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전에 없이 불안한 시대를 살고 있다. 사회가 너무 복잡해져서 사람들은 매 초 딜레마를 만나야 하고, 우리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시시각각 변하는 세상은 당장 하루 앞도 예측할 수 없게 만든다. 때로는 가장 단순한 옳고 그름마저 사라져가는 것이 아닌가하는 두려움이 닥쳐온다. 

그러나 그럴수록,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한 고민을 멈출 수 없다. 유네스코의 미래전망 분과와 철학 및 인문과학 분과는 1997년부터 줄곧 ‘21세기의 대화’를 진행해오고 있다. 이 토론에는 전 세계의 과학자, 지성인, 작가, 정책결정권자들이 참여하여 미래를 전망하고 사회의 중요한 가치에 대해 귀중한 논점을 제시한다. 

조지 아나스는 ‘과학과 지식, 그리고 전망’을 주제삼은 대화에서 유전과학의 발달에 주목하였다. 유전과학은 우리에게 기술과 함께 전에 없었던 새로운 ‘관점’ 역시 제공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관점은 다른 인간을 보는 관점인 동시에 우리 자신을 들여다보는 창이기도 하다.


 

유전자주의와 인종주의,
그리고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미래의 가능성

조지 아나스

21세기가 인간유전학의 시대가 될 것이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거의 없다. 새로운 유전학 기술은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에게 무엇을 할 수 있을지를 변화시킬 뿐만 이니라, 더 중요하게는, 우리가 우리 자신과 서로를 바라보는 바로 그 방식까지도 변화시킬 수 있을 잠재력을 지니고 있다.

과거에는 우리가 서로에 대해 갖는 피상적인 인식 때문에 종종 인종주의가 생겨나곤 했다. 간단히 정의하면, 인종주의는 '인종이 인간의 변별적 특성들과 능력들을 결정한다는 이론이다. 유전자 사냥, 특히 인종 분류를 따라 구별된 집단들에 대한 유전자 탐구는 DNA 배열 특징에 기초해 있는 '유전자주의' (아직 공식적으로 승인된 용어는 아니지만, 나는 이 용어를 유전자가 인간의 변별적 특성들과 능력들을 결정한다는 이론으로 정의하려고 한다)에 이를 수 있다. 이 유전자주의는 그 결과로서 인종주의만큼이나 파괴적인 차별을 불러올 수 있다.

새로운 유전학이 가져올 두번째 결과는 우리의 새로운 힘을 우리 자신을 변형시키는 데 이용하고 싶어 하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우리는 '더 나은 아기,' 심지어는 다음-인간이라는 완전히 새로운 부류를 창조하려고 시도할 것이다. 이는 헉슬리가 『멋진 신세계』에서 경고했던 사태이다. 헉슬리의 세계는 어떤 검사를 통해 이루어진 세계였는데, 이 검사를 통해 유전적으로 '우등한 자들'이 범주적으로 '열등한' 인간을 노예 상태로 만들 수 있었다. 그보다 더 있음직한 결과는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다. 이는 기존의 인간들의 새로운 인간들을 제거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는 그 반대가 될 수도 있다. 나는 이러한 위험들을 각각 간략하게 설명하고, 그것들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제안하고자 한다.


유전적 보편성, 아니면 유전자주의?

유전체학의 커다란 희망은 다음과 같다. 즉 유전체학이 인간은 본질적으로 모두 같다는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고, 이러한 증명으로 인해 우리는 인간들 내에 구별을 만들려는 경향을 버리고 모든 인간은 본질적으로 같다는 시각을 가지게 될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유전체학은 이미 과학이 맡은 부분을 완수했다. 일례로 지난여름 인간 게놈의 밑그림이 발표된 이후, 런던 자연사박물관의 크리스 스트링어Chris Stringer는 "우리들은 모두 피부 밑으로는 아프리카인이다"라고 말했다. 다른 유전학자들도 다른 말들을 통해 동일한 지적을 했다. 한 유전학자는 "인종은 단지 피부 두께에 지나지 않는다"고 지적했고, 또 다른 학자는 "인종에 관한 어떤 것도 과학적이지 않다. 인종의 경계를 규정하는 어떤 종류의 어떤 유전자형도 존재하지 않는다"라고 언급했다. 사적 부문에서 게놈 지도를 작성하려는 시도의 선두주자인 크레이그 벤터Craig Venter는 "인종은 사회적 개념이지 과학적 개념이 아니다. 우리 모두는 지난 10만 년 동안 아프리카에서 이동하여 세계〔곳곳〕에 이주한 소수의 같은 부족들로부터 진화했다"고 결론지었다."

이것은 아주 바람직한 일이며, 따라서 유전학자들은 이러한 반인종주의의 메시지를 일반 사회에 알렸다는 점에서 칭찬받을 만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유전학의 메시지는 인종주의를 약화시키는 동시에 그것의 사악한 형제인 유전자주의에 활력을 불어넣는다. 이것이 유전자주의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매사추세츠 과학기술연구소의 유전학 지도자인 에릭 랜더Eric Lander는 우리 모두가 99.9퍼센트 유전적으로 동일함에도 불구하고, 0.1퍼센트의 차이가 우리의 게놈 속에서 300만 개의 변이들을 구성해낸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유전적 변이들 하나하나가 유전적 속성에 기초하는 차별을 지지해줄 사이비 과학의 근거로 사용될 수 있다. 주요 게놈 연구자들은 이 점을 인정해왔으며, 고용과 건강보험, 생명보험과 신체장애보험에서 유전자상의 차별을 금지하는 입법 조치를 요구해왔다. 그러나 이것들이 우리가 관심을 가져야 하는 차별의 유일한 격투장은 아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게놈에 관한 우리의 지식이 우리가 우리 삶의 가능성들을 바라보는 방식, 심지어는 우리의 친구들과 가족들이 우리를 바라보는 방식에 끼치게 될 영향들이다. 유전학자들은 게놈 암호를 이해한다면 분자 수준에서 우리의 삶을 이해하는 것도 가능하리라고 말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분자나 원자 혹은 아(亞)원자 수준에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피와 살이 있는 완전한 몸을 가진 인간존재로서 살아간다. 인간을 유전자들의 집합으로 보는 이러한 환원주의적 시각이 바로 유전자주의의 핵심에 있다.

그 하나의 예로 이제는 사라진 인간 게놈 다양성 프로젝트를 들 수 있다. 이 프로젝트는, 종종 '사라지고 있는 세계의 부족들'로 칭해지는, 약 700개에 달하는 세계의 고립된 민족 집단들로부터 DNA 샘플들을 모으고자 노력했다. 이 프로젝트의 취지에서 보면, 그 집단의 사람들을 돕기 위해 실제로 어떤 행동을 하는 것보다 과학이 그들로부터 DNA를 수집할 수 있는 기회를 얻는 것이 더 중요했다. 전 세계에 있는 토착민은 몹시 완강하게 이 프로젝트를 거부했고, 그들의 인권이 미덥지 않고 환원주의적인 이 프로젝트보다 상위에 놓여야 한다고 주장했다.

"우리들은 모두 피부 밑으로는 아프리카인이다"라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우리가 우리의 DNA 중 차이를 만들어내는 0.1퍼센트 내에서 유전적 차이들을 찾아내려고 마음먹는다면, 우리가 그것들을 발견할 수 있으며, 우리들 서로에 대해서 그런 차이들을 이용할 것이라는 점 또한 사실이다. 철학자 에릭 유엥스트Eric Juengst는 이 점을 잘 지적했다. "우리가 서로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한 인구 유전체학의 잠재력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우리의 차이들을 기술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한다면, 그것은 불가피하게 과학적 쐐기를 생산하여 이미 우리를 갈라놓고 있는 사회적 균열 안에 박아 넣게 될 것이다."

피부색의 차이를 분자적 차이로 대체함으로써 인종주의가 남긴 자리를 유전자주의가 이어받는 것을 막는 일은 쉽지 않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음의 두 개 조치는 반드시 취해져야 할 것으로 여겨진다. 우선 유전자 프라이버시genetic privacy는 반드시 보호되어야 한다. 어느 누구의 유전자도 권한 부여를 명시하지 않고서는 분석될 수 없다. 물론 어떤 '유전자 신분증'도 허용되어서는 안 된다. 두번째로, '인종들'간의 유전자 차이들을 파악하는 것을 취지로 하는 사이비 과학적 프로젝트는 거부되어야 한다.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미래의 가능성

차이들을 찾아내기 위해 게놈들을 선별해내는 것은 더 많은 차별의 여지를 만들어낸다. 유전공학에 의한 '더 나은 인간' 만들기를 시도하기 위해 새로운 유전학을 이용하는 것은 차별을 넘어 제거로까지 치달을 수 있는데, 이는 유전학적 종족 말살의 가능성을 제기한다. 이 선동적인 언어는 정당화되는가?

유전공학의 프로젝트는, 간단하게는 클로닝으로 알려져 있는, 처세포 핵 전이를 통한 인간의 유전자 복제에서부터 출발할 것이다. 실존하는 한 인간의 유전자 복제물이 되는 아이를 창조하기 위한 클로닝 작업은 복제아clone child의  개성과 자유를 훼손하고, 동시에 그 아이를 우리 자신의 의지와 과학기술의 생산물로 만듦으로써 인간의 존엄성을 우롱한다. 물론 당장의 위험은 다음과 같다. 즉, 생산물이라는 점에서 복제된 아이들의 인권이 의문시될 것이며, 원본의 복제물이라는 점에서 이 아이들은 어쩔 수 없이 이류의 시민으로 취급받고 그들 스스로도 그렇게 처신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클로닝은 유전공학 프로젝트의 시작에 불과하다. 다음의 단계들은 유전병을 '치료'하거나 '예방'하려는 시도, 그다음에는 초인이나 다음-인간을 창조하여 유전적 특성을 '개선'하거나 '향상'시키려는 시도들을 포함하고 있다.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는 전망을 가장 개연성 높은 귀결로 낳게 되는 것이 바로 이 프로젝트이다. 그 까닭은 인류의 역사를 돌이켜보건대, 우리가 다음-인간들이 우리와 동등한 권리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고 보거나 또는 다음-인간들이 우리를 그들과 동등한 사람으로 볼 가능성이 극도로 희박하기 때문이다. 대신에 우리가 그들을 위협적인 자들로 여겨서, 그들이 우리를 죽이기 전에 가두거나 아니면 그냥 먼저 그들을 죽이려고 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아니면 반대로, 다음-인간이 우리(보통의 흔한 인간)를 노예로 삼거나 우선적으로 대량학살되어야 할 인권이 없는 열등한 하위 종으로 여기게 될 수도 있다.

내가 '유전학적 종족 말살'이라고 이름 붙인 바 있는, 유전자 차이에 근거한 종족 말살의 가능성, 이것이 바로 종을 개조하는species-altering 유전공학을 잠재적인 대량학살 무기로 만들고, 책임 없는 유전공학자를 잠재적인 생물학적 테러리스트로 만들고, 책임 없는 유전공학자를 잠재적인 생물학적 테러리스트로 만든다. 조금은 과장된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르완다에서의 종족 말살을 막기 위해 미국이 조치를 취하지 못한 사실에 대한 분석이 보여주듯, 행위를 하지 못한다는 것이 반드시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은 아니다. "종족 말살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어떤 경우도 정치적·도덕적·상상적 결함들에서 기인하지, 정보의 결함들에서 기인하지는 않는다." 새로운 유전학의 희망적인 측면은 유전학이 우리를 새롭게 그리고 좀 더 근본적으로 이해하는 데 견인차의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 그리고 바클라브 하벨Vaclave Havel이 우리의 '종적 의식'이라고 말한 바 있는 것을 형성하도록 도울 수 있다는 점에 있다. 우리는 이 종적 수준의 의식을 통해 우리의 유전과학에서 일어날 수 있는 결과들을 생각해보고, 예견 가능한 재앙을 막기 위해 효과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무엇을 해야 하는가?

새로운 유전학의 잠재적인 폐해들로부터 우리를 보호하기 위해 생명 윤리가 요청되어왔다. 그러나 생명 윤리가 의사-환자의 관계라는 맥락에서 형성된 개인의 결정에 초점을 두고 있는 한, 생명 윤리의 종(種) 전체에 걸쳐 있는 문제들과 대결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없다. 생명 윤리가 도울 수 있다고 하더라도, 잠재적으로 훨씬 더 효력을 갖는 기틀은 국제 인권이란 말과 그 실천이다. 나의 개인적 견해로는, 인간사회의 주변부에서 활동하는 이단 종파나 그 밖의 이들이 인간 복제를 하겠다고 위협하는 것은 세계에 어떤 계기를 마련해준다. 세계가 여태껏 극도로 어려웠거나 혹은 불가능했던 방식들로 예방적 조치를 취할 수 있는 계기 말이다.

특히, 유네스코의 인간 게놈과 인권에 관한 세계 선언, 그리고 전 세계 사람과 정부가 보여준 인간 복제 계획에 대한 압도적인 반발은 인간 종의 보전에 관한 공식적인 조약의 체결로 이어질 수 있다. 나는 지금 이를 제안하는 것이 합당하고 책임 있는 일이라고 믿는다. 이 조약은 종 개조 기술과 종을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실험을 모두 금지해야 한다. 특히 인간존재가 지닌 유익한 근본적인 특성들에 대한 개조를 꾀하는 과학기술들을 금지해야 한다(이런 개조는 인간이 아이를 가질 수 있는 방법에 클로닝-무성 복제-을 추가함으로써 유성생식을 선택 가능한 것으로 만들고 그 결과 우리의 특성들도 선택 가능한 것이 되는 방식으로, 아니면 배아의 유전암호를 바꿈으로써 그 결과로 나온 아이가 인간의 아종이나 혹은 새로운 종의 일원으로 간주되게 하는 그런 방식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종을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실험들이란 종 전체를 위험에 처하게 만드는 실험들이다. 이종 이식을 위해 돼지의 기관을 이용하려는 요즘 유행하는 기획들이 그런 실험들인데, 이 기획은 HIV와 유사할 수 있는 새로운 치명적 인간형 바이러스를 생겨나게 할 위험이 있다.

이 조약은 또한 감시하고 검토할 수 있는 본부를 가진 민주적이고 책임 있는 시행 메커니즘을 내포하고 있어야 한다. 종을 개조시키거나 멸종시키는 범주 안에 있는 어떤 실험도 이 본부의 우선적인 조사 검열과 승인 없이는 합법적인 일이 될 수 없을 것이다. 과학자들과 기업들의 개입이 생명 종에게 해가 되기보다는 훨씬 유익할 것이라는 점을 그들 스스로 증명하도록 책임을 부과함으로써 이 조약은 종을 개조시키고 멸종 위기에 빠뜨리는 개입에 대해 환경운동의 사전주의 원칙 입장을 채택하게 될 것이다.

솔직히 우리에게 과학이 자기 마음대로 우리를 이끌고 가도록 내맡겨두려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과학은 우리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드는 측면과 종적 자멸의 위험을 높이는 측면 양쪽 모두에서 너무 강력해졌기 때문에, 우리는 인류의 구성원으로서 서로에 대해 지는 상호적 책임을 더 이상 방기할 수 없다.


결론

나딘 고디머는 남아프리카의 아파르트헤이트 이후에 관한 그녀의 기존 관념을 뒤흔드는 시사적 소설 『가정의 총』에서, (친구를 죽인 한 젊은이의 부모인) 해럴드Harold와 클로디아 린드가드Claudia Lindgard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린드가드는 인종주의자가 아니다. 만일 인종주의자가 다른 색의 피부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지며, 피부색이나 종교, 국적이 당신과 다른 사람들은 모두 지적으로 그리고 도덕적으로 열등하다고 믿거나 믿고자 하는 사람을 의미하는 것이라면 말이다. 물론 의사인 클로디아는 피부 아래에서는 살과 피, 그리고 고통이 모두 같다는 것을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해럴드 역시 자신의 신앙을 통해 모든 인간은 그리스도를 닮은 신의 피조물이며, 누구도 다른 이보다 위에 있지 않다는 것을 명확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둘 중 아무도 운동에 참여하거나, 항의하거나, 공개된 시위에서 행진을 하거나, 이러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의견을 털어놓은 적이 없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들이 그런 종류의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마치 그것이 실패한 용기의 문제가 아니라 혈액형과 같이 변경할 수 없이 결정된 문제인 듯 말이다.

아파르트헤이트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직접적인 행동이 취해져야 한다. 비록 린드가드 집안의 사람들은 행위의 유전적 결정주의를 믿는 것 같지만, 당면해 있거나 임박할 우려가 있는 인권유린 앞에서 아무런 행위를 취하지 않도록 유전암호화되어 있거나, 그런 행위를 변명해 줄 어떤 유전자(혹은 혈액형 특성)도 없다. 유전자주의에 직면하여 행위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선택 사항이 아니다. 우리는 다 함께 유전자 프라이버시를 촉진하고, 인간에 대한 클로닝과 유전공학을 막아야 하며, 존엄과 평등에 근거해 있는 보편적 인권을 촉진하고 보호해야 한다.

종적인 차원에서의 행동이 없다면, 유전자주의는 지구상의 가장 파괴적인 병폐로서 인종주의를 무색하게 만들 것이다. 우리는 모두 아프리카인이다. 우리는 모두 인간이다.
 


<조지 아나스 George J . Annas>

보스턴 대학의 보건과 법학부, 생명 윤리와 인권학부 교수이다. 저작으로는 The Rights of Patients(1975), Some Choice: Law, Medicine, And The Market(1998), Health  and Human Right(1999) 등이 있다.


<이 기사는 (주)문학과지성사와의 협의를 거쳐 아래 책에서 발췌 작성하였습니다. 무단 전재와 복제를 금합니다.>

가치는 어디로 가는가

제롬 뱅데 | 이선희|주재형 옮김

문학과지성사 2008.06.30

이진의 기자 (lifeinbook@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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