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움말: 이 글은 20년 동안 이루어진 프레디 머큐리와의 인터뷰 및 무수한 자료를 토대로 편집한 것이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가 뮤지션으로 활동한 전 기간에 걸쳐 이런저런 자리에서 직접 털어놓은 생각과 의견들이다. 프레디의 견해는 당연히 나이가 들면서 의미 있는 변화를 거쳤고, 세월이 흐르면서 그런 변화들이 그의 이야기에도 반영되었다. 지금부터 독자들이 읽는 것은 전부 프레디가 직접 한 말이다.

 

 

보기 드문 순간. 뮌헨의 뮤직랜드 스튜디오에서 프레디가 열창하는 모습. 《원 비전》을 녹음할 때다.  

그렇다, 난 게이다. 온갖 짓을 다 해봤다. 하지만 여자와 하듯 남자와 사랑에 빠지진 못한다. 게이 파트너를 찾으려고 작정하고 외출하지도 않는다. 이 세계에선 진실한 친구를 찾거나, 그런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가 무척 힘들기 때문이다. 내 친구들 중에는 게이도 많고 여자들도 많다. 나이 든 남자들도 많다! 나에겐 5년 동안 동거한 메리라는 여자 친구가 있었고 남자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폭넓은 성적 취향을 갖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그건 가능한 멀리까지 가보려는 것일 뿐이다.


난 평범한 인간이다.
나도 그저 한 인간이라는 걸 사람들이 알아주면 좋겠다. 난 장애인이나 마찬가지다. 모든 이가 무대 위 나의 페르소나를 좋아하기 때문이다. 어느 누구도 나의 참모습을 사랑하지 않는다. 모두 나의 명성∙스타덤과 사랑에 빠지기 때문에 대부분의 시간은 내 뜻과 반대로 된다. 난 관계를 원하지만 항상 그것과 싸워야 한다는 걸 느낀다. 내가 괴물을 만들어 낸 모양이다. 관계를 맺으려면 무대 위의 나를 인정해 줄 누군가를 찾아야 하는데 결코 쉽지 않다. 그 둘은 마치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분리하기가 무척 어렵다. 내 인생에도 몇 번의 로맨스가 있었지만 다 슬프게 끝났다. 진정한 누군가를 찾는 건 너무 어려운 일이다. 그들이 널 원하든, 팝 스타 프레디 머큐리를 원하든 무슨 상관이냐고 말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성공했다고 마냥 기뻐할 일만은 아니다.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서 이렇게 말할 때도 있다. “아냐, 오늘은 슈퍼스타가 되기 싫어. 나 혼자 길거리에 나가 보고 싶어.” 하지만 불가능한 일이다. 일단 유명인이 되고 나면 누군가에게 다가가서 “저기요, 나도 실은 평범한 사람이거든요.” 이렇게 말하기 힘든 법이다. 



                               1986년 고양이 티파니와 함께. 프레디는 첫 솔로 앨범 《미스터 배드 가이Mr Bad Guy》를 
                               어머니도, 
아버지도, 누이동생도, 퀸 동료들도 아닌 바로 자신의 고양이에게 헌정했다. 
                                     "이 앨범은 내 고양이 제리에게 바친다. 또 톰과 오스카 그리고 티파니에게도,
                                        
그리고 고양이를 사랑하는 세상 모든 사람들에게도. 나머지는 다 꺼져라." 


난 상처를 입더라도 내색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편이다.
마음속에 앙금을 품고 지내는 사람은 아니다. 배신당하는 그 순간 내 첫 반응은 이렇다. “나쁜 새끼, 나한테 걸리기만 해 봐라!” 하지만 그것도 차차 희미해져서 결국은 그냥 내버려 둔다. 그럴만한 가치도 없다. 가까운 친구들은 “어떻게 그렇게 모른 채 넘어갈 수 있었냐?”라고 묻는다.
글쎄, 난 원래 잘 속기도 하지만……멋진 사람이니까.


혹시 내 노래 <리빙 온 마이 오운>을 들어 보았는가?
그건 바로 나다. 혼자서 살아가되 즐길 줄 아는 것.
내가 스캣 창법으로 노래하는 중간 부분에도 그런 내용이 살짝 나온다. 다들 누군가 날 좋아하고 내 생활 방식을 좋아하는 사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할 때, 사실 난 세계를 돌아다니고 호텔을 전전하며 살아야 하고 그건 대단히 외로운 삶일 수 있다는 얘기다. 그래도 그건 내가 선택한 삶이다. 이 노래는 지하방이나 그런 여건에서 자력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다룬 노래가 아니라, 혼자 살아가는 ‘나’의 삶을 다룬 노래다. 그러니까 날 돌봐 주는 사람들이 한 무더기 있다 해도 결국은 그들 모두 가버리고 나 홀로 호텔 방에 남을 수 있다는 얘기다. 그렇다고 불평하는 건 아니다. 그건 내가 살아가는 또 다른 방식이니까. 곁에서 내 성공을 지켜 준 사람들 역시 외로울 수 있고, 그들 또한 혼자서 살아갈 수 있겠지. 난 그저 혼자 살아가면서 신나게 즐기고 있다는 말을 하는 거다. 이제 다들 이해가 되겠지?


난 마찰도 꽤 많이 빚는 편이다.
그래서 누군가와 관계를 맺을 만큼 쉬운 사람이 못 된다. 만나는 사람들에게 친절하게 대할 순 있지만 함께 살긴 굉장히 힘든 상대다. 날 참고 견딜 사람이 있을 것 같지 않아서 가끔씩 너무 열심히 노력하기도 한다. 어떻게 보면 내 욕심이 지나친가 보다. 난 그저 뭐든지 내 방식대로 하고 싶을 뿐인데, 누구나 그렇지 않은가? 난 사랑이 무척 많고, 주는 걸 아주 좋아하는 사람이다. 많은 걸 요구하지만 그 보답으로 많이 베풀기도 한다.
 

 

             뮌헨의 스튜디오에서 휴식을 취하며.  스크램블 게임에 한번 빠졌다 하면 프레디도 카메라를 피할 재간이 없다. 
                                      이때 퀸의 다큐멘터리를 촬영 중이었는데, 현장의 카메라 팀은 어쩔 수 없이
                                                             퀸의 녹
음이 끝날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대개 퀸은 엄격하게 비공개로 작업을 했다. 


난 인생을 충만하게 살고 있다.
성욕도 왕성하다. 닥치는 대로 동침하니까 마음대로 갖다 붙이시라! 내 침대는 여섯 명이 자도 될 만큼 아주 널찍하다. 난 성가신 문제에 휘말릴 일이 없는 것을 더 좋아해서 극도로 문란할 때도 더러 있었다. 한동안 아침마다 머리를 긁적이며 일어나서 오늘은 누구하고 할까 궁리하며 지내기도 했다. 난 굉장히 밝히지만 이제는 많이 가린다. 난 원하는 건 모두 얻고 싶다. 안전한 것도 좋지만 자유롭고도 싶다. 지금은 오로지 혼자 살고 있다. 믿거나 말거나. 그리고 그게 좋다. 전에는 혼자선 살 수 없을 것 같아서 주변에 사람들이 꼭 있어야 했는데, 이젠 혼자 살 수도 있다는 걸 알게 되었고 그게 좋다.
난 자유로움을 사랑한다. 새처럼 자유롭고 싶다. 자유로움에 너무 익숙해져 버렸다. 솔직히 말해서 지금 너무나 즐겁게 지내기 때문에 앞으로도 계속 그런 식으로 지낼 것 같은 기분이다. 하지만……앞일은 아무도 모르는 법! 사람은 누구나 변하기 마련이어서, 나와 같은 또래로 40대인 엘튼Elton John[영국태생의 가수이지 작곡가]처럼 갑자기 정착해서 아이들이 갖고 싶어질지 모른다. 엘튼은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빨리 그렇게 된 것 같다. 조금 더 기다려야 할 줄 알았던 엘튼이 그렇게 될 줄 누구도 알 수 없었듯이 그런 일도 생길 수 있는 거다.

라이브 에이드 분장실에서 사진작가 데이비드 베일리David Bailey와 프레디가 함께한 영원히 남은
소중한 순간.
   그리고 같은 때 엘튼 존과 함께. 두 전설이 같이 있다니! 

난 음악과 결혼한 것이 아니라 사랑과 결혼했다. 그럴 시간도 없겠지만 어쨌든 음악과 결혼하진 않았다. 음악은 내 일이고 직업이다. 아침에 출근해서 저녁에 퇴근하지는 않더라도 내 직업이다. 난 음악을 생계 수단으로 여긴다. 난 철저히 낭만적인 사람이고 사랑과 사람들과 결혼했다.


난 태풍이 지나간 후의 진정한 고요 같은 걸 원했다.
모두 내가 폭풍 같은 관계를 맺을 거라고 기대한다. 사실상 나는 대중매체 활동으로 먹고살고 있고, 누구든 그 일에 휘말리면 나처럼 살게 될 거라고 생각했다. 난 항상 배의 선장이자 대변인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열심히 일했고 만인을 위해 심지어 무대 밖에서도 공연했는데 가끔은 그냥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다른 사람들이 하게 두자. 넌 그냥 너 자신을 찾아서 평범해지려고 노력하는 거야.’ 공연을 해야 한다고, 내가 어디에 있든지 공연과 모든 걸 책임져야 한다고 생각하다가 또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냐, 그럴 필요 없어. 사람들에게 이제 지겹다고 말해.’ 그건 근사한 일이다. 그러면 사람들은 이렇게 말할지도 모른다. “세상에, 지겹다고? 어떻게 그런 말을 하지?” 하지만 난 이제 그게 좋다. 지겨우면 지겹다고 말하고 다른 일을 찾아서 기분 전환을 한다. 사람들은 내가 자신들을 즐겁게 해 주길 바란다. 예전에 누군가 나에게 지루하다고 말했다면 난 아마 미쳐서 안절부절못했겠지만…… 지금은 그게 좋다.


난 현재 맺고 있는 관계에 행복을 느끼고, 솔직히 그 이상을 바랄 순 없다.
일종의 위안이 된다. 그래, 그게 적절한 말이다. 우린 그걸 갱년기라고 부르지 않는다! 거기엔 요즘 내가 받은 그런 종류의 위안이 있다. 이젠 너무 열심히 애쓸 필요가 없다. 나 자신을 입증할 필요도 없다. 난 무척 배려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꽤 따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근사한 일이다.

마침내 난 평생 찾던 둥지를 발견했고, 이 세상 어떤 빌어먹을 놈도 그걸 망치진 못할 거다.
 *1984년에 프레디는 짐허튼Jim Hutton[머큐리의 마지막 연인이었던 허튼은 미용사로 1990년 에이즈 양성판정을 받았다.]을 만났다. 두 사람은 1991년 프레디가 사망할 때까지 커플로 함께 지냈다.

                 

 "고맙습니다, 신의 축복을 받으시고 달콤한 꿈 꾸시길!" 
이 말은 프레디가 1977년에 런던에서 가졌던 얼스 코트 공연에서 무대를 떠날 때 던진 말이다. 
나중에 다른 콘서트에서도 비슷한 인사말을 많이 던지긴 했지만. 이 사진은 매직 투어 중 콘서트가
 너무
 순식간에 끝나자 프레디가 자신에게 푹 빠진 관중들에게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하는 모습이다.


프레디 머큐리(Freddie Mercury, 1946년 9월 5일~1991년 11월 24일)는 영국의 대중음악 가수이다. 퀸의 리드싱어로 4옥타브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재능있는 보컬로 널리 알려져 있다. 2001년 로큰롤 명예의 전당(Rock and Roll Hall of Fame) '공연자(performers)' 부문에 올랐다. 최대의 히트 앨범 《어 나이트 앳 디 오페라 A Night at the Opera》(1975)에 수록된 《보헤미안 랩소디 Bohemian Rhapsody》는 9주 동안이나 영국의 인기순위 1위에 올랐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원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프레디 머큐리

그레그 브룩스 | 문신원 옮김

뮤진트리 2009.07.07

정다운 기자 (dawn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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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속 17km로 카레이싱에 우승한 자동차


모터스포츠는 자동차의 탄생과 동시에 생겨났다. 자동차를 만들어낸 제조자들은 마차를 대신하는 이 값비싼 발명품을 실용적인 탈것으로 인정받기 위해 경쟁자보다 뛰어난 성능을 입증해야 했고, 가장 좋은 방법은 레이스로 승부를 겨루는 것이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로마 시대의 관중이 2륜 전차 경주에 열광했듯이 새로운 스포츠에 쉽게 빠져들었다.
역사상 가장 처음 열린 자동차 경주는 1894년 프랑스의 신문 <프티 주르날(Le Petit Journal)>이 주최한 파리-루앙 126km구간 경기였다. 당시에는 모터스포츠의 개념이 정립되지 않아 가솔린차, 전기차, 증기차 등 다양한 엔진을 얹은 차들이 마구잡이로 출전했다. 

 

1899년 경의 증기자동차. (빅터 사)


에밀 르바소와 르네 파나르, 그리고 파나르-르바소의 자동차.

이 대회에서는 세계 최초로 자동차 제조 공장을 건립해 유명해진 파나르 르바소(Panhard Levassor)팀이 우승을 차지했다. 파나르 르바소는 공동 설립자인 에밀 르바소 (Emile Levassor)와 르네 파나르(Rene Panhard)의 이름을 딴 메이커로 1960년대까지 활동하다 시트로엥(Citroën)에 합병되었다.
이 대회에서는 드 디옹 부통(De Dion-Bouton)의 증기 자동차가 가장 먼저 결승점에 골인했지만 트레일러를 달고 달려 대회 규칙 위반으로 탈락, 평균 시속 17km로 달린 파나르 르바소가 우승했다.


<이 기사는 다우출판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

카레이싱 이야기

김재호

기쁜하늘 2005.10.22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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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뒤에 우승한 챔피언
F1 그랑프리의 기구한 죽음들

짜릿하고 아찔한 자동차 경주. 그중에서도 대표적인 경기가 포뮬러 원 그랑프리(F1)이다. 세상에서 가장 빠른 자동차, 땅 위에서 가장 빠른 사람을 가리는 이 경기에는 연간 200만명이 넘는 관객이 몰린다. 월드컵, 올림픽과 함께 세계 3대 스포츠 이벤트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F1 경주의 짜릿함 이면에는 가슴아픈 역사가 있다. 수많은 사망 사고들이 그것이다. 그중에는 사실로 믿기 힘들 정도로 기구한 사고도 여럿 있다.

목이 잘린 참사

오스트리아 드라이버 헬무스 쾨닉(Helmuth Koinigg)은 1974년 미국 그랑프리에서 서티스(Surtees)팀 경주차를 몰다가 브레이크 파손으로 가드레일을 들이받았다. 이 가드레일이 찢어지며 흉기로 돌변해 그의 목을 잘랐다.

죽은 뒤 챔피언 결정
1970년 로터스(Lotus)팀의 간판 주자 요헨 린트(Jochen Rindt,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 그랑프리에 출전하면서 부인에게 챔피언이 되면 바로 은퇴하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예선전에서 서스펜션이 부러지면서 경주차가 구조물을 들이받는 사고가 났고, 린트는 안전벨트가 몸을 압박하여 사망하고 말았다.
비록 죽긴 했어도 린트는 앞선 9차례의 경기에서 5승을 거두며 높은 득점을 쌓아 그 해의 챔피언이 되었다. 린트의 사망 이전 점수를 뛰어넘는 드라이버가 없어 모터스포츠 역사상 전무후무한 ‘사후 챔피언’이 탄생한 것이다. 부인과의 은퇴 약속은 기구하게도 ‘죽음’으로 지켜졌다.

나는 새와 부딪혀 사망
1960년 벨기에 그랑프리에 참가한 알렌 스테이시(Alen Stacey, 영국)는 날아오는 새와 부딪쳐 사망했다. 헬멧 제조 기술이 현재처럼 발달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인지, 빠른 속도로 달리는 드라이버의 안면으로 뛰어든 새는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달리다
소화기에 머리 맞아 사망
영국 드라이버 톰 프라이스(Tom Pryce)는 1977년 카얄라미(Kyalami)에서 열린 남아프리카 그랑프리에서 반대편에 있던 경주차를 구조하기 위해 트랙을 가로질러 가던 오피셜 요원을 들이받아 사망하게 했다. 그리고 자신도 따라서 세상을 떴다. 오피셜이 들고 있던 소화기에 머리를 맞았기 때문이다.

사고 뒤 후송되어 의료 사고로 사망
스웨덴 레이서 로니 피터슨(Ronnie Peterson)은 1978년 이탈리아 그랑프리에서 로터스 경주차를 몰다가 사고로 두 다리가 부러졌다. 죽음에 이를 정도의 충격은 아니었지만 병원으로 옮겨 치료를 받다가 의료사고로 사망했다. 


현재 F1그랑프리가 열리는 경기장에는 반드시 메디컬 센터가 갖춰져 있다. 행사 당일에는 2대 이상의 구급차는 물론 소방차, 구조 헬리콥터 등이 배치되고 일반외과의, 정형외과의, 마취의, 화상전문의는 물론 뇌신경전문의까지 대기하여 ‘움직이는 응급실’을 차린다. 많은 비극적인 사고를 교훈삼아, 국제자동차연맹과 각 개발사에서는 경주의 안전도를 높이려는 노력을 거듭했다. F1의 안전 규정과 개발 제한은 끊임없이 강화되고 있으며, 방호벽과 차체의 충격 흡수 능력, 레이서의 방염복 제조 기술 등 모든 부문에서 발전이 이루어지고 있다. 

1994년 레이싱 스타 아일톤 세나(Ayrton senna)의 죽음을 마지막으로, 현재까지 F1에서는 사망 사고가 나지 않고 있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하여 뉴스인북 편집단에서 작성하였습니다.>
 
카레이싱 이야기

강재형|김재호

기쁜하늘 2005.10.22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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