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도는 커피 마시지 말라고? 커피와 부의 역사
커피 상인은 17c에도 부동산 부자.. 교역으로 막대한 부 쥐어

시내를 걷다 보면, 전철역 앞이나 사거리 같은 노른자위 땅마다 어김없이 스타벅스, 커피빈 등의 커피전문점이 들어서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얼마나 돈을 많이 벌기에 저런 위치에서 장사를 할까 싶기도 하다. 오늘날 커피산업의 규모는 헤아리기가 어려울 정도로, 스타벅스와 같은 다국적 대기업은 우리나라에서뿐만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막대한 부를 긁어모으고 있다.

그런데 사실, 커피 사업자들이 부자인 것은 어제오늘 일이 아니다. 이미 300년 전 과거에도, 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유럽 등지에서 커피 교역을 하는 커피 사업자들은 제일가는 부동산 부자였다.

커피의 어원은 아랍어 ‘카화’

커피의 원산지는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지만, 세계로 전파된 것은 아라비아를 통해서다. 유럽이 한창 중세의 미몽에 빠져 있던 13세기, 아덴 만을 사이에 두고 에티오피아로 건너편에 자리 잡은 예멘 항구 아덴은 이미 커피 집산지였다. 예멘은 인도양과 홍해, 아프리카와 아라비아를 잇는 교역의 십자로다. 예멘에 전해지면서 커피나무 열매는 '분(Bun)', 음료인 커피는 '카화(Qahwah)'라고 불리게 된다. '카화'가 커피의 어원이다. 무슬림에게는 음주가 금지되어 있었기 때문에, 에티오피아에서 커피가 건너오자 음료로 곧 환영을 받았다. 카이로의 수피들은 커피의 각성 효과에 주목하고 철야 기도 때 잠을 쫓기 위해 커피를 마셨다.

커피는 북상하여, 1554년에는 오스만 제국의 수도 이스탄불에 세계 최초의 커피 하우스가 출현한다. 이 시대에 이집트에서 커피에 설탕을 넣어 마시는 습관이 시작되었고, 커피는 오스만 제국을 거쳐 프랑스로 전해졌다.

커피는 유럽에서 한때 일부 기독교도의 반발에 부딪히기도 했다. '무슬림 음료'라며, 판매 금지 조치를 해달라는 청원이 로마 교황청에 접수된 것. 교황 클레망 8세는 이에 대해 1600년 기독교도들이 커피를 마실 수 있다는 결정을 내려야 했다.


이집트 최고 부동산 소유자는 커피상인

오랫동안 이집트 국부의 근원이었던 인도에서 오는 향신료 독점 무역이 대항해 시대를 맞아 무너지고, 커피는 17세기 이를 대체하는 교역품이 되었다. 커피는 피륙과 함께 이집트의 당시 양대 무역 물품이었고, 이에 종사하는 상인의 수는 17,18세기에 500~600명이었다. 이들 상인은 이집트 경제를 좌지우지했다. 1679년에서 1700년 사이에 카이로의 등기부에 오른 168건의 부동산 중에서 커피 상인 80명의 부동산이 전체 부동산 가액의 64%를 차지할 정도였다. 18세기 초반 최고가의 부동산을 소유하고 있는 사람도 커피 상인이었다. 커피 상인 카심 알 샤라이비(Qasim al-Sharailby)의 보유 부동산은 시세가 884만 9660파라였다. 카심 알 샤라이비는 커피 상인연합회 수장이었는데, 1734년 죽었을 때 그의 재산 규모는 강력한 장군들의 재산과 비교해도 상당한 규모였다고 프랑스의 이집트 학자 앙드레 레이몽은 말했다. 카심의 장례식에는 모든 고위직 마믈룩(권력을 가진 복속민. 무사계급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다.)이 조문을 했다고 하니, 대상인의 높은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당대 최고 권력자 우스만 캇크후다(Uthman Katkhuda al-Qazdaghli)는 애도를 위해 장지까지 걸어서 장례 행렬을 따라가기도 했다.

커피 상인 중에는 외국인도 많았다. 1776~1798년에 섬유와 커피 무역에 종사하는 무역상은 142명이었고, 이 중 44%인 63명이 외국인이었다. 이들은 전체 부의 44%를 쥐고 있었다. 이집트의 개방성에, 오스만 제국에 편입되면서 카이로의 무역 집산지 기능이 강화된 탓이었다.


궁전 같은 집 짓고 황제처럼 호화로운 생활

나폴레옹이 카이로를 점령하고, 1798년 12월 수에즈에 갔을 때 카이로 상인들이 일부 수행했는데, 상인들은 최소 8명의 하인을 데리고 왔다. 하인 한 명은 주인의 물담배 파이프를 들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커피를 끓였으며, 세 번째 하인은 천막을 책임지는 식이었다. 한 상인은 나폴레옹 장군의 수행원이 단출함에 놀라 "하잘것없는 무역상인 나도 11명의 하인이 도와주는데 이 나라에서 무슨 일이나 할 수 있는 사람이 단 세 명의 시중을 받고 있다니"라고 말했다.

17세기 후반의 커피 무역 붐은 카이로의 건축에 새로운 활기를 불어넣었다. 일부 상인이 지은 집은 작은 궁전과 같아, 19세기 초 통치자 무함마드 알리는 이들의 집을 외빈 숙소로 사용하기도 했다. 무역 붐에 따라 대상 숙소도 속속 새로 들어섰다. 6개의 대상 숙소가 1699~1702년에 세워진다. 18세기 가장 두드러진 커피 상인이었던 무함마드 알 다다 알 샤라이비는 칸 알 함자위 시장 인근에 대상 숙소를 지었다. 큰 문을 열고 들어가면 1층에는 14개의 점포가 있었고, 그 위로 3층까지는 숙소였다. 대상 숙소는 대개 4층 구조로 만들어져 있는데, 1층에는 상점이 있고, 그 위에는 숙소가 있다. 가말리야 거리에 있는 대상 숙소 '바자르 위칼라'에는 1인용 독방부터, 3개의 방을 3개 층에 걸쳐 함께 쓰는 스위트룸도 있었다.

지금도 카이로의 베인 알 카스린 거리에는 18세기의 커피 상인 무스타파 가아파르(Ga' far)의 웅장한 저택이 그대로 남아 관광객들에게 당시의 호사를 엿볼 수 있게 해준다. 향신료, 그리고 커피. 예나 지금이나 막대한 부를 가져오는 사업이 생필품이 아닌 기호품, 사치품 사업이었다는 사실은 현재의 우리에게 막연하게나마 시사하는 바가 있다.


<이 기사는 아래 책을 출처로 뉴스인북 편집단이 작성하였습니다.>

함두릴라 알카히라

최준석

메디치미디어 2009.05.10


이진의 기자 (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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