 불과했다. 기대수익에 600만 달러나 못 미치는 액수다. 만약 요즘같은 시절에 펀드 매니저가 이런 투자를 했다면 틀림없이 감봉이나 해고 위협에 시달렸을 것이다. 프랭클린도 그동안 그의 자산을 관리한 사람들이 잘못한 것이라고 투덜거릴지도 모른다. 

그러나 설사 그가 원했던 목표가 성취되었더라도, 과연 오늘날 좋은 일에 사용하는 900만 달러로 얻은 혜택이 그가 1790년에 4500달러로 할 수 있었던 일들을 능가할까? 인플레이션을 어느 정도 고려하더라도 1790년에는 똑같은 4500달러로 지금보다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먼 미래의 큰 돈보다 당장의 작은 돈이 더 효율적이다

"장기적 기증은 즉각적인 필요에 사용할 수 있는 금액을 감소시킨다. 그리고 미래 세대를 위해 힘쓰기에 현재 우리가 맞닥뜨리고 있는 필요는 너무나도 긴급하고 또 간단하다." 미국 시어스백화점의 사장이며, 줄리어스 로젠월드 기금의 설립자이기도 한 줄리어스 로젠월드의 말이다. 20세기 초반, 그의 재단은 미국 남부에 거주하는 아프리카계 미국인들에게 교육을 제공하기 위해 로젠월드가 시어스를 통해 벌어들인 자산의 상당 부분을 지출했다. 로젠월드는 좋은 일에 사용되는 돈은 영구적으로 구속되기보다 가능한 한 빨리 써야 한다고 주장했고, 따라서 로젠월드 기금은 그가 사망한 지 16년만에 그가 남긴 기부금을 한푼도 남김없이 나눠주었다. 

주식투자는 장기적으로 해야 한다고 그렇게 모두들 말하는데도, 사람들은 번번이 단타매매에 올인하다가 손해를 본다. 그런 사람들이 유독 나눔과 기부는 장기적으로 하려고 하니 이상한 일이다. 지금 나누는 것과 나중에 나누는 것, 어느쪽이 더 효율적인지 답은 이미 나와있다. '하고 싶긴 한데, 나중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생각해 보기 바란다. 나중에 당신이 빌 게이츠같은 부자가 된다고 해도, 지금 당신이 작은 돈으로 도울 수 있는 인연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 사랑도 그렇고, 이별도 그렇고, 세상의 중요한 일이 거의 모두 그렇듯이, 가장 중요한 건 타이밍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박애 자본주의

매튜 비숍|마이클 그린 | 안진환 옮김

사월의책 2010.07.10

민혜영 기자 (mumuin@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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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에 없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은 매 초 딜레마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옳고 그름마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닥쳐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유네스코의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줄곧 ‘21세기의 대화’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토론에는 전 세계의 과학자, 지성인, 작가, 정책결정권자들이 참여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논점을 제시한다. 

아달베르토 바레토는 빈민가의 지역사회 정신보건을 위해 오랫동안 일해 온 브라질의 정신과 의사이다. 그는 가난과 소외과 물질적인 영역을 넘어 어떻게 인간의 내면을 황폐화하는지 꿰뚫어본다. 세상으로부터 버림받고 마치 유령처럼 자기 존재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아달베르토 바레토는 공동체 치료를 통해 자존감과 희망을 되찾는 길을 제시한다.



소외와 마음의 병
아달베르토 바레토

나는 12년 이상을 브라질 포르탈레자(Fortaleza) 근방에 위치한 거주자 28만 1,000명의 한 파벨라(파벨라favela. 브라질의 슬럼가, 빈민가, 뒤이어 나오는 파벨라두는 파벨라의 주민을 말한다.)에서 일해왔다. 포르탈레자는 인구 200만 명의 대도시이다. 여러 파벨라의 주민들이 가뭄 때문에 농촌에서 빠져나와 도시로 이주했고, 소외를 야기하는 불공정한 경제정책이 빚어낸 조용하고 보이지 않는 전쟁의 가담자들이 되었다. 외관상 무기가 없는 이 전투는 개인들의 영혼에 깊은 상처를 입힌다. 이 이주의 움직임이 그 개인들을 어떤 상실의 과정 속으로 끌어들이는데, 이 과정은 경제적 빈곤화로 시작하여 문화, 전문 지식, 사회적 관계와 자긍심의 빈곤화로 이어진다.

대도시로의 도착 자체가 가장 뿌리 깊은 쓸쓸함 속에서 이루어진다. 도시는 그들을 환영하지 않으며, 그들을 맞이하기 위해 자신의 문을 열어주지 않는다. 이주자들은 도시 주변의 외곽, 빈민 지대에 머무른다. 더 나은 미래에 대한 꿈이 단지 악몽에 지나지 않음을 그들이 깨닫는 데에는 아주 짧은 시간만이 필요할 뿐이다. 이제 일련의 또 다른 문제들이 시작된다. 어디에 살아야 하나? 수단도 없이 어떻게 집을 지을 것인가? 어떻게 아이들을 부양할까? 직업 훈련도 받지 않고 어떻게 일자리를 구할 것인가? 파벨라두(favelado)가 된다는 것은 지옥의 고통을 겪는 유령이 되는 것만큼이나 불안하고 절망스러운 일이다. 사람들과의 접촉을 추구하지만, 살아 있는 자들의 세계는 결코 그를 보거나 듣지 못한다. 추방당한 이들의 주변에서 들려오는 이 친숙한 주제들은 아마도 인정받지 못한 삶, 살아갈 공간을 가질 권리가 없는 삶의 실질적인 감정을 담아내고 있을 것이다. 지옥의 고통에 빠진 유령은 21세기 브라질에 나타난 마음의 질병들의 원형일까?


공동체 치료의 고안

이러한 맥락에서, 맨 처음 우리는 파벨라 인권 센터의 중개로, 정신적 고통을 겪고 있는 사람들 곁으로 가서 정신의학적인 상담을 해줄 것을 요청받았다. 단지 일회적이었던 이 개입들을 통해, 우리는 예를 들면 실직당한 남편을 두고 집도 먹을거리도 없는 여성과 비슷한 상황에 처한 한 개인을 어떻게 돌볼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 늘 자문하곤 했다. 대학에 몸담은 사람으로서, 우리는 또한 개인적이고 생의학적인 틀을 넘어서, 가족과 공동체의 수준으로 배려를 확대할 필요가 있었다. 대학에서 우리는 한 사람을 양성하는 것은 그 사람이 계속해서 다른 사람들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배운다. 그러나 이러한 방법은 수많은 사람이 즉각적인 치료를 필요로 하고 있는 파벨라의 상황에서는 효력이 없다. 그러므로 우리는 타인들에게 더 가까이 다가가기 위해서 우리의 작업 방식을 바꿔야 했다. 또한 우리는 구원자의 모델, 해결책을 실어 나르는 전문가의 모델과 단절하고, 빈곤함을 넘어 인간적 그리고 문화적인 잠재력을 보아야 할 필요가 있었다. 처음에, 빈곤함에 너무도 충격을 받은 사람들은 예외 없이 강연을 열고 싶어 하고 약품들을 주거나 조언을 주고 싶어 하지만, 그런 것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바가 아니다.

이 도전에 응하기 위해서 우리는 위기에 처한 사람들과 1주일에 한 번씩 만남을 가졌고, 우리가 '공동체 치료'라고 불렀던 것을 발전시켰다. 관건은 자각과 집단적인 반성의 공간, 모든 사람이 타인의 말을 경청하고 자신을 표현하도록 시도해볼 수 있는 장소를 제공하는 것이다. 고함 소리가 난무하고 폭력이 곧 행동으로 옮겨지고 가장 강한 자가 이기는 공간이 이 파벨라에서, 우리는 대담하게도 '이 고통을 말'로 옮길 수 있도록 대화와 표현의 공간을 창조하고자 했었다. 이 계획은 야심찬 것이었지만 결실을 가져왔다.

이러한 만남들을 통해서 우리는 그 집단이 치료 능력을 발휘하게 만들 수 있었다. 그런데 집단 속에서 사회조직이 공고해지고, 사회적 소속감이 일깨워지는 것은 바로 고통에 대한 상호적인 표현과 개인적인 경험들의 교환, 타인에 대한 지지와 애정 어린 관계, 문화적 가치의 강화를 통해서이다. 개인들은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을 발견하고 심사숙고한 끝에, 결국 성공적으로 더 나은 사회 통합에 이른다.

우리는 여기에 여러 해 전부터 우리가 채택해오던 R.A.P, 즉 '적극적 참여 행위 연구(Recherche Action Participative)'의 방식을 접목했다. 이 방식은 대학이 지식 생산을 독점하는 것에 대한 거부로 정의되며, 일반인을 향한, 일반인의, 일반인을 위한 지식에 호소한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우리는 마음의 질병들이 집단 자체에 의해 치료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 고통을 호소하는 사람들은 그들 자신 안에 해결책을 가지고 있다. 그래도 그들이 그것을 찾을 수 있도록 도울 필요는 있다.

이 모델은 우리가 이미 브라질의 가난한 13만 개의 공동체와 함께 작업하는 브라질 가톨릭교회의 기관인 아이들의 목자(Pastorale del'Enfance)와 협력하여, 2,600명의 정신 보건 요원-우리는 이들을 공동체 정신 치료 전문의로 부른다-을 양성한 이래, 오늘날 전 세계로 확대되고 있다. 이 정신 치료사들은 정신의학적인 어떤 해석이나 성찰을 행하는 대신, 문제에 대한 해결을 찾도록 집단을 동원한다. 가령 집단의 구성원 중 한 사람이 불면증으로 인해 고통스러워하면, 정신 치료사들은 다른 구성원들이 과거에 유사한 상황을 경험한 바가 있는지, 그리고 그들이 어떻게 그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는지 알아보도록 다른 구성원들의 관심을 유도한다.


병의 원인이 되는 세 가지 근본 축

: 버림받음
여러 파벨라 지역의 주민들은 사회로부터 거절당해 버림받았다는 감정과 애도의 감정에 빠져 있다. 어느 누구도 그들을 부축해주지 않는다. 이런 버림받음의 영향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 나타나고, 신체적 외관에서도 볼 수 있다. 상대적으로 젊은 사람들의 때 이른 주름들, 갈라진 치아를 가진 턱, 덥수룩한 머리. 그 영향들은 여러 명이 되는 아이들의 교육에 대한 책임을 떠맡아야 한다. 가족들은 거리에서 살아간다. 버림받음의 영향들은 또한 사회적인 수준에서도 표면화된다. 허술한 건축, 마분지와 목재 조각들로 이루어진 동네 모습은 이러한 삶의 이야기들, 가족의 조각난 실존, 개인적 실존이 지닌 내면의 상처를 반영하고 있다.

이 버림받은 상황을 극복하는 데에는, 매우 다양한 제각각의 방법이 존재한다. 지역 단체들과 조합들은 생필품과 음식물을 한데 모아, 연결망을 구축하는가 하면, 다른 한편 젊은 사람들은 모여서 종종 범죄에 빠지고, 그들 중 가장 감수성이 예민한 젊은이들은(우울증, 알코올중독, 약물 중독과 같은) 정신병적 대응물에 빠져들기도 한다.

종교적인 의식에 호소하기도 한다. 종교적인 예식들은 점점 집단적 카타르시스의 장소가 되고 있다. 신체가 느끼는 고통의 감정은 그 안에 깃들어 있는 영혼을 움직인다. 가톨릭적인 것이든, 아프리카계 브라질의 토속 종교적인 것이든, 개신교적인 것이든 간에, 일반적으로 모든 종교적 의식은 실존에 중점을 둔 진정한 배려가 되고 있으며, 그 안에서 사람들은 삶의 가혹함 때문에 생기를 잃은 영혼을 사랑하게 된다. 일부 종교들은 위협적이기도 하다. 특히 펜티코트스파(펜티코티즘(Pentecôtisme). 성령의 작용을 강조하고 생활의 성성(聖性)을 역설하는 미국에서 발생한 종교운동)의 새로운 교회들과 하나님 왕국의 범세계적인 교회(최근 들어 파리에 등장한)는 그들의 추종자들에게 모든 문화적인 믿음을 거부하도록 요구하고 있으며, 여러 세대를 거쳐 내면화된 준거 모델들과 단절하기를 권하고 있다. 이들이 야기하는 것은 사실상의 정체성 상실이며, 모두가 전적으로 따라야 하고, 다른 종교를 부정함으로써 긍정되는 종교적 가치에 맞추어진 거짓된 자아의 탄생이다. 악을 몰아낸다는 구실로 인간에게서 그 자신, 그의 믿음들, 그의 비판적인 생각, 그가 가진 가치들, 그리고 그의 영혼을 몰아내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아프리카계 브라질 종교인 움반다(Umbanda)와 같은 다른 종교들은 정체성 형성의 다양한 이미지들이 동거하는 새로운 가족 형태 안에서 환대받을 수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다. 이 정체성 형성의 다양한 이미지들은 민초들의 문화를 존중함으로써 좀 더 관용적인 형태의 공동체에 어울리는 것이 될 수 있다. 


: 치안 불안
치안 불안의 분위기는 사회 내부를 폭력과 분열로 들끓게 만드는데, 이는 그 분위기가 양산하는 비이성적인 행위들이 주는 공포로 인해 자극받고 지속된다. 파벨라에서 비행과 범죄, 공격 본능과 같은 폭력은 실업과 맞물려 더 심해진다. 부자가 자신의 키보드를 통해 가상세계의 웹에 들어간다면, 가난한 사람은 자신의 반사회적인 인터넷을 만들어 내는데, 이는 다른 사회단체들에까지 뻗어나간다. 나는 폭력 문화에 대해 언급하고 싶지는 않다. 이 폭력 문화는 모든 선진국의 패러다임이고, 영화 속에서 표현되는 첨단 기술적 대항-문화를 통해 유지되고 있다. 브라질에서는 TV가 폭력, 특히 모든 파벨라 지역 내에서 일어나는 폭력을 생방송으로 보여주는 프로그램까지 내보내고 있는 상황이다.

사회적 요소로서 치안이 상호 간의 신뢰를 만들어가는 데 필수적인 것과 마찬가지로, 치안이 보장된 삶은 또한 자신감을 가지고 자신의 본능을 지배하여 그것을 삶을 지탱할 힘으로 변형시키는 데 필수불가결한 것이기도 하다.


: 자존감의 상실
가장 비극적인 비참함은 눈에 보이는 것이 아니라, 파벨라두의 내면화된 비참함, 말하자면 무능력이라는 깊이 박힌 감정이다. 그들은 더이상 자신을 신뢰하지 않으며, 소외되었고, 사랑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모든 능력을 상실했다. 이 자존감의 상실은 개인적인 수준에서는, 가령 침묵 같은 것을 통해 드러난다. 브라질 사람들은 습관적으로 입술이 침묵할 때에는, 장기들(organes)이 말을 한다고들 이야기한다. 이 사람들이 집단 한가운데에서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그들이 타인들과의 접촉을 통해 배울 수 있는 가능성을 그들에게서 박탈하지 않기 위해 상당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은 두 말할 필요가 없다. 가족 내에서도 아이들을 깔보는 억압적인 교육은 아이들의 자존감의 상실은 직업상의 실패를 초래한다. 일자리는 구했지만 한 달 이상 자리에 머무르지 못하는 사람이 대다수이다. 불안감이 하도 커서 결국 그만두고 마는 것이다.

공동체 치료 기간과 병행하여, 우리는 자존감을 일깨우는 집단 프로그램을 실시했다. 사람들이 자신들의 잠재력과 자신의 문화가 가진 잠재력을 재발견하도록 하고, 또 이 잠재력을 한데 모아 개인적이면서 집단적인 동력을 만들어내도록 할 목적에서 말이다. 이 동력은 그들 각자가 자기 역사의 주체가 되고 자신의 존재를 책임질 수 있도록 이끌 것이다.


예방 정치를 위하여

버림받음과 치안 불안, 자존감의 상실과 관련된 문제들은 국가적인 차원에서 염려해야 하는 사태이다. 이 문제들로 인해 사회 내부가 폭력과 분열로 들끓게 되는 것이다. 그것들이 야기하는 공포와 비이성적인 행동들은 긴장과 절망, 불안의 분위기를 가중시키는데, 이것은 오직 집단적으로 활동하는 참여제도가 있을 때에만 해소될 수 있다. 이러한 제도들이 없거나 효력이 없을 때, 개인들은 자신의 규칙과 제도를 창조한다. 이 '자신의 일에만 충실한 각자'는 동족상잔의 폭력을 한층 더 강화시킨다.

고통을 받는 개인들이 창조적 활동을 하도록 복돋워주는 적합한 수단을 고안하는 것은 반드시 고유한 개인적 가치들과 이전에 실추된 문화적 가치들에 근거해야 한다. 이 새로운 수단은 참여적이고 공동체적인 맥락 속에서만 만들어질 수 있다. 선험적인 가치 체계를 자신에게 강요하지 않으면서, 각자가 지닌 경험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가장 적합한 해결책을 낳는 것은 바로 집단이다. 이러한 접근은 고통을 설명하는 모델과 이 모델이 함축하는 개입으로부터 비판적 거리를 유지할 것을 치료 전문가들에게 요구한다. 이러한 모델은 거의 대부분의 경우 선형적이고 환원적이다. 예를 들면 화학요법을 권장하는 생의학 모델이나, 때로는 교육적이지만 때로는 억압적인 행위들을 외부로부터 강요하는 사회적 모델이 그러하다.

개인의 자기 계발은 사회집단을 변화시키는 요인으로서, 절대 권력을 지닌 근대의 복지 국가 모델과 같은 간섭주의적 모델을 떨쳐버릴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그 모델은 종속을 강화하고 창조성을 질식시킨다. 예산 투자를 기다리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관건은 소외된 개인의 사회문화적 자본을 실제로 활용하여, 개인이 자신의 운명을 결정하는 과정에서 수동적인 희생자의 지위에서 벗어나 능동적인 주체가 될 수 있도록 하고, 그렇게 하여 그 개인이 사회 재건의 책임을 함께 떠맡고, 독립적인 삶을 영위하는 존재로서 비판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갖도록 하는 것이다.

정겨운 사회적 유대를 촉진시킬 만한 장소, 그래서 생활공동체에 새겨진 문화적인 소속감을 솟아나게 하는 장소를 만드는 것은 주체에게 필수적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장소에서 유대로 이동하는 일이며, 단 한 사람이나 정책이 모든 어려움을 해결해주리라고 기대하는 개인적인 모델을 벗어나는 일이다. 우리는 해답이 공동체적인 것에 있다고 확신한다. 참여 운동을 시작해야 하며, 이 운동을 통해 각자는 집단이 하나의 전체로서 완전하게 발전하고 풍요로워질 수 있도록 집단의 발전에 기여해야 한다.

자존감의 상실은 자기에 대한 앎과 관련하여 무지의 상태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누구나 자유롭게 발언할 수 있는 정체성 회복의 장소들을 마련하고 발전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학문적인 지식은 결국 소위 대중적 지식을 인정하고 한데 아울러야 한다. 소외당한 자들의 자존감 회복은 21세기가 지닌 마음의 질병들에 맞선 투쟁의 초석이 될 것이다.

치료 요법을 실시하는 동안 내가 들은 일화를 소개하는 것으로 글을 끝마치고 싶다. 세상의 혼란과 무질서에 반항하는 자신의 아들을 진정 시키기를 바랐던 한 아버지가 세계 지도를 작은 조각들로 찢어버리고는, 세상을 바꾸기를 원했던 아들에게 그 지도를 자기 방식으로 다시 맞추라고 요구했다. 그 아버지는 아들이 그 지도를 다시 완성하지 못할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30분이 흐른 후 아들은 그 지도를 다시 복원했다. 매우 놀라는 아버지 앞에서, 아들은 아버지가 그 지도를 찢기 전에 그 지도의 뒷면에 한 사람의 초상화가 그러져 있던 것을 보았다고 설명했다. 그러니까 그 아들의 유일한 관심은 그 사람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었고, 그 사람을 되찾으면서, 세상을 되찾았던 것이다.


<아달베르토 바레토 Adalberto Barreto>
정신과 의사이자 민족학자. 세아라 연방 대학 의과 대학 교수, 통합된 지역 사회 정신 보건 운동의 브라질 총괄 책임자이다. 그는 노르데스테의 빈민가 지역들, 특히 포르탈레자에서 작업하고 있다. 그는 여러 저작을 출간했으며, 그 중에는 L'Indien qui esten moi(1996)가 있다. 엘리안 콘티니Éliane Contini의 저서 Un Psychiatre dans la favela(1995)는 그의 경험을 기술하는 데 바쳐진 것이다.


<이 기사는 (주)문학과지성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06.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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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에 없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은 매 초 딜레마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옳고 그름마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닥쳐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유네스코의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줄곧 ‘21세기의 대화’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토론에는 전 세계의 과학자, 지성인, 작가, 정책결정권자들이 참여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논점을 제시한다. 

사회학자, 소설가, 수필가, 기자, 방송작가로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프랑스의 여류 저술가 드니즈 봉바르디에가, 우리 삶을 조각조각 해체하고 속박하는 현대의 시간 활용 문화에 대해 이야기한다.

 

시간의 속박과 영혼의 질병
드니즈 봉바르디에

오늘날, 누가 아직도 시간을 존중해야 한다고 믿을까? 글쓴이 나 자신은 현대적 시간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텔레비전 기자인 관계로, 나는 시간을 조각조각 나누고, 시간을 조롱하고, 끊임없이 시간에 맞서 싸워야 하는 직종에 종사한다. 다른 한편, 작가로서 나는 시간에, 이 거의 우회해갈 수 없는 글쓰기의 시간에 복종해야만 한다. 고백컨대 시간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며, 사로잡는다. 이러한 시간에 관한 불경이 영혼에 야기하는 질병을 분석하는 임무는 정신과 의사와 정신분석가에게 맡기겠다. 나는 단지 이와 같은 시간과의 끊임없는 경주가 나에게 불러일으키는 몇 가지 생각을 따라갈 것이다.



드니즈 봉바르디에. 저술가.


오늘날의 사회와 시간

오늘날의 사람들은 하나 이상의 시계를 소유하고 있으며, 그 시계들 중의 일부는 땅 위에서뿐만 아니라 물속에서도 시간을 확인할 수 있도록 방수 처리가 되어 있다. 그렇지만 사실 물에서는 시간이 멈춘다. 이제 집 안의 모든 방 안에서, 모든 공공장소에서 시계를 발견할 수 있다. 단 카지노는 예외인데, 왜냐하면 사람들은 보통 도박꾼에 대해 이렇게 말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인생 전체를 따기 위해(또는 잃기 위해) 건다!

우리는 또한 휴대전화 중독과 같은 새로운 정신적 질병들이 생겨나고 있는 것을 목격한다. 그런데 휴대전화가 기다린다는 관념을 사라지게 만들었다는 사실은 누구나 잘 알 것이다. 사생활이라는 관념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모두가 "나는 낭비할 시간이 없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처럼 사회가 모든 인간의 활동을 단축시키도록 강요하는 방식에 대해 성찰해보아야 한다. 예를 들면, 의학에서는 사용할 수 있는 자연 그대로의 기관들을 좀 더 내구력 있는 인공적인 기관들로 대체하려고 들 뿐만 아니라(이에 대해 우리 모두 매우 만족스러워한다). 어떻게 하면 외상의 치유에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을지에 대해서도 연구한다. 너무 많은 비용이 드는 우리의 보건 체계에서, 시간은 바로 돈이다! 요즘의 그 대단하다는 외과 수술들을 받으면, 여러분은 아침에 악성종양을 제거하고 나서 정오에는 다시 집으로 돌아갈 수 있다. 환자가 병원에서 머무르는 시간은 체계적인 방식으로 줄어든다.

이와 비슷하게 퀘벡에서는 빈소에서 망자들을 공개하는 기간이 전통적으로 3일이었으나 하루로 줄어들었다. 게다가 죽은 사람들이 곧바로 매장하거나 화장해달라고 유언으로 요구하는 일도 있다. 고인과 가까웠던 이와 같은 통과의례는 더 이상 존중되지 않는다.

시계의 관습적인 시간은 그것이 풍요 사회의 시간이냐 제3세계의 시간이냐에 따라 높은 가격이 매겨지거나 아니면 싸구려로 취급된다. 우리와 같은 서구 사회에서 시간이란 자원은 아마도 경제 시스템에서 가장 값비싼 재산일 것이다. 주식시장은 기술을 통해 가능해진 즉각성 덕분에 불타오른다. 눈 깜빡하는 순간이 100만 달러의 소득으로 혹은 손해로 변해버린다. 수익성을 계산해보면, 시간이란 항목은 최고의 중요성을 갖는다. 하나의 재화를 이루는 각각의 요소에는 시간 지수가 있다. 생산하는 데 걸리는 시간, 소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 낡은 것이 되는 데 걸리는 시간, 그리고 곧이어 제거되는 데 걸리는 시간과 같이 말이다. 따라서 미래의 고인이 유언을 통해 자기가 죽은 뒤 친지들이 애도하는 데 들일 시간을 〔미리〕 확정해놓는 행위는, 살아 있는 사람의 시간에 대한 이와 같은 상업적 접근을 통해 정당화된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 혐오스러운 계산에서 사건들, 마음의 상태들, 행복과 불행의 단편들 등 우리의 삶에서의 몇몇 측면을 예외로 할 수 있는 특권이 우리에게는 허락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빠르게 살아가기

다른 한편, 여가 활동을 짜는 과정에서 더 이상 고독에는 어떤 시간도 남겨두지 않는다. 북미 지역에서는 모든 것이 분단위로 구성된다. 그런데 여가란 정의상 자신의 시계를 쳐다보지 않는 것, 그리고 시간의 압박을 받지 않는 것이 아니라면 무엇이겠는가?


나는 25년 이상 TV에서 일해왔다. TV는 시간의 적이다. 가득 채워져 있는 것 같지 않은 시간, 또는 우리를 지루하게 만드는 시간에 대한 성마름이 아니라면 무엇이 채널 돌리기란 말인가? 언젠가 우리는 채널 돌리기가 지식의 전달, 아이들의 집중력, 타인과의 관계 구축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자문해봐야 할 것이다. 몇몇 철학자는 이미 시작하고 있는 일이다. 채널 돌리기는 분명 젊은 사람들이 수업 시간 동안 수업에 집중하는 데 어려움을 겪는 것과 관련이 있다. TV 앞에서 채널을 돌리면서 시간을 보내는 아이가 자신의 선생님을 '채널 돌리듯'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순식간에 공격적으로 변한다는 것은 그럴듯한 이야기이다!

창조적인 고독의 시간, 또는 잃어버린 시간과 자유 사이에 어떤 본질적인 관계가 있는 것은 아닐까? 유일하게 자유로울 수 있는 존재는, 독특한 정신적 추진력으로 시간의 이 상업적 모델을 떨쳐내고, '선함과 좋음을 관조'하는 데 헌신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성인군자 시대에 흔히들 말했었던 것처럼 말이다.

조금씩 조금씩 인간으로부터 그 자신을 앗아가는 이 고통 없는 인원 모집에 맞서, 인간이 거의 저항하지 않는다는 사실에 대해 경종을 울려야 하는 것 아닌가? 사랑의 관계가 꾀하는 바는 일종의 조화로운 완벽함으로의 희귀이다. 행복이 당신을 엄습해올 때, 당신은 시간이 멈추었으면 하는 강렬한 욕망을 느낀다. 그렇다면 다른 감정들처럼 사랑도 앞으로는 그에 도달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다 해놓았을 몇몇 사람만의 희귀한 특권이 되지 않을까? 예전에 성인의 경지에 도달하는 것이 그러했듯이 말이다. 우리는 사랑의 관계가 점점 짧아지는 경향을 띤다는 것을 알고 있다. 북미에서는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 각자의 삶이라는 한정된 시간 속에 새겨진 이 정서적 삶의 파열들은, 그것들이 진행되면 될수록, 각자가 가질 수 있는 자기 확신을 조각조각 가져가버리는 경향이 있다.

시인은 말한다. "오 시간이여, 너의 비행을 멈추고 그대, 자비로운 시간들이여, 당신의 흐름을 멈추시오." 지나간 과거의Passé 시인 라마르틴을 우리는 정말로 넘어선 것일까dépassé? 어쩌면 우리의 관례적인 인사말인 "어떻게 지내세요?"가 "시간 있어요?"라는, 끔찍하면서도 슬프게도 그토록 자주 쓰이는 이 다른 문구로 바뀌는 것을 모면하기 위해, 우리는 더더욱 그의 이야기를 들어야 하는 것 아닐까?


<드니즈 봉바르디에Denise Bombardier>
의사소통에 관한 사회학 박사이며, 수필가이자 소설가이다. 라디오-캐나다Radio-Canada의 기자인 그녀는 국제적으로 저명한 TV 방송의 작가이기도 하다. 그녀가 저술한 많은 책은 성공을 거두었다. 주요 저서로는 Une enfance à l'eau bénite(1985), La Déroute des sexes(1993), 특히 최근의 Ouf(2002)가 있다. 또한 정신과 의사이자 정신분석학자인 클로드 생-로랑Claude Saint-Laurent과 함께 Le Mal de l'âme. Essai sur le mal de vivre au temps présent(1988)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기사는 (주)문학과지성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06.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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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전에 없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은 매 초 딜레마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옳고 그름마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닥쳐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유네스코의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줄곧 ‘21세기의 대화’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토론에는 전 세계의 과학자, 지성인, 작가, 정책결정권자들이 참여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논점을 제시한다. 

조지 아나스는 ‘과학과 지식, 그리고 전망’을 주제삼은 대화에서 유전과학의 발달에 주목하였다. 유전과학은 우리에게 기술과 함께 전에 없었던 새로운 ‘관점’ 역시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관점은 다른 인간을 보는 관점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창이기도 하다.


 

유전자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미래의 가능성

조지 아나스

21세기가 인간유전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새로운 유전학 기술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변화시킬 뿐만 이니라,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를 바라보는 바로 그 방식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갖는 피상적인 인식 때문에 종종 인종주의가 생겨나곤 했다. 간단히 정의하면, 인종주의는 '인종이 인간의 변별적 특성들과 능력들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유전자 사냥, 특히 인종 분류를 따라 구별된 집단들에 대한 유전자 탐구는 DNA 배열 특징에 기초해 있는 '유전자주의' (아직 공식적으로 승인된 용어는 아니지만, 나는 이 용어를 유전자가 인간의 변별적 특성들과 능력들을 결정한다는 이론으로 정의하려고 한다)에 이를 수 있다. 이 유전자주의는 그 결과로서 인종주의만큼이나 파괴적인 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

새로운 유전학이 가져올 두번째 결과는 우리의 새로운 힘을 우리 자신을 변형시키는 데 이용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더 나은 아기,' 심지어는 다음-인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부류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는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경고했던 사태이다. 헉슬리의 세계는 어떤 검사를 통해 이루어진 세계였는데, 이 검사를 통해 유전적으로 '우등한 자들'이 범주적으로 '열등한' 인간을 노예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있음직한 결과는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다. 이는 기존의 인간들의 새로운 인간들을 제거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위험들을 각각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유전적 보편성, 아니면 유전자주의?

유전체학의 커다란 희망은 다음과 같다. 즉 유전체학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러한 증명으로 인해 우리는 인간들 내에 구별을 만들려는 경향을 버리고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유전체학은 이미 과학이 맡은 부분을 완수했다. 일례로 지난여름 인간 게놈의 밑그림이 발표된 이후,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크리스 스트링어Chris Stringer는 "우리들은 모두 피부 밑으로는 아프리카인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유전학자들도 다른 말들을 통해 동일한 지적을 했다. 한 유전학자는 "인종은 단지 피부 두께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고, 또 다른 학자는 "인종에 관한 어떤 것도 과학적이지 않다. 인종의 경계를 규정하는 어떤 종류의 어떤 유전자형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사적 부문에서 게놈 지도를 작성하려는 시도의 선두주자인 크레이그 벤터Craig Venter는 "인종은 사회적 개념이지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10만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이동하여 세계〔곳곳〕에 이주한 소수의 같은 부족들로부터 진화했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며, 따라서 유전학자들은 이러한 반인종주의의 메시지를 일반 사회에 알렸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유전학의 메시지는 인종주의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그것의 사악한 형제인 유전자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것이 유전자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매사추세츠 과학기술연구소의 유전학 지도자인 에릭 랜더Eric Lander는 우리 모두가 99.9퍼센트 유전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0.1퍼센트의 차이가 우리의 게놈 속에서 300만 개의 변이들을 구성해낸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유전적 변이들 하나하나가 유전적 속성에 기초하는 차별을 지지해줄 사이비 과학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주요 게놈 연구자들은 이 점을 인정해왔으며, 고용과 건강보험, 생명보험과 신체장애보험에서 유전자상의 차별을 금지하는 입법 조치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차별의 유일한 격투장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게놈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우리 삶의 가능성들을 바라보는 방식, 심지어는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에 끼치게 될 영향들이다. 유전학자들은 게놈 암호를 이해한다면 분자 수준에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분자나 원자 혹은 아(亞)원자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와 살이 있는 완전한 몸을 가진 인간존재로서 살아간다. 인간을 유전자들의 집합으로 보는 이러한 환원주의적 시각이 바로 유전자주의의 핵심에 있다.

그 하나의 예로 이제는 사라진 인간 게놈 다양성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종종 '사라지고 있는 세계의 부족들'로 칭해지는, 약 700개에 달하는 세계의 고립된 민족 집단들로부터 DNA 샘플들을 모으고자 노력했다. 이 프로젝트의 취지에서 보면, 그 집단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보다 과학이 그들로부터 DNA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전 세계에 있는 토착민은 몹시 완강하게 이 프로젝트를 거부했고, 그들의 인권이 미덥지 않고 환원주의적인 이 프로젝트보다 상위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들은 모두 피부 밑으로는 아프리카인이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DNA 중 차이를 만들어내는 0.1퍼센트 내에서 유전적 차이들을 찾아내려고 마음먹는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들 서로에 대해서 그런 차이들을 이용할 것이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철학자 에릭 유엥스트Eric Juengst는 이 점을 잘 지적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인구 유전체학의 잠재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차이들을 기술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과학적 쐐기를 생산하여 이미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사회적 균열 안에 박아 넣게 될 것이다."

피부색의 차이를 분자적 차이로 대체함으로써 인종주의가 남긴 자리를 유전자주의가 이어받는 것을 막는 일은 쉽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두 개 조치는 반드시 취해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유전자 프라이버시genetic privacy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유전자도 권한 부여를 명시하지 않고서는 분석될 수 없다. 물론 어떤 '유전자 신분증'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두번째로, '인종들'간의 유전자 차이들을 파악하는 것을 취지로 하는 사이비 과학적 프로젝트는 거부되어야 한다.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미래의 가능성

차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게놈들을 선별해내는 것은 더 많은 차별의 여지를 만들어낸다. 유전공학에 의한 '더 나은 인간' 만들기를 시도하기 위해 새로운 유전학을 이용하는 것은 차별을 넘어 제거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데, 이는 유전학적 종족 말살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선동적인 언어는 정당화되는가?

유전공학의 프로젝트는, 간단하게는 클로닝으로 알려져 있는, 처세포 핵 전이를 통한 인간의 유전자 복제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실존하는 한 인간의 유전자 복제물이 되는 아이를 창조하기 위한 클로닝 작업은 복제아clone child의  개성과 자유를 훼손하고, 동시에 그 아이를 우리 자신의 의지와 과학기술의 생산물로 만듦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우롱한다. 물론 당장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즉, 생산물이라는 점에서 복제된 아이들의 인권이 의문시될 것이며, 원본의 복제물이라는 점에서 이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류의 시민으로 취급받고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처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닝은 유전공학 프로젝트의 시작에 불과하다. 다음의 단계들은 유전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려는 시도, 그다음에는 초인이나 다음-인간을 창조하여 유전적 특성을 '개선'하거나 '향상'시키려는 시도들을 포함하고 있다.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전망을 가장 개연성 높은 귀결로 낳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이다. 그 까닭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우리가 다음-인간들이 우리와 동등한 권리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거나 또는 다음-인간들이 우리를 그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극도로 희박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가 그들을 위협적인 자들로 여겨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기 전에 가두거나 아니면 그냥 먼저 그들을 죽이려고 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아니면 반대로, 다음-인간이 우리(보통의 흔한 인간)를 노예로 삼거나 우선적으로 대량학살되어야 할 인권이 없는 열등한 하위 종으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고 이름 붙인 바 있는, 유전자 차이에 근거한 종족 말살의 가능성, 이것이 바로 종을 개조하는species-altering 유전공학을 잠재적인 대량학살 무기로 만들고, 책임 없는 유전공학자를 잠재적인 생물학적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책임 없는 유전공학자를 잠재적인 생물학적 테러리스트로 만든다. 조금은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르완다에서의 종족 말살을 막기 위해 미국이 조치를 취하지 못한 사실에 대한 분석이 보여주듯, 행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반드시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종족 말살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경우도 정치적·도덕적·상상적 결함들에서 기인하지, 정보의 결함들에서 기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유전학의 희망적인 측면은 유전학이 우리를 새롭게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 견인차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바클라브 하벨Vaclave Havel이 우리의 '종적 의식'이라고 말한 바 있는 것을 형성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이 종적 수준의 의식을 통해 우리의 유전과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결과들을 생각해보고, 예견 가능한 재앙을 막기 위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유전학의 잠재적인 폐해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명 윤리가 요청되어왔다. 그러나 생명 윤리가 의사-환자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개인의 결정에 초점을 두고 있는 한, 생명 윤리의 종(種) 전체에 걸쳐 있는 문제들과 대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생명 윤리가 도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잠재적으로 훨씬 더 효력을 갖는 기틀은 국제 인권이란 말과 그 실천이다.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인간사회의 주변부에서 활동하는 이단 종파나 그 밖의 이들이 인간 복제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세계에 어떤 계기를 마련해준다. 세계가 여태껏 극도로 어려웠거나 혹은 불가능했던 방식들로 예방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계기 말이다.

특히, 유네스코의 인간 게놈과 인권에 관한 세계 선언, 그리고 전 세계 사람과 정부가 보여준 인간 복제 계획에 대한 압도적인 반발은 인간 종의 보전에 관한 공식적인 조약의 체결로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지금 이를 제안하는 것이 합당하고 책임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 조약은 종 개조 기술과 종을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실험을 모두 금지해야 한다. 특히 인간존재가 지닌 유익한 근본적인 특성들에 대한 개조를 꾀하는 과학기술들을 금지해야 한다(이런 개조는 인간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에 클로닝-무성 복제-을 추가함으로써 유성생식을 선택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 결과 우리의 특성들도 선택 가능한 것이 되는 방식으로, 아니면 배아의 유전암호를 바꿈으로써 그 결과로 나온 아이가 인간의 아종이나 혹은 새로운 종의 일원으로 간주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종을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실험들이란 종 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실험들이다. 이종 이식을 위해 돼지의 기관을 이용하려는 요즘 유행하는 기획들이 그런 실험들인데, 이 기획은 HIV와 유사할 수 있는 새로운 치명적 인간형 바이러스를 생겨나게 할 위험이 있다.

이 조약은 또한 감시하고 검토할 수 있는 본부를 가진 민주적이고 책임 있는 시행 메커니즘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종을 개조시키거나 멸종시키는 범주 안에 있는 어떤 실험도 이 본부의 우선적인 조사 검열과 승인 없이는 합법적인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과 기업들의 개입이 생명 종에게 해가 되기보다는 훨씬 유익할 것이라는 점을 그들 스스로 증명하도록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이 조약은 종을 개조시키고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개입에 대해 환경운동의 사전주의 원칙 입장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우리에게 과학이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이끌고 가도록 내맡겨두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측면과 종적 자멸의 위험을 높이는 측면 양쪽 모두에서 너무 강력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서로에 대해 지는 상호적 책임을 더 이상 방기할 수 없다.


결론

나딘 고디머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 관한 그녀의 기존 관념을 뒤흔드는 시사적 소설 『가정의 총』에서, (친구를 죽인 한 젊은이의 부모인) 해럴드Harold와 클로디아 린드가드Claudia Lindgard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린드가드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만일 인종주의자가 다른 색의 피부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며, 피부색이나 종교, 국적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믿거나 믿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의사인 클로디아는 피부 아래에서는 살과 피, 그리고 고통이 모두 같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해럴드 역시 자신의 신앙을 통해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은 신의 피조물이며, 누구도 다른 이보다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 중 아무도 운동에 참여하거나, 항의하거나, 공개된 시위에서 행진을 하거나, 이러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의견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그것이 실패한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혈액형과 같이 변경할 수 없이 결정된 문제인 듯 말이다.

아파르트헤이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행동이 취해져야 한다. 비록 린드가드 집안의 사람들은 행위의 유전적 결정주의를 믿는 것 같지만, 당면해 있거나 임박할 우려가 있는 인권유린 앞에서 아무런 행위를 취하지 않도록 유전암호화되어 있거나, 그런 행위를 변명해 줄 어떤 유전자(혹은 혈액형 특성)도 없다. 유전자주의에 직면하여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우리는 다 함께 유전자 프라이버시를 촉진하고, 인간에 대한 클로닝과 유전공학을 막아야 하며, 존엄과 평등에 근거해 있는 보편적 인권을 촉진하고 보호해야 한다.

종적인 차원에서의 행동이 없다면, 유전자주의는 지구상의 가장 파괴적인 병폐로서 인종주의를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인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조지 아나스 George J . Annas>

보스턴 대학의 보건과 법학부, 생명 윤리와 인권학부 교수이다. 저작으로는 The Rights of Patients(1975), Some Choice: Law, Medicine, And The Market(1998), Health  and Human Right(1999) 등이 있다.


<이 기사는 (주)문학과지성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06.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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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9년 남녀별 신장·체중 그래프>

문화관광체육부에서 실시한 2009년 국민 체력실태 조사 결과, 한국 사람들의 평균 키가 줄어들고, 몸무게는 늘어난 것으로 밝혀졌다. 게다가 위 그래프를 보면, 키보다 몸무게가 빠르게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또한, 초등학생 5명 중 1명이 비만일 정도로 소아비만도 급증하고 있다. 


사람들의 체중 증가는 다양한 요리와 패스트푸드를 쉽게 접할 수 있게 된 환경 탓이 크다. 하지만 그 외에도 우리가 모르는 부분이 있다. 식품 개발자들이 교묘한 방법으로 사람들이 당분과 지방이 가득한 고열량 식품을 소비하도록 유도하고 있다는 점이다. 식품 개발자들은 이를 위해 ‘소비자들의 인식 부족’을 최대한 이용한다.
소비자들은 자신이 먹고 있는 것에 대해 잘 알지 못한다. 가능한 한 지방을 피하려 한다고 말하면서도, 블라인드 맛 테스트를 해보면 지방이 많이 든 음식일수록 더 좋아한다. 또한, 식품에 든 설탕과 소금의 양을 실제보다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고, 음료수를 어느 정도 마셨을 때 갈증이 해소되는지도 확실히 모른다.
미국의 음식 컨설턴트회사 센서리 스펙트럼의 설립자이자 회장인 게일 시빌은, 맛 평가단을 모집하여 참가자들에게 시식을 시킨 후 평가를 부탁했다. 하지만 참가자들은 대부분 “이게 좋아요. 맛있으니까요.”처럼 불분명한 표현밖에 하지 못했다. 자신이 무엇을 좋아하는지는 알지만 왜 좋아하는지는 알지 못하는 것이다. 식품 산업은 그 불확실성을 성공적으로 이용한다. 그럴듯한 선전문구와 긍정적인 이미지로 소비자를 안심시킨 후, 미각을 자극하여 자꾸 먹고 싶어지는 식품을 판매하는 것이다.


이번엔, (사)소비자시민단체가 2008년 10월 14일 발표한 소비자 리포트를 살펴보자. 국내에서 판매되고 있는 시리얼 대부분의 당함유량이 빨간 신호등으로 표현되어 있다. 그만큼 당류가 많이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사)소비자시민단체 e-리포트의 국내 시리얼 제품별 성분분석 

그리고, 이번에는 미국과 한국에 동시에 시리얼을 판매하고 있는 A사의 영양성분표를 살펴보자. 이 영양성분표를 보면 시리얼 30g당 11.4g의 당이 들어 있다고 나와 있다. 시리얼 한 상자가 전체의 3분의 1 이상, 180g이 넘는 설탕과 첨가당으로 채워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성분표에는 회사가 임의로 결정한 '1회 섭취량'을 기준으로 분량이 표기되어 있기 때문에, 이 사실을 한눈에 파악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영양성분표의 당류, 포화지방산, 트랜스지방, 콜레스테롤을 표기한 글씨가 작고 흐리게 표기되어 있는 것도 알 수 있다.

                                    <출처: A사 홈페이지의 영양성분표>  


눈속임은 또 있다. 시리얼의 본고장인 미국의 경우, 연방 규정에 따라 가장 많이 들어 있는 성분을 성분 분석표의 가장 윗줄에 적어야 한다. 즉, 원래대로라면 설탕이 가장 윗줄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시리얼에는 대개 설탕, 갈색 설탕, 과당, 고과당 옥수수 시럽, 꿀, 당즙이 함께 들어가 있다. 이런 여러 종류의 감미료가 들어 있으면 각각의 감미료 함유량은 적어질 수밖에 없으므로 성분표의 아랫부분에 표기할 수 있게 된다. 식품 회사에서는 이런 규정을 이용해 설탕을 성분표 맨 위에 적지 않는다. 

한국이나 미국의 식품회사가 의도하는 것은 엄마들이 설탕의 양을 제대로 알지 못하게 하는 것이다. 진짜 의도가 무엇이든, 식품 회사는 해당 식품에 설탕과 지방이 얼마나 들어 있는지를 영양성분표에 정확히 표시하지 않으며, 그것도 모자라 소비자들이 알아보기 어렵게 표시한다. 

정부가 영양분석표 표기를 의무화하는 법률을 만든 것은 소비자의 알 권리를 위해서이다. 하지만 식품회사는 결코 순순히 제품의 실체를 알려줄 생각이 없다. '칼로리 절반'이나 '무설탕' 같은 식품회사의 눈속임에 넘어가는 한, 바라는 만큼 건강한 식생활을 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과식의 종말

데이비드 A. 케슬러 | 이순영 옮김

문예출판사 2010.02.25

조애리 기자 (joaeri8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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